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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 Nov 11. 2018

서울 원룸 구하기의 달인이 되기까지

4년간 거쳐온 자취방 톺아보기

        2014년 첫 취업과 함께 상경한 서울, 그때부터 2018년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평균 일 년에 한 곳씩 무려 네 군데의 자취방을 거쳐 왔다. 집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직장도 여러 번 바뀌었고 만나는 사람도, 가장 자주 어울리는 친구도 무던히 바뀌어 왔다.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면 좁은 집에서든 넓은 집에서든 기꺼이 내 머리맡을 지켜주는 든든한 룸메, 호동이뿐. 그래도 처음 살던 집과 마지막 집을 비교해 보면 흘러간 4년이라는 시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구나 싶다. 나이 든 만큼 늘어난 월급 덕도 있겠지만 4년 전보다 확실히 집을 보는 눈도, 독립된 삶을 사는 연륜도 제법 쌓였기 덕분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마지막 자취방을 떠나보내며,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서울 월세방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려 한다. 월세는 터무니없이 높고 방은 어처구니없이 좁다는 악명 높은 서울 자취방들 중에서도,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이면 그래도 제법 사람같이 살만한 괜찮은 공간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1. 돈암동 허름한 빌라 - 월세 500/30

2층 / 실평수 5-6평 / 세탁기 공용(지하)


집과 기숙사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처음으로 생긴 자취방..! 낡고 허름하지만 오직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에 마냥 들떠있었다. 할아버지가 주인인 오래된 빌라에 어둡고 찝찝한 지하에 놓인 단 한 개의 세탁기를 입주자들이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지만 나름 열심히 꾸미고 친구들도 초대하며 알차게 살았더랬다. 좁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로망이기도 했던 벙커 침대를 중고로 구매했다. 마침 판매자가 같은 동네 5분 거리에 있어서 네 명이서 들러붙어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며 커다란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를 날랐었다. 당시 만나던 어린 친구는 커다란 곰인형을 집들이 선물로 주고 싶어 했는데, 용돈이 떨어져 내가 먼저 주문을 하면 나중에 송금을 해주겠다고 했다. 지금 이렇게 말하니 참 없어 보이고 우습지만 그때는 나 역시 가난하고 어렸기 때문에 그 마음이 고맙고 예쁘기만 했다. 여하튼 대체로 그런 감성의 집이었다. 작고 구질구질하고 폼 안 나지만, 그래서 더 정감 가고 마음 쓰이는 곳. 사회 초년생의 첫 번째 집다운 집이었을지 모르겠다.


벙커 침대에 흰 이불, 커다란 곰돌이. 자취방의 로망을 이루다.


