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0년 차 전업주부의 삽질(이란 무엇인가)
결혼 전에는 청소, 정리정돈 정도만 했지 라면조차 끓일 줄 모르는 나였다. 다행히 남편은 어릴 적부터 가족이 다 함께 집안일을 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 당연히 라면 정도야 나보다 맛있게 잘 끓였다. 그럼에도, 갓 결혼한 나는 주부로서의 사명감이 불타올랐으므로 요리책을 보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내는데 정말 열심이었다. 처음 만든 뭇국은 맛이 그냥 무(없을 무)였다. 아무 맛이 안 나는 뭇국, 깊숙이엔 아직 생살을 간직한 마늘통닭, 구토를 유발하는 쌀국수 등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의 경제적 자립능력은 퇴화했고 내가 원했던 자아와도 점점 멀어졌다. 아니 원했던 자아는 원래 없었고 그냥 인정하기 싫은 자아만이 남았다면 더 맞을까.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은 사람으로 살려면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결혼 전엔 엄마가 해주셔서 잘 몰랐던 일이다. 결혼하고 직장을 그만둠과 동시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집안일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 남편이 거들면 매우 고마운 일이 되었다. 안 하면 티가 확 나는데, 열심히 해봤자 티는 안 나고, 직접적인 보상도 없는 일. 주부가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온 일. 그런데, 싱크대 하수구를 닦고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어느 순간 공허하다.
간혹 살림은 사람을 살리는 일로 떠받들여지기도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살림하는 여자들을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는데, 도대체 하는 일이 뭔데?!' 이런 시각은 노골적이진 않을지라도 아직 건재하다. 같은 여자이면서도 운전을 하다가 운전 매너가 서툰 김여사들을 마주치면 자기도 모르게 '집에서 놀기나 하지 왜 차를 끌고 나와서!'라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나도 그런 모순적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생각은 어릴 때부터 보고 듣는 것들로부터 뿌리 깊게 내 안에 자리 잡은 것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분담해 직접 해봐야만 그것에 대해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결혼 전에는 가사노동에 대해 대부분을 몰랐듯이 그것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한 그런 시각이 바뀌는 데엔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기만 기다리기엔 내 삶은 유한하다. 그런데 내 깊은 곳의 모순된 생각을 뿌리 뽑고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다. 좋은 맘으로 남편이 먹고 싶어 한 콩국수를 만들다가도 콩깍지를 까다보면 어느새 화가 난다. 어떤 인정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집안일만 해도 행복하고 싶지만 문득문득 마음 한구석이 헛헛하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희생'을 담보 삼아서 장성한 자식에게 빚을 지우고 이자를 불리고 싶지도 않다.
내가 억울해지지 않고 숨통을 트기 위해서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만 집안일을 하고 그 외엔 나에게 투자하는 것뿐인 듯싶다. 그렇게 하면 꽤 많은 시간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으니 가능한 일이다. 비워낸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자주 그림을 그리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그릴 때 분명한 행복을 느낀다.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글은 쓰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래도 끝내 덜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경제적 의존과 무력감. 독서, 글쓰기, 그림 같은 것들로 무형의 자산을 일구었지만 그것들이 밥을 주진 않는다. 내 명의의 현물자산이 필요하다. 나름의 준비를 하는 중이다. 언젠가는 다시 사회에 나갈 것이다.
남편이 언젠가 밥 하기 싫어하는 나에게 "다른 사람은 가족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하면 행복하다고 하던데..?!" 그때는 그 말에 내가 이상한가 싶어 잠시 대답을 망설였었지만 이젠 이렇게 되묻고 싶다. '당신은 가족을 위해 회사에서 일을 하니까 항상 행복해?'
이렇게 길게 쓰고서도 찜찜한 게 하나 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이 '사랑' 하나면 퉁쳐질 수 있는 것인가... 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고 보상 같은 건 없어도 상관 없어질 '사랑'.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보상이 되는. 2년이나 3년도 안돼 사그라질 그런 뜨건 사랑 말고 따뜻한 뚝배기 같은 사랑, '진정한 소통' 하나면 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은 낭만적인 헛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결국. 모르겠다. 그냥 삽질이라도 해보는 수밖에. 누구...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