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밀회’에 대한 소회
“더, 듣고 싶어서.”
퀵 배달원 선재. 6살 무렵부터 엄마가 문을 잠그고 일하러 가시면 늘 혼자, 남았다. 이사 전 누군가 버리고 간 피아노와 함께. 아무도 모른다. 그가 어떤 연주를 하는지. 그의 친구도, 여자 친구도, 학교의 선생님들도. 그런데 그 여자만이 그의 연주를 더 듣고 싶어 했고, 그와 함께 한 마음을 연주했고,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했다. 다른 세계의 그 여자가. 벅차올라, 달리면서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
벌써 몇 년 전 종영한 드라마 ‘밀회’ 1회를 보고 썼던 감상의 일부다. 지금도 두 주인공이 함께 피아노 연주를 할 때의 호흡과 선재(그때 연기 참 좋았는데…)가 웃으며 날아오르듯 달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사랑’이라는 건 이런 느낌일까?
결혼은 했지만 사랑은 모르겠다. 지금 같은 시대에 말이 되냐고 할지 모른다. 부모님이 결정하신 상대와 첫날밤이 돼서야 희미한 촛불 아래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절도 아닌데 말이다. 아,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결혼이 뭐 뽑기도 아니고, 복불복도 아니고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을 남과 여 모두 불쌍하다. 그 시절엔 결혼이란 것의 의미가 지금과는 달랐다고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될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전, 애아빠에게 소울메이트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는 부부간에 소울메이트는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생각하는 소울메이트와 그가 생각한 소울메이트의 의미가 달랐던 거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한 소울메이트는 ‘감정의 교류’에 우선순위가 있었지만 그가 생각한 초점은 단지 섹스의 유무였던 것 같다.(아닐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은 관심 없다.) 그때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고, 그대로 대화는 단절됐다.
매슬로우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인간의 욕구 중 최고의 단계라고 했었나 보다. 지금은 그 이론에 이견이 조금씩 있는 것 같다. 여러 욕구들이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나.(매슬로우 자신도 죽기 직전엔 자신의 욕구 이론 삼각형의 위, 아래가 뒤집어져야 맞다고 말했다고.) 궁금하다. 욕구들을 단계별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무리수인 거 아닐까? 지금 내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것처럼 이런저런 욕구들도 마구마구 뒤섞여 있는 것 아닐까.
사랑에 대해 말하다 갑자기 매슬로우라니.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내가 지금 굉장히 존재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과 몇 달 전 어렵게 준비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벅찼고, 경제적 자립도 이루었고, 이제는 행복할 것 같았는데, 지금 나는 몹시 불안하고 우울한 상태라는 것이다. 내가 공무원이 된 건 차선책이었고 진짜 꿈(이라고 믿는) ‘건축가’라는 타이틀은 저 멀리 있고, 공무원으로서 지금 나는 의미 없어 보이는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을 뿐, 그마저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
뭔가 있어 보이는 팀에서 첫 근무를 하게 된 것에 괜히 들떴던 마음은 잠시 뿐이었다. 공무원은 철밥통이라지만 순환보직제 아래서 나는 언제 어디로 발령 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끊임없이 평가당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지금 소속된 팀에서는 이렇다 할 업무분장을 받지도 못했는데 다른 팀 일이나 하느라 정신없고 이 일을 제대로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불안하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내 기수는 유래 없이 많이 뽑아서(그 덕에 뽑힐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승진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한다. 나보다 한참 어린 동기들에 밀린다는 건 또 막상 참기 힘들 것 같다. 나이 부심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이는 한참 아래지만 경력은 나보다 위인 선임들 아래서 덜컹덜컹하는 수레나 끌고 다니고 책상과 의자를 나르고 연필이나 깎아서 나르는 일을 하고 있자니 밀려드는 자괴감이 상당했다. 나는 또 이 조직 안에서 인정받고 싶어서 어떨 줄 몰라하고 있다.
학창 시절, 누가 몇 점을 맞았건 몇 등을 했건 상관없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좀 잘났다는 착각 또는 정신승리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땐 내가 좀 잘난 것 같았다. 그것도 자존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지금은 내 자존감이 바닥이라서 이렇게 인정에 목마른 걸까. 자존감은 어떻게 해야 올릴 수 있을까? 사람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지만 난 적어도 한 가지면에선 특별한 사람이고 싶다. 셀러브리티라는 노래 가사처럼, 투박하지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은데 그냥 투박한 걸론 만족이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사랑 하나면 해결되는 것일지 궁금하다. 결국 뫼비우스의 띠 같은 생각의 굴레를 돌고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