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첫 번째 차사고의 순간
가벼운 접촉사고든 무거운 추돌사고든, 누구나 자신이 낸 첫 번째 차사고를 기억할 것이다. 내 차가 예상치 못하게 다른 사물에 둔탁하게 부딪히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그 아찔한 기분까지도 말이다. 고3 때 1종 보통 면허를 한방에 따고 의기양양했던 나에게는 하필 그 순간이 스물두 살, 한국도 아닌 먼 호주 땅에서 남의 비싼 차를 몰 때 찾아왔다.
1년간 휴학하고 무작정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던 그 때, 처음 내가 선택했던 일은 '오페어'였다. 현지 가정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고 아이도 돌봐주며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개념으로 꽤 괜찮은 보수를 받으며 식사와 숙소도 해결하고, 언어와 문화 등 가장 생생하게 현지인의 삶을 체험할 수 있어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수십 통의 이메일과 전화 통화 끝에 브리즈번 교외에 위치한 한 집에 방문하게 되었고, 덩치만큼 인상도 좋은 노부부는 8살 즈음되었던 늦둥이 외동아들 로리, 그리고 사람만큼 덩치 큰 개 두 마리와 곧잘 어울리는 나를 흔쾌히 새로운 가족으로 맞아주었다. 고위직 공무원인듯한 주인 부부는 한눈에 보기에도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최신 카탈로그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던한 2층 집에 잘 가꿔진 정원과 풀장, 오페어가 있으면서도 청소 도우미를 따로 고용하는 여유로움까지. 로리를 일찍 재운 다음에 둘은 번갈아가며 멋진 저녁식사를 서로에게 대접했고, 고맙게도 그 자리는 항상 나도 초대되었다. 그때 아마 처음 '스파클링 와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탄산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다지 일은 어렵거나 서러울 것이 없었고 나는 그저 간단한 집안 정리와 함께 개 두 마리, 그리고 로리를 돌보기만 하면 되었다. 다행히 로리는 그리 까다로운 남자아이가 아니었다.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고, 태권도였던가 가라데 학원이 데려다주고, 공원에 가서 같이 놀고, 숙제를 도와주고(물론 나보다 영어를 잘했지만..!), 뭐 그런 것들이 다였고 매일매일은 지루하리만치 평화로운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안락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호주는 한국과 운전석이 반대이다. 더군다나 3년 전 면허를 따기만 해놓고 장롱면허였던 나에게 호주에서 운전하기란 상상하는 것만으로 손에 식은땀을 쥐게 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신호도 없는 주택가에서 살살 왔다 갔다만 할 줄 알면 충분하다며 드라이빙 레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막상 해보니 별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나는 슬슬, 자신감- 아니 근자감이 붙기 시작했다. 사실 아저씨가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준 가장 큰 이유는 로리의 등하교를 위해서였다. 차로는 5분 거리지만 걸어서는 15분이 넘게 걸려 로리가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집에서 학교 뒷문까지는 그저 직진, 좌회전 우회전의 연속이었고 단 한 개의 신호도 없는 주택가였다. 그 길에 금방 익숙해진 나는 혼자 로리를 등하교시키고, 완벽한 타이밍에 리모컨을 눌러 정원 입구를 열고 능숙하게 차고지에 주차시키는 스스로의 성숙한 모습에 잔뜩 심취했다. "아니, 운전 엄청 쉽다니까?" "에이 걱정 마~ 아저씨가 나 잘한댔어~" 물론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과장을 곁들인 운전 허세를 잔뜩 부리는 건 필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잔디 같은 금발머리가 사랑스러운 로리가 푸른 눈을 빛내며 나에게 말했다. "우리, 뒷문 말고 정문으로 가면 안 될까? 뒷문은 너무 멀어.." 우리가 늘 가는 주택가 길은 학교 뒷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뒷문에 내려서도 학교 건물까지 조금 더 걸어가야 했는데 로리는 그게 싫었던 것이다. "그래? 근데 나는 정문으로 가는 길은 몰라~" "괜찮아! 내가 알아! 내가 알려줄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히, 단칼에 거절했어야 하는데. 그때 나는 초심자의 얼토당토않은 자신감에 흠뻑 물들어 있었고 언뜻 떠오르는 정문 가는 길이 그리 어려웠던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정문으로 가보자!" 만약 이게 영화나 드라마 속 한 장면이었다면 시청자들은 이것이 불길한 사고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단칼에 눈치챘을 것이다. 항상 그렇지 않은가, 주인공 빼고는 다 안다.
처음은 꽤 순조로웠다. 예상치 못한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처음 만나는 신호등이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갈 만했다. 문제는 학교 정문 안에 들어선 이후부터였다. 차들도 너무 많았고, 아이들도 너무 많았고, 주차할 공간은 없었다. 당황한 나는 "로리!! 미안한데 지금 여기서 내릴래? 얼른!!"을 외쳤고 로리는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일단 가장 중요한 미션은 완수했고, 다음 문제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느냐였다. 머릿속의 답은 간단하다. '온 길 그대로'.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가까스로 정문에서 차를 빙 돌려서 나오니 길이 One Way 였던 것이다. 일방통행. 아아.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라니. 인생은 항상 그렇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큰길에 합류해 어떻게든 새로운 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큰 난관에 빠진 나는 어떻게 어떻게 큰길에 간신히 끼어들었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주택가로 좌회전해 들어왔다.
