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에 갇힌 여성 캐릭터들
시사회로 살짝 먼저 만나본 영화 <명당>. 추석 극장가를 노려볼만한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재치 있는 전형적인 웰메이드 한국 상업영화이다. <관상><궁합>을 잇는 역학 3부작 시리즈의 완결판일 뿐 아니라 조승우, 지성, 김성균 등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 대결로 인해 작품의 완성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한데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마음 한편은 영 찜찜하다. 아하, 곧 이유를 깨닫는다. 나는 <명당>에서 냉장고 속의 여자를 보았던 것이다.
'냉장고 속의 여자(Women in refrigerator)' 란 는 만화 속에서 남성 캐릭터의 각성을 위해 살해당하거나, 부상당하는 등 비정상적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소비하는 클리셰를 일컫는 용어, 혹은 그러한 클리셰에 희생당한 여성 캐릭터들의 리스트를 기록하는 웹사이트이다.
출처: http://ko.areumdri.wikidok.net/wp-d/5797c3e0e1db80c0295ed0e6/View
이 재미있고도 섬뜩한 표현의 유래는 DC코믹스에서 발행된 히어로물 시리즈 <그린랜턴>의 한 장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인공 그린랜턴이 잔인하게 토막 난 냉장고 속의 여자 친구를 발견하고, 각성해서 악당을 무찌르게 된다는 아주 뻔한 내용이다.
배경과 캐릭터 설정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실 시대와 문화권을 막론하고 너무나 익숙한 설정 아닌가?
1. 주인공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2. 사랑하는 여자가 악역에 의해 희생당한다.
3. 각성한 주인공이 악을 처단하고 성장한다.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한국영화에서도 '냉장고 속의 여성 캐릭터' 찾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대부분의 상업영화가 철저하게도 이 공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명당>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명당> 속 남성 캐릭터들이 제각각 성내고 모함하고 죽이고 웃기는 동안, 여성 캐릭터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
일단 영화 초반 한 두 컷 등장만으로 '조신하고 순종적인' 존재감을 확실히 하던 박재상(조승우)의 아내는 당연히, 악의 세력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 당한다. 물론 이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던 조승우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는다. 처자식의 죽음이 박재상 캐릭터 인생의 확고한 터닝포인트가 되어주며 본격적인 서사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명당으로 밥벌이를 하는 생계형 떠돌이 지관이 되고 김좌근(백윤식), 김병기(김성균) 캐릭터와의 적대 관계도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영화의 홍일점이라 할 수 있는 초선(문채원) 캐릭터는 어떨까. 기생답게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말발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물론 러브라인도 빼놓을 수 없다. '권력 싸움'이라는 중심 주제에 방해 되지 않도록 아주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흥선(지성)과 서로 연모하는 듯한 뉘앙스를 흘려준다. 악한 자 앞에서는 웃음 흘리며 비위를 맞추고, 그렇게 빼돌린 정보로 선한 자를 돕는다. 입을 열어야 할 순간과 내 사람을 지키는 법을 분명히 안다. 그야말로 관객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캐릭터이다. 문채원이 완성한 캐릭터의 매력과 능력은 결코 남성 캐릭터들에 뒤처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더욱 절정에 치닫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역시, 이토록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죽음이다. 이로 인해 흥선의 서사는 완성된다. 초선의 죽음을 도화선으로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며 비로소 악명 높은 '흥선대원군'으로써 최종 레벨업을 완수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 지고지순하고 자애로운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면 언제 죽임을 당할까 노심초사 마음을 졸인다. 캐릭터가 더 착할수록, 순수할수록, 맑을수록 억울하게 죽임 당했을 때 이야기 속 등장인물 그리고 독자에게까지 미치는 충격은 크기 마련이다. 때문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의 풍요로운 서사를 위해 희생되는 것은 작가로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냉장고 속의 여자가 항상 '여자'인 것만은 아니다. 어린 소년일 수도, 늙은 노인일 수도,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인 경우 건장한 남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현상이 반복적으로, 높은 확률로 일어날 때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른다. (이 보편적인 차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를 '예외'라고 부른다.)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대다수 이야기들의 주인공은 아직도 남성들이며, 그 남성들이 성장하기 위해 여성 캐릭터가 하나의 재료로 쓰이는 것은 지적하기가 무안하리 만큼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사랑하는 이의 죽음'만큼 한 사람을 망가뜨리거나, 복수심에 불타게 하거나, 모든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게끔 만드는 확실한 사건은 찾기 어렵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왜 꼭 수많은 영화 속 젊고 총명한 여성 캐릭터들이 자신의 능력도, 꿈도, 미래도 펼치지 못한 채 다른 인물의 자양분으로서 역할을 마무리 해야만 할까. 왜 잔인하게 난도질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숫자가 웹사이트에 기록해 애도할 정도로, 사회현상 속 하나의 용어로 자리 잡을 정도로 많은 것일까.
느리지만 분명히 시대는 변하고 있다. 불편한 목소리는 예민함이 아닌 용감함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하여 머지않은 언젠가 주인공이 아닌 여성 캐릭터의 서사도 마음 놓고 응원할 수 있기를, 그들이 누군가의 곁다리가 아닌 인간 그 자체로써 노력하고, 성장하고, 마침내 뜨겁게 쟁취하는 하는 모습을 스크린에서 지켜볼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어나기를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