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더치페이의 미학
*표지 일러스트 출처 http://weekly.donga.com/List/3/all/11/749170/1, 오동진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더치페이를 하게 되는 상황이 오기 마련이다. 함께 점심식사를 했는데 한 사람이 카드로 식사값을 한꺼번에 결제했다든가, 팀에서 공동으로 팀원의 생일선물이나 결혼선물을 준비하는 경우 등등 말이다. 이때 보통 결제를 한 사람이 내역을 정산해서 메일이나 문자, 카톡 등으로 얼마만큼 어느 계좌로 넣어달라고 발송하기 마련이다. 아래 예시처럼 말이다.
오늘 식사비 정산합니다. ^^ 각자 드신 메뉴 확인하시어 아래 계좌로 입금 부탁드립니다.
김XX 우리 123-4567-8910
설렁탕 6,000원
선지 해장국 6,500원
뼈다귀 해장국 7,000원
여기까지는 쉬운 문제다. 금액이 딱 떨어지기 때문에 정확한 액수를 입금하거나 혹은 현금으로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산금은 되도록 정산 내역을 전달받자마자, 빠르게 입금할수록 좋다. 금액이 적거나 지금 당장 귀찮다고 해서 몇 시간, 혹은 하루 이틀 정도는 늦게 줘도 괜찮지 않을까..? 매일 얼굴 보는 사이인데 돈 떼먹을 것도 아니고-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고작 몇천 원에 힘들게 쌓은 신뢰를 깎아먹지 말자. 동료는 당신이 그 돈을 갚을 때까지 겉으로는 차마 티 내지 않겠지만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받지 못한 점심값을 떠올릴 것이다. 게다가 차일피일 미루다 아예 까먹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한두 번만 반복돼도 당신은 이미 '일처리 느리고' '덜렁대고' '철저하지 못한', 심지어는 '염치와 양심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물론 아무도, 당신에게 직접 이렇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직장 동료니까. 반대로 돈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을 너무 채근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억울하지만 "그때 먹은 점심값 5,000원 언제 주실 거예요..?" 하고 이야기 꺼내는 게 사람을 참 볼품없어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를 믿고, 어련히 알아서 주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라. 그냥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 정산 내역을 전달받자마자 빛의 속도로 입금한다. 절대 까먹어서는 안 된다.
혹시 하루 지나서 갚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물론 당신이 실제로 미안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다. 직장인으로서 생존을 위한 인사치레일 뿐.
> 깔끔하게 정리한 정산 안내 메일 혹은 문자를 최대한 빨리 발송한다.
내역에 증빙이 필요할 경우 영수증까지 첨부하는 것은 기본.
받아야 하는 금액만 덜렁 써 놓는 것이 아니라 산출 과정을 모두 기입해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한다.
금액이 그리 크지 않을 경우 돈을 내는 사람이 늦더라도 일주일 정도까지는 기다려 본다.
되도록 잊어라, 그리고 그 사람이 늦게나마 돈을 갚을 때는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 듯 "어머, 언제 먹은 거지? 까먹고 있었어요!!" 하고 말해줘라.
올바른 더치페이의 미학은 100원 단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충 얼렁뚱땅 비슷한 금액이니까 퉁쳐요~는 감히 허용되지 않는 세계이다. 물론 내가 더 손해를 보는 건 괜찮다. 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는, 꿈도 꾸지 말자.
신입사원 이모양은 어느 날 지갑을 놓고 온 동료의 점심값을 대신 내줬다. 8,500원이었다. 평소 일처리도 야무지고 인사성도 밝았던 그 동료는, 현금이 없는지 송금이 귀찮은지 며칠 동안 돈을 갚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함께 점심을 먹는데 "어 맞다, 제가 점심값 빌렸었죠? 오늘 점심 제가 살게요!"라고 흔쾌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날 먹은 점심 값은 6,000원이었다. 사회초년생이라 한 푼 한 푼이 아쉬웠던 이모양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6,000원을 내고, 나머지 2,500은 현금으로 준다는 건가?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동료는 정말 점심값 대 점심값으로 2,500을 '쿨하게' 퉁쳐 버린 것이었다. 차마 "2,500원은 안 주시나요..?"라고 할 수가 없어 그대로 넘어갔지만, 이후로도 한참 그 동료를 볼 때마다 그놈의 2,500원이 떠올라 꽁기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마 이모양의 동료는 그 2,500원을 떼먹으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어느 정도 연차가 있는 직장인이라면 몇천 원은 별 차이도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서로 커피를 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까. 그 날 먹은 점심값이 6,000원이 아니라 11,000원이었어도 그 사람은 아마 쿨하게 퉁쳤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의 꿀팁 중 한 가지는 '상대방이 조금이나마 불편하게 생각할만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내가 괜찮으니까 상대도 괜찮을 거야'는 이런 상황에서 역지사지가 아닌 이기주의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예시를 보자.
