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와 <청춘시대>의 어느 중간쯤- 셰어하우스를 꿈꾸다
약 5년 간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깨달은 것: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외로움을 많이 타고 사람을 좋아한다.
처음엔 마냥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을 가진다는 사실에 신났었다. 오로지 내 취향으로 가득한, 나만을 위한 집. 블루투스 스피커로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막춤을 춰도 되고 샤워하고 벌거벗은 채로 나와 마음껏 돌아다녀도 되는, 자유로 가득한 집.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내 5년 간의 원룸 생활은 결코 불행하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초대해 집을 자랑할 때면 "혼자 살아보니 이젠 누구랑 절대 같이 못 살겠어, 얼마나 편한지 몰라-" 식의 허세도 잔뜩 떨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이건 그저 핑계일지 모르겠고 일단 나 자체가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외로움에 굶주린 영혼이라는 것이다.
혼자 사는데서 기인한(아무리 고양이를 키울지라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남자를 만나고 친구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결국 데이트가 끝나면, 친구가 집에 돌아가고 나면 덩그러니 남는 것은 나 혼자였다. 그 적막이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숨 막히고 서글펐다. 아무리 가족과 연인과 친구가 있다 해도 결국 인간은 혼자이고 누구나 근본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니 외로울 틈이 없이 더 열심히, 바쁘게 살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하루하루의 삶을 쉴 새 없이 채찍질했을지 모르겠다. 저녁에 퇴근을 하면 교육원 수업을 듣고 테니스를 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약속을 만들었다. 평일부터 주말까지 모든 스케줄이 꽉 차 있어야 안심이 됐다. 어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저녁을 보내면 몸이 편한 건 잠시, 내 인생이 커다란 낭비 같이 느껴져 더없이 우울해지고 더더욱 외로워졌다. 그러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 혼자서는.
그래서 한동안 착각을 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싶은 거라고. 집에 오면 따스히 맞아주는 누군가가 있고, 저녁에 맥주 한 잔 하며 하루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늘어놓을 수 있는 그런 삶이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내 인연이 아닌 사람들에게 억지로 의미부여를 해 가며, 이 사람이 내 사람이야, 아 이다음 사람이 내 사람인가, 아니면 그다음인가, 끝없이 내 외로움에 종지부를 찍어 줄 한 사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 나의 외로움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분명 알면서도 말이다. 오히려 누군가를 만날 때 나는 더 외로워졌다. 더 많이 기대하고, 기대게 되니까. 내 기대를 완벽히 충족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돌아오는 건 늘 더 큰 실망과 공허함 뿐이었다.
대학교 4년 간 기숙사 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룸메와 불화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운이 좋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나는 그럭저럭 남들과 무던하게 잘 어울리는 성향인 것이다. 침대, 책상, 옷장으로 꽉 찬 손바닥만 한 기숙사 방에 살면서도 불편하다는 생각,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그보다는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룸메가 방에 있었으면, 주말에 집에 가지 않고 나랑 같이 있어 주었으면, 그런 생각들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드는 프렌즈고, 한드는 청춘시대이다. 시대도 배경도 너무 다른 두 드라마의 유일한 공통점은 한 공간에서 같이 사는 친구들의 일상을 다룬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들 사이에 사랑과 우정과 꿈과 희망 그리고 청춘이 있고, 우울함과 분노와 공허함과 외로움은 등장하기 무섭게 스리슬쩍 자취를 감춘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반이 된다- 딱 그런 뻔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평생 그 뻔한 이야기가 내 삶이 되었으면, 막연히 바라 왔다. 물론 원룸을 찾으며 셰어하우스를 찾아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 이런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또 생겨날까. 가슴이 부풀었지만 반려동물의 벽이 너무 높았다. 대부분의 셰어하우스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고, 간혹 허락하는 곳도 있었지만 좁은 방 안에서만 가둬놓고 키워야 하거나 상주하는 관리인이 없다 보니 집이 엉망진창이었다. 많은 고민을 했었지만 결국, 호동이와 함께하는 동안은 셰어하우스를 포기해야겠다는 게 항상 결론이었다. 호동이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며 희생해야 할 수많은 요소들 중에 이것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로망을 충족시키기에 기존의 셰어하우스들은 집이라기보단 기숙사에 가까워 보였다. 단지 저렴한 월세를 위해 공간을 비좁게 나눠 쓰고,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도 모르는 채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만 갇혀 보내는 장소. 최대한 조용히, 피해 가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서로의 개인 공간을 존중해 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그런 장소 말이다.
그렇게 당연히 혼자 사는 삶 외에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해 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은 늘어나기만 한다. 집에 피아노도 있었으면 좋겠고, 요즘 유행이라는 건조기도 갖고 싶고, ㄱ자의 넓은 주방도 갖고 싶고, 바닥에 상 차려놓고 밥 먹는 건 지긋지긋하고, 이제 곧 열여덟인 호동이가 떠나기 전에 쾌적하고 넓은 좋은 집에서 마음껏 우다다를 하게 해주고 싶고... 그래 그 모든 것의 해결책은 결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미 내가 어릴 적 결혼할 거라 예상했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막연한 미래에 배팅을 하기엔 현재의 삶이 너무 아까운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나의 모든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답을 찾아냈다:
나만의 셰어하우스를 만드는 것.
답을 찾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렸지, 막상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니 망설일 게 없었다. 일단 셰어하우스와 공용 주거공간에 대한 시중의 모든 책을 사 읽었다. 출근길에 하루 한 권씩. 내가 좋아하는 일, 내 삶을 바꾸기 위해 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어려울 것도 막히는 것도 없었다. 점심시간, 퇴근 후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집을 보러 다니고 계약을 하고 온갖 가구와 인테리어 용품을 사 들이고-, 불과 한 달 여 만에 모든 것이 급속도로 진행됐고 오직 나 홀로 모든 일을 벌이고 책임진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덜컥 겁이 나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순간은 정말 잠깐이었다. 내 손으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차근차근 완성해 나가는 그 모든 과정들이 내 삶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내가 살고 싶던 꿈의 장소, 안락하고 정겨운 진짜 집은 완성되었으니까. 햇살이 들어오는 넓은 창과 그 아래 놓인 흰 피아노, 커다란 양문 냉장고와 만능 에어 프라이어도 좋지만 결국 셰어하우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사용하고 채워 줄, 좋은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직접 한 번 살아보면 환상이 깨질 걸? 드라마에서 보던 거랑 완전 다를 거야, " 부정적인 이야기로 겁을 주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내 느낌을 더 믿는다. 그들이 살 곳이 아니라 내가 살 곳, 내가 어울릴 사람들이니까. 이 넓고 넓은 세상에 나처럼 혼자 사는 삶이 지겹고, 고양이를 좋아하고, 집 같은 집에서 선한 사람들과 살아가고 싶은 누군가가 최소한, 네다섯 명은 있지 않겠는가.
좋은 집에는 좋은 사람이 깃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누구보다 선한 당신이 내 삶의 한켠에 들어서 주기를,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