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순간이 지나가면 찾아오는 것
한 달, 100일, 200일, 혹은 일 년. 모두가 생각하는 '연애 초기'의 기준은 다를 것이다. 썸 타는 기간이 정확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듯 연애의 속도도 모든 사람마다, 커플마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과연 연애 초기라 불리는 시기를 정의할 수 있을까? 연애 초기는 언제 끝나는 것일까?
설렘을 빼놓고 어찌 연애의 시작을 논하랴.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마냥 좋아 심장이 쿵쾅될 것이다. 내가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세상에 다시없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는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무리 연락을 자주 하고 얼굴을 많이 봐도 부족하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질리지가 않을 것 같다. 가까스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사랑을 시작하게 된 그 순간, 세상 그 누구도 이들보다 행복할 수는 없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듯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야말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기만 한, 가슴 벅찬 연애 초반이다.
몇십 년간의 세월을 다르게 살아온,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만났다. 당연히 궁금한 것, 알고 싶은 것이 넘쳐난다. 밤새 이야기를 나눠도 끊이지 않는다. 가족 관계, 가장 친한 친구, 처음 받은 상장, 어릴 때 키웠던 강아지, 가보고 싶은 여행지, 나만의 콤플렉스, 좋아하는 책, 영화, 음식... 그야말로 모든 것이 대화의 주제이다. 이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보통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잠자리에 드는지, 운동은 무슨 요일 몇 시에 하는지, 자주 만나는 친구는 몇 명이나 되고 술자리는 얼마나 가지는지, 혹시 친한 이성친구는 없는지 등등 그 사람의 일상에 묻어들기 위해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시기이다.
연인들은 연애 초반 가장 많은 약속을 한다. 달콤하고도, 허무맹랑한 그런 맹세들. "영원히 너를 사랑해.", "우리 내년 봄에 결혼하자.", "다시는 너 같은 사람 못 만날 거야.", "절대 네가 싫어질 리 없어, 바보 같은 걱정 하지 마." 등등. 너무나 익숙한 멘트들 아닌가. 첫사랑이라면 모를까 어느 정도 연애를 해 본 이들이라면 마음속으로는 모두가 알 것이다. 그 순간의 감정에 몰입해, 분위기에 취해 사랑에 홀려 저자신도 모르게 술술 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물론 엄연히 말해 거짓말은 아니지만 결코 보장될 수 없으며 지켜지지 않았다 해서 원망할 수도 없기에 허공이 흝어지는 속삭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의 언약들이 연애 초반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설렘, 궁금함, 맹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애 초기의 달콤한 특징들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끝나버리고야 마는 연애 초반의 시기.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달콤함은 모두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연애가 진전됨에 한 단계 더 진화된 특성으로 레벨업하기 때문이다. 설렘은 안정감으로, 궁금함은 익숙함으로, 맹세는 진실됨으로 말이다.
연애 초기의 달콤함이 가지는 양면성이 있다. 바로 불안감이다. 아직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혹시 나 혼자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이 사람이 대체 나를 왜 좋아할까?'와 같이 사랑 자체에 대한 의혹부터, 연락이 되지 않을 때나 나 없는 술자리에 갔을 때 불쑥 찾아오는 '다른 이성과 있는 것은 아닐까?', '딴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와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의심, 마찬가지로 달콤한 맹세를 들었을 때도 마음이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다. '이 말을 몇 번째 하는 걸까?', '나를 속이려고 하는 건 아닐까?'와 같이 상대의 진심에 대한 불신을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마냥 좋기만 할 것 같지만 연애 초반에 더 다툼이 잦은 커플도 많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맞춰과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시각을 바꾸어 바라보면, 그 불안전성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연애 초기인 것이다.
불안전성은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소되기 마련이다. 먼저 부정적인 방향. 단순한 의심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 그러니까 실제로 상대의 실망스러운 면을 발견했을 경우 연애 초기는 이별로 마무리된다. 가슴 아픈 결말이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커플들이 이 벽을 넘지 못한다. 처음 그 사람을 보았을 때 내가 막연히 기대한 이미지와, 실제의 그 사람의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위 말하는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이 왔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대의 모습이 내 상상과 너무 다르다면, 결말은 새드엔딩일 수밖에 없다.
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불안전성이 해소가 된다면? 수많은 의심과 불신 끝에 확신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 이 사람은 절대 나를 두고 딴짓을 하지 않는구나. 믿어도 되겠구나. 이전의 그 나쁜 놈과는 다르구나.'라는 신뢰가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굳건한 믿음으로 자리 잡는 순간 말이다. 여기까지 다다른 커플들은 상대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을 것이고,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상처를 지녔는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모두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품에 안겨도 심장이 쿵쾅거리지 않고 밤새 수다를 떨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 오히려 축복해야 할 일이다. 둘의 사랑이 비로소 성숙한, '진짜 연애'의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풋풋한 연인이 어느새 같은 곳을 바라보는 성숙한 연인으로 거듭난다. 단지 흐르는 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는 연애 초기는 누구에게나 쉬운 단계이다. 진짜 사랑은 설렘이 사그러 들고 익숙함이 찾아왔을 때 시작된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것이다. 이 단계까지 오기 위해 당신과 연인은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끝없이 다투었으며, 무던히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니 연애 초기가 끝나간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가시 가득한 장미 밭길을 무사히 통과한 두 연인은 축복받아야 마땅할 뿐. 물론 삶과 사랑이 지속되는 한 쉬지 않고 고난은 찾아오겠지만, 하나하나 함께 극복해 나갈수록 사랑의 레벨도 높아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다 보면 분명, 눈 앞에 펼쳐진 진짜 장밋빛 미래를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맞이하는 벅찬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