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재 Jun 11. 2020

나이 든 고양이처럼 울어라

두드리면 문은 열린다 

호동이는 2020년 열아홉 살이 되었다. 나이 든 고양이를 여러 번 키워 보았던 것은 아닌지라 원래 노령묘들이 대체로 그런 건지 호동이가 유독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늘 그의 초록색 눈동자 너머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혼의 무게감을 느꼈다. 

호동이는 여러모로 고양이보다는 사람 같았다. 일단 다른 고양이들에게 일체 관심이 없었다. 동물병원에서 종종 부딪히는 다른 동물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가끔 창문 너머 담벼락 위의 길고양이들이 야옹거리며 열렬히 아는 체를 해도 고개 한 번 돌린 적이 없다. 이 도도함은 오직 동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분명 이 녀석은 본인(?)은 급이 다른 생명체, 적어도 최소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직 공간을 싫어했다. 수직 공간을 싫어하는 고양이라니,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실 나도 이 사실을 아주 늦게, 그러니까 올해 들어서야 깨달았는데 새로 들여놓은 캣타워에 이 놈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아무래도 관절이 불편한가 봐~" 하고 넘기려 했는데 문득 돌이켜 생각해 보니 18년간 찍어 온 수백, 수천 장에 달하는 사진들 중 이 녀석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찍힌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늘 이 놈은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올라가 봤자 기껏해야 의자나 침대 정도가 최대. 결코 나이 때문이 아니라 그저, 태초부터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고양이였던 것이다.

녀석의 비범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청소기와 드라이기 소리를 두려워 않는, 아니 오히려 만끽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물론 열다섯 살 쯤부터는 귀가 들리지 않기도 했지만 이 역시 어릴 때부터 보였던 특별한 행태였다.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틀면 쏜살같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리고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지긋이 눈을 감고, 얼굴로 쏟아지는 따뜻한 바람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덕분에 집사 30초, 주인님 30초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드라이를 하느라 출근 시간은 더욱 늦춰졌다. 아, 그는 정말로 고양이답지 않은 고양이였다. 

 



18년간 합을 맞춘 끝에 눈만 마주쳐도 뭘 원하는지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평소 인간보다 더 능글맞게 굴다가도 '거 참 어쩔 수 없는 고양이 구만' 싶은 순간이 있었다. 바로 매일 이른 아침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끝없이 울 때였다. 호동이는 큰 방 안의 욕실에서 집사들이 떠받친 신선한 물을 마시는 걸 좋아했는데, 아침 일곱 시도 되기 전부터 거기에 꼭 들어가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몇 분이든, 몇 시간이든 그 앞에 망부석처럼 앉아 문이 열릴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마침내 문이 열리면 후다닥 들어가며 "이야아옹~~~!!" 하고 조금 다른 톤으로 언성을 높이셨는데 그건 분명 "어차피 열어줄 거 다 아는데 왜 이렇게 애를 먹여!" 하는 핀잔이었다. 

평소에는 참 점잖고 우아한 양반이 왜 꼭 아침마다 그 고집을 부리시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덕분에 생활패턴이 모두 제각각인 셰어하우스 식구들은 거의 매일 이른 아침 앙칼진 모닝콜로 눈을 떠야 했고 아무리 호동이를 사랑한다 한들 그때만큼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울컥울컥 올라오기도 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왜 호동이는 저 방문 앞에서 저렇게 매일같이 울까?'


물론 표면적인 답은 그 욕실에서 지금 당장 물을 마시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옆에서 지켜본 바 그는 대체로 몹시 지혜로운 고양이에 속했다. 안 돼, 하지 마- 같은 부정적 어조에 언제나 순응했고 한평생 물건 한 번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무던하고 착한 고양이기에 유독 그 문제에 있어서만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고민 끝에 이런 결론에 다다랐다. 호동이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저 문은, 반드시 열린다.


그 문이 10분 후 열리는지 1시간 후 열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결말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매번, 어김없이, 그 방문은 꼭 열리고야 말았다. 호동이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곳에 들어가고 싶고, 계속 울면 방문은 언젠가는 열린다. 오직 그 논리만이 작은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으리라. 물론 가만있었어도 언젠가는 열릴 문이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그의 목표 달성률은 100%에 달한다. 


과연 우리에게는 문이 열릴 때까지 줄기차게 우는 고양이의 미련함을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대다수 인간들은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정신적 피해를 입는다. 정확히 언제 열리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어제까지는 됐어도 오늘은 혹시 모른다는 불안감,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싶은 자괴감, 누군가의 문은 더 쉽게 더 빨리 열렸다는데 나만 뒤쳐지는 것 같은 초조함... 


자칭 고등생물인 우리들은 높은 지능의 축복으로 인해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버무려 어떻게든 걱정을 이어나간다. 매일 지치지 않고 울어대는 호동이를 보며 내심 힘들지는 않을지,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닐지 걱정했지만 애초에 고양이는 싫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 동물이다. 나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매일 멋지게 자신의 목표를 성취해내고 있었으며,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현재에 올인하지 못하는 열등한 생물은 바로 나였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미련하다고, 그래 봐야 아무도 몰라준다고, 끝이 안 보이는데 언제까지 고집부릴 거냐고 입 모아 말하더라도 가끔은 끝까지 버텨내는 나이 든 고양이의 미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자고로 두드리면, 문은 열리는 법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버림받은 고양이지만 당신을 사랑할거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