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의 나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만족하는 훌륭한 겁쟁이였다. 갓난아기 때부터 유독 낯을 심하게 가렸다는데, 옆집 아줌마가 한참 들여다보고 간 후에 한참을 눈도 깜빡 않고 천장만 바라보기에 뭔가 이상해 들쳐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발작을 일으킨 거랜다. 낯선 얼굴에 놀라서. 그렇게 난 사람들과 눈도 잘 못 마주치고 툭하면 말미잘처럼 움츠러드는 아이로 성장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 대중교통을 혼자 타는 것, 전화를 받거나 거는 것, 식당에서 주문을 하는 것... 모든 게 그저 피하고 싶은 미션이었다.
또 귀신은 어찌나 무서워했는지 한참 덩치가 커지고 나서도 툭하면 안방으로 달려가 엄마 아빠 사이를 파고들었다. 방문은 꼭 10cm 이상 열려있어야 하고, 은은한 간접조명은 필수. 어두운 방에서는 절대 혼자 잠들지 못했다. 시골집에 살 때는 밤에 화장실을 혼자 못 가 언니의 구박을 여러 번 받았고, 샤워를 할 때도 반드시 문을 열어뒀으며, 중학생 때 엘리베이터의 양면 겨울이 너무 무서워 엄마를 1층으로 부른 적도 있었다...
이렇게 소심하고 겁 많은 내가 당시 자주 들었던 말, 그리고 자주 했던 생각은 이거였다.
어른 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래서 과연 서른이 넘은 진짜 어른이 된 지금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일단 첫 번째 의미의 겁쟁이에서는 완전히 탈피하는 데 성공했다. 어릴 때 내가 사회가 말하는 전형적인 A형이었다면, 지금은 전형적인 O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별 의미는 없지만 실제로는 A형이다) 성인이 된 이후 재미 삼아 혈액형을 맞춰보라고 하면 O형 > B형 > AB형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야 의구심 가득한 눈빛과 함께 "설마 A형...?"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쾌활하고 명랑한, 사교성 좋은 인간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길을 물어보고 주문을 하는 건 기본, 컴플레인까지 야무지게 건다. 오랜만에 친척들과 모여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데 능수능란하게 주문하고 주소를 부르며 결제 방법, 시간 체크까지 하는 내 모습에 다들 웅성거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릴 땐 고렇게 맹하고 어리바리하더니, 언제 저렇게 컸대...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성향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한 걸까-?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 시골로 이사를 간 것이 시발점이지 않을까 싶다.
아궁이와 마당이 있는 기와집. 싸리나무 대문 너머 "ㅇㅇ야~ 놀자~" 목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뛰쳐나갔다. 첩첩산중 시골에서 놀 거리라곤 동네 아이들끼리 모여 산과 들에서 뛰어노는 게 전부인 것이다. 망아지처럼 뛰어 논 덕에 피부는 점점 까무잡잡해졌지만(엄마는 아직도 내가 그때 이후로 영영 까매졌다고 믿는다) 동시에 어딘가 깊이 숨어 있던 외향성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나 보다. 중학교 때 다시 도시로 이사를 왔지만 그때 얻은 자신감 덕분인지 학급 부반장, 회장 따위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연극부와 선도부 반장을 도맡았다. 물론 대학교에서는 방송국 국장이 되었고, 회사에 가서는 신생 동아리를 만들어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은 셰어하우스의 수장이 되어버렸고.... 여하튼 나서지 않고는 못 사는 성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무서워 덜덜 떨던 아이가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제일 좋아하는 핵인싸가 되었다. 보통 성격, 혹은 사람의 본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경우는 성격이 변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잠재되어 있던 것뿐일까? 그러니까 어렸을 때의 겁 많은 내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레벨업 한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성격이 모종의 기억나지 않는 트라우마로 억압돼 있던 것인지- 둘 중 진짜 본성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
여하튼 새로운 것을 겁내기는커녕, 지루한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어른으로 성장하였지만 두 번째 의미의 겁쟁이에서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고백한다.
