보이는 꽃이나 수목같은 주변의 자연에서 보여지는, 떨어진 낙엽까지도, 요즘 심취(心醉)한 민화 그림의 소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이나 사진에서 보이는 꽃을 보면 “바림”이 생각나고, 배합하는 채색이 떠오른다.
마치 바둑을 처음 배웠을 때, 눈을 감으면 바둑판이 천장에 떠다니던 것처럼, 그림하고의 연관 지어지는 것이 조금은 당황스럽다.
내가 화가도 아니고,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민화에 심취하여 시간이 허용되면 거실에 붓 발을
펼치는 취미가 된 것이다.
나의 성향이,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가보지 않은 길의 유영을 즐기는 것이다 보니, 호기심의 대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해 심취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어린 시절, 국민 학교 취학연령 때에, 한글을 익히고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시대적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만으로 만족하여야 하는 사람도 있고, 제때 학교를 입학 하는 것만 하여도 감사하던 시절이니, 여유를 갖고 자녀 교육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으니, 미리 선행학습으로 글을 깨치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사람들의 먹고사는 먹거리 걱정이 우선이기도 하였으나, 어느 집을 막론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학구열만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손수건을 오른쪽 가슴에 걸친 1학년 입학식 대열의 끝에는, 실제로 몇 년씩 늦게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군데군데 자리하였으며, 심지어 동년배의 머리만큼 커다란 학동도 눈에 띄었다.
가끔 ‘그들이 끝까지 남아 학교를 졸업 하였을까?’하는 쓸데없는 궁금증을 떠올리기도 하였던 것은, 엄청나게 늘어난 학생들로 하여 교사(校舍)가 부족하여, 부랴부랴 인근에 학교를 신축하여 분교를 단행, 학생들이
여러 학교로 분산되어 그들과 끝까지 졸업하는 과정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시절 국민 학교를 생활고로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도 왕왕(往往) 있었기에 어린 시절 추억의 고리로 남는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영희야 놀자!
철수야 놀자!”로 시작하는
국어책은 그냥 음율을 흥얼거리는 것으로 따로 익히지 않아도, 배워지며 암기되는 오랫동안 지켜진 매뉴얼인 탓에, 한글을 눈과 귀로 먼저 읽혀갔다.
말하기 → 읽기 → 쓰기의 글의 습득 과정을, 나는 그림으로 보고 익히는 만화로 시작하였다.
당시 기라성같은 만화가중 한분인 ‘임창’작가의 모자챙을 위로 쓴 “땡이“ ‘이근철’작가의 전쟁을 소재로 그린 ”바다의 사자“에 나오는 얼굴 길쭉한 만화 주인공이 번번이 귀가 시간을 붙잡았고,
동전만 생기면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만화방으로 발길을 돌렸으니,
당시의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결코 인정되지 아니하는, 그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일탈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1원짜리 동전을 지불하면 그 자리에서 만화책 2권을 대본할 수 있었다.
만화책을 읽는 취사선택의 기준은 그림의 선호도에 있었다. 익숙한 작가의 그림이나 스토리가 아니라면,
그림체가 나의 선택 기준이 되었다.
복잡하고 난해한 그림체보다는 simple한 그림체를 선별하는 것이, 내용이나 흥미를 차치하고 먼저 눈에
뜨일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도 나는 웹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인터넷사이트에 연재되는 만화에서도, 같은 취향의 선택 기준으로,
웹툰을 선택하여 구독한다.
휴일을 맞아 온 가족이 출동하여 처가를 방문하다.
내 눈의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노환으로 자리보전을 한 장인의 환후 때문에 자녀들과 시간이 허락되는 손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함 이었다.
모두 생전의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함께하는 내내 아무도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소학교 시절 몇 년씩이나 월반하는 등의 명석한 두뇌로, 오랜 공직 생활을 지켰던 그분의 생이 빛바래지고,
흐려지는 눈동자와 변하는 모습이 생경하다 못해 낯설게 느껴진다.
시간을 지키는 안타까움은 고목같이 굳건하나 현실은 인생무상 이다.
인생은 늘 선택의 문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느 날 어떤 순간 어느 시간의 판단을 하였는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연장선에서 예측불허의 운명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결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이 고뇌의 순간에, 희망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과를 미리 알고 정해진 대로만 산다면 희망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에 대한 오류를 수정하며, 수많은 새로고침으로 살아가는 것이 삶이고 희망이다.
굽이굽이 넘나드는 인생길에, 차갑게 식은 커피 한잔을 마시며 상념의 고개를 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