*과장님 생일선물 구매 내역 정산*
케이크 21,000원 + 향수 55,000원 + 꽃다발 15,000원 = 91,000 / 9(팀 원수) = 약 10,111원
10,000원씩 국민 987-6544-332로 입금 부탁드립니다. :)
당신이라면 얼마를 입금하겠는가? 이렇게 액수가 딱 떨어지지 않을 때, 사실 현금이 아닌 계좌이체라면 1원 단위까지도 입력할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다소 구질구질하고 치사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반올림 혹은 반내림 해서 깔끔히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위의 경우는 10,111원이 나왔지만 정산자가 10,100원도 아닌 10,000원을 입금하라며 나름대로의 호의를 베푼 상황이다. 여기서 생각보다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선택지가 나온다.
1. 입금하라는 대로 10,000원을 입금한다.
2. 실제 액수에 맞춰 10,111원을 입금한다.
3. 정산자가 구매하느라 고생했으니 10,200원 혹은 그 이상을 입금한다.
1번은 무조건 지양하자. 물론 내가 1번대로 했다고 해서 정산자에게 욕을 얻어먹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1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래 사례를 보자.
귀한 점심 시간, 짬을 내 송대리는 팀 대표로 차장님 생일선물을 구매했다. 영수증까지 첨부 후 차장님을 제외한 팀원들에게 정산 내역 메일을 보냈다. 정확히 하자면 1인당 20,450원 정도 나왔지만 예의상 그냥 20,000원씩만 입금해 달라고 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팀원들마다 입금한 금액이 조금씩 달랐다. 일단 팀 막내와 대리, 과장 등 대부분은 20,500원을 입금했다. 20,450원에 딱 맞춰 입금한 사람도 있었다. 현금으로 주신 팀장님은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며 21,000원을 주셨다. 그런데 딱 한 사람, 평소 개인주의로 유명한 한 사원 혼자 20,000원을 입금했다. 애초에 20,000원만 받으려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딱 한 사람만 그렇게 보내니 비교가 안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송대리는 이후부터 더치페이할 일이 있으면 무조건 적힌 액수보다 조금 여유 있게 보낸다.
모두가 20,000원을 낸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회사는 단체 생활이고, 단체 속의 개개인이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행동양식을 보인다. 애초에 비교를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조건인 것이다. 억울하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방법밖에는 없다. 결코 내가 몇백 원 더 내는 걸 손해라고 생각하지 말자. 단순히 동료들이 마음속으로 고맙다고 생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상황이 되었을 때 당신에게도 똑같은 호의를 베풀 것이기 때문이다.
> 정산자가 얼마씩만 입금해 주세요,라고 썼더라도 실제 금액을 계산해본다.
100원 단위, 많게는 1,000원 단위까지 반올림해서 입금한다.
정말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지만 송금내역을 확인한 정산자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낄 것이다.
만약 현금으로 줘야 되는 상황이라면 100원이라도 적게 주지 않는다. 1,000원을 주고 900원을 포기하자.
> 뒤에 붙는 숫자가 999 더라도 웬만하면 반올림보다는 반내림을 하자.
100원 혹은 1,000원 단위에 깔끔하게 금액을 맞추어 입금해달라고 요청하자.
혹시 현금으로 받는다면 동전 단위는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요란하게 손사래 치자.
상대가 괜찮다고 해도 거스름돈 받아가라고 세 번까지는 권유하자.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재미있게도 더치페이를 하는 방식에서 그 사람의 인성과 업무 스타일까지 모두 예측 가능하다. 실제 주변 동료들을 잘 살펴보고 비교해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이런 것 까지 신경 써야 할까, 참 피곤하다 싶을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직장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고 까다롭지만 또 요령을 깨달으면 그렇게 단순 명료할 수가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고작 몇백 원(많아야 천 원 미만)으로 '나 이렇게 생각 깊고 센스 있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다~' 맘 껏 티 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 생색용 더치페이, 내일부터 당장 시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