나는 여전히 귀신이 무섭다. 너무너무. 젠장...
대학교에서 2인 1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가장 싫었던 게 룸메가 없이 혼자 자야 하는 주말 밤이었다. 우리 학교는 음기가 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복도에 걸린 호랑이 그림이라든지 뒷산의 무당집이라든지 아무튼 제법 흥미롭고 적당히 흉흉한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다. 꼭 그런 날 밤에는 의식해서 그런지 가위에 눌렸다. 가위에 눌리면 온갖 소리들이 귓가에 들려온다. 베개 옆을 손톱으로 세차게 긁는 소리라든가, 룸메 책상에서 타닥타닥 자판을 치는 소리, 아니면 파티라도 하듯 웅성웅성 시끄러운 복도... 너무나 실감 나서 실제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밖에 믿을 수가 없는데 막상 탁- 가위가 풀리고 나면 새벽 두 시,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한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시작했을 때도 비슷하다. 그나마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은 곳이고, 호동이라는 룸메이트가 있으니 다른 장소보다는 좀 낫긴 하지만 한 번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밤새 잠을 설쳐 녹초가 되었다. 가족들은 그래도 쟤가 다 컸다고 혼자 자취도 하고 대단하네, 하는 반응이지만 어쩌면 자취 5년 끝에 셰어하우스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결국 '혼자 자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내가 2층 침대가 있는 제일 작은 방을 쓴다고 했을 때 왜 제일 안 좋은 방을 쓰냐며 의아해하는데, 고백하자면 이렇다. 난 겁쟁이라 아직도 혼자 자는 게 싫어요. 누가 내 위에서 뒤척뒤척해야 마음이 편해진다고요.
조금 나아진 게 있다면 귀신이 무섭긴 하지만 공포가 주는 스릴감도 어느 정도 즐길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공포영화라면 그저 질색이었는데, 이젠 여럿이서 함께 꺅꺅거리며 실눈을 뜨고 보는 짜릿함이 재밌다. 그래도 선녀방에서 <유전>을 보고 나서는 너무 무서워 한 방에 모여 자야만 했지만 아무튼, 장족의 발전이다. 심지어 가끔 삘이 꽂힐 때면 인터넷에서 공포 글을 잔뜩 찾아 읽기도 한다. 물론 가까운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 오늘 밤 룸메가 들어오는 것이 확실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귀신보다 사람에 대한 무서움은 커졌다. 자취를 하다 보면 빈 집에 혼자 들어갈 때면 왠지 모를 공포감에 식은땀이 흐를 때가 있다. 나올 때 불을 안 껐던가? 저 책을 저기에 놨던가? 기시감이 느껴진다든지, 비 오는 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들린다든지, 누군가 세탁실이나 옷장 안, 침대 밑에 숨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손에 땀을 쥔 적도 많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으니 나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공포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강도나 성폭행 같은 범죄는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으니 사실 귀신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이야기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겁이 많다"는 꼭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 듯하다.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나와는 반대로 귀신 따위는 무섭지 않지만 새로운 사람과 말하는 게 두려운 어른도 많을 테니 말이다. 어렸을 땐 하나도 무섭지 않았는데, 크고 나서 무서운 것들이 생길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놀이기구 같은 것들이 그렇다. 어렸을 땐 내 세상인 듯 다 누비고 다녔는데, 지금 놀이공원에 가면 과연 몇 개나 탈 수 있을까.
세월에 따라 좋아하는 음식이 바뀌듯 겁을 내는 대상도 바뀌나 보다. 지금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귀신이나 살인마지만, 몇십 년 후 나를 벌벌 떨게 만드는 건 대출금이나 병원비, 암이나 뇌졸중, 뭐 그런 걸 수도 있겠지. 어쩌면 지금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들은 사실 내가 큰 걱정 없는 무탈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일지 모르겠다.
속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어른 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 딱히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뒤에 이런 의미가 숨어있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