널찍한 도로 양 변에 한적하게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그런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다행히 그 길가에 움직이는 차는 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자연스럽고 멋지게 난관을 해결했다는 안도감에 한숨 돌린 나는 여기서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른다. 차를 세우지 않고, 서행하는 채로 내비게이션을 조작한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쾅!
그렇다. 얌전히 길가에 잘 주차되어 있는 남의 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아주, 세게. 그나마 속도가 느렸기에 나는 멀쩡했지만 차 두대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 차는 사이드미러가 완전히 꺾여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고 두 대의 앞바퀴 휠이 단단히 끼어서 옴짝 달짝할 수 조차 없었다. 일단 내려서 차 상태를 본 나는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길가에는 정말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어떡하지? 튀어야 하나? 경찰? 아, 근데 나 핸드폰도 안 가져왔는데? 일단 차 주인한테는 알려야겠다 싶어 주차된 집 문을 두들겼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게 서있는데, 구세주같이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괜찮니? 도와줄까?"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옆집 2층 발코니에 아주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주머니는 곧 밑으로 내려와 함께 차의 상태를 봐주셨다. 나보다 훨씬 능수능란한 솜씨로 두 대를 분리시켜 주셨고, 심지어 집까지 데려다주셨다. 핸드폰도 없던 내가 주소는 기억하고 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행히 메모지와 펜이 있어 부재중인 집주인에게는 메모를 대신 남겼다. 그렇게 집에 도착했고 주인 부부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무거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주머니는 먼저 또 손을 내밀어 주셨다. "괜찮으면, 내가 대신 주인 분께 전화로 설명드려도 되겠니?"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주머니가 대신 십여분 통화한 후 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셨다. "주인 분이 바로 집으로 오실 거야." 정말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꾸벅 거리는 내 인사에 괜찮다며 돌아서던 아주머니가 머뭇거리더니 다시 몸을 돌리셨다. ".. 기다리는 동안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하면서 마음 좀 진정시키렴." 나는 그냥 얼떨떨하고 막막했을 뿐이었는데,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거짓말처럼 눈시울이 붉어졌다.
괜찮아,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란다.
다 한 번쯤 겪는 거야.
아주머니는 너무나 푸근하게, 이름도 성도 국적도 모르는 아시안 여자아이를 꼭 껴안아 주셨다. 나는 낯선 외국 땅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친 너무나 익숙한 그 정서, 한국인의 '정'에 흠뻑 젖어 로리보다도 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스물두 살, 성인이지만 아직도 한참 어린 나이. 언어도 문화도 너무나 다른 먼 이국 땅에서 어떻게든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 심지어 호주는 인종차별로 유명한 곳이다. 인종이 다양한 대도시 중심가는 그나마 덜하지만 교외의 주택가로 오면 짓궂은 아이들이 대놓고 손가락질을 한다. 말로는 오페어, 문화 체험, 언어 공부라지만 결국 가정부와 다름없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져 내 인생 첫 차사고가 난 그 순간 나는 참 무섭고 서럽고 막막하며, 쪽팔렸다. 그래서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햇볕 아래 내 어깨를 천천히 하지만 끊김 없이 토닥여주던 손길의 따스함을, 인종과 국적을 아우른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유대를, 아무런 대가와 보상 없이 그 세계의 가장 약자였던 나에게 베푼 선량함을 잊지 못한다.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보험처리가 되어 수리비용이 200불가량만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물론 당시 나에게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없으면 안 될 액수도 아니었다. 저녁 식사 시간 곱게 모은 현금 200불을 건넸지만 부부는 당황해 손사래 치며 괜찮다고 했다. 심지어 알고 보니 내가 어려서 200불이 아닌 1000불 이상이 나왔다고. 자신들에게는 큰돈이 아니지만 지금 네 나이에는 얼마나 큰돈일지 안다- 그러니 괜찮다,라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다. 그래도 내가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안 될 것 같다며 받아달라고, 서로 실랑이를 하다 결국 100불로 합의를 보았다.
+당연히 나는 그 이후 다른 집으로 오페어를 옮겼다.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형 같은 딸 셋이 있는 새로운 집으로. 로리 부모님이 좋게 reference를 써 주셨고 새로운 집에서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었다. 가기 전 로리 부부에게 비빔밥, 계란찜, 불고기 등 제대로 된 한식 저녁식사를 대접했고 그들은 고추장의 매력에 흠뿍 빠져 그 이후로도 꾸준히 사 먹었다. 로리에게는 <말리와 나> DVD를, 부부에게는 한식 요리책을 선물했다. 제일 앞장에 있는 세계지도에 깨알같이 일본의 만행과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내용도 어필했던 것 같다. 물론 로리 부부는 운전 경력을 1순위로 다음 오페어를 뽑았다.
+전화로 차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주인아줌마의 첫 번째 반응은 이거였다. "세상에! 로리는요?!" 로리를 내려주고 사고가 난 게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하지만 오페어는 결국 타지에서 온 어리고 저렴한 아마추어 도우미일 뿐, 절대 한 식구는 될 수 없다고 뼈저리게 느낀 것은 결코 나의 안부는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의 첫 차사고는 훈훈함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기억으로 완성되었다.
+가족들은 아직도 내가 사고 친 걸 모른다. 나는 세계 최고 쫄보가 되어 운전을 안한다. 언젠가 극복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