침대 밑은 서랍장과 낮은 테이블 방석 등을 두어 아지트로 꾸몄다. 당시에는 영화사에 다닐 때였으니까, 요즘 말로 힙한 느낌 가득한 예술 영화 엽서들로 한쪽 벽면을 꾸몄다. 옷장이 들어오기에는 공간이 너무 협소해 옷장 행거를 설치했다. 그래도 또 꼴에 지저분한 느낌은 싫어서(고양이 털로부터 조금이라도 숨고 싶기도 했고) 빈티지한 느낌의 갈색-초록색 체크무늬 커튼을 두 장 사다가 휘어지는 레일에 달았다. 상상 속에서는 근사했는데 아랫단은 왠지 삐뚤었고 딱히 깔끔한 느낌도 아니었다. 정말 손바닥만 한 싱크대였지만 모든 자취방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요리를 했다. 한 푼이 아쉬워 매일 도시락을 싸다녔던 때였으니까. 그 좁고 낡은 집도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서 온갖 친구들과 선후배를 초대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의 쏟아지는 애정에도 불구하고 작고 큰 사건들은 끊이질 않았다. 집안 공간이 부족해 사람들은 빌라 복도에 건조대를 내놓곤 했는데, 누군가 빨래를 훔쳐 간 것이다. 그것도 새로 사서 아직 입어보지도 못한 원피스와, 질 좋은 옷 몇 개만 쏙 골라서. 얼마나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모른다. 빌라 현관에 잠금장치도 없고 CCTV도 없으니 사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훔쳐 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혹시 누가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니 종이에 써서 붙여놔 보라는 솔루션을 제시했다. 순진했던 나는 A4용지에 큰 글씨로 또박또박, 부디 가져간 옷을 돌려달라고 친절한 경고문을 써 붙였다. 재미있는 건 다음날 보니 종이 한 장이 더 붙어 있었다. 자기 옷도 가져갔으니 꼭 돌려달라는 추가 글이었다. 옷을 도둑맞은 건 나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사라진 옷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귀여운 사건이지, 진짜 일은 얼마 후 찾아온 첫겨울에 터졌다. 정말 제대로 터졌다. 보일러가. 한밤중 귀가 따가울 정도로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 소리에 눈을 떴다. 잠결에 벙커 침대에 누워 눈만 껌뻑이며, 아무리 방음이 안돼도 이렇게 실감 나게 빗소리가 들릴 수가 있나, 홍수라도 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손을 뻗어 머리맡 벽을 만졌는데 물줄기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식겁한 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가 불을 켰다. 그리고 눈앞에 들어온 것은.. 허허... 천장 가운데 형광등 쪽에서 정말.. 목욕탕에 가면 냉탕에서 떨어지는 폭포수 같은 물줄기 있지 않은가? 딱 그런 수준의 물줄기가 바닥을 뚫을 기세로 떨어지고 있었다. 벙커 침대라 몰랐는데 카펫, 커튼, 책상 등 좁은 방 안의 모든 것들은 이미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침대 위로 피신한 호동이는 대체 이게 무슨 난리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아니 나도 몰라, 호동아... 정말 물을 퍼내야 하는 수준이었고 내가 가진 모든 접시와 그릇을 대동해야 했다. 너무 물이 빨리 차서 가만히 옆에 서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옆집도, 그 옆집도 난리가 나 다들 웅성웅성한 상태였다. 이미 집주인한테는 연락을 했고 기다리는 것 외에 방도가 없다고 했다. 하... 다행히 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고, 자초지종을 들으니 윗집이 빈방인데 보일러 관리가 안 되다 보니 얼어서 터져버렸다고 한다. 고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 사람 사는 곳인데 그럴 수도 있지. 그냥 집주인한테 소박한 빨래비만 받고 끝냈다. 도배도 다시 안 했다. 겨울이라 그랬겠지만 막상 물이 다 빠지고 나니 또 금세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트콤 같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인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그 집에 살았다. 그 이후로도 소소하게 1-2번 정도 더 물이 샜던 것 같다. 꾹꾹 참고 있었지만 여름이 다가오니 더 이상 참을 재간이 없었다.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그 집에서 살다가는 골병이든 화병이든 내가 먼저 죽어나겠다는 확신이 든 나는 한껏 용기를 내어, 계약을 파기하고 나가겠다고 주장했고,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 두려고 1층의 다른 방도 보여주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빌라에 붙어 있고 싶지가 않았다. 집에 문제가 있어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사비였나 복비였나까지 야무지게 지원해달라고 했고(법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인터넷에 백번 천 번 찾아본 후 달달 외워서) 내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뭐 소박한 보상금을 얻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의 파란만장했던 첫 번째 자취방을 떠나게 되었다.  


2. 청파동 언덕 빌라 - 월세 700/35 / 관리비 2.5(수도세, 건물 청소)
1층 / 실평수 10평 / 어마어마한 언덕 위

물난리+곰팡이의 콤보 습격으로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구한 두 번째 집. 일주일도 안되어 구했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마음이 들었다. 일단 전 집과 비교도 안되게 넓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원룸 생활을 하며 항상 죄책감과 아쉬움을 안고 가야 했다. 여전히 원룸이긴 하지만 이전보다 두 배는 되는 길쭉한 형태의 방이 마음에 들었다. 또 내 방 안에 내 세탁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감지덕지였는지... 그 찝찝하고 음침한 지하 세탁기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모르겠다. 어려서, 몰라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1층이라 불안하긴 했지만 재밌게도 창문 밖에 수납공간이 있었다. 사실 가장 바깥 창이 그냥 창살로만 되어 있어서 먼지가 그대로 다 들어오기 때문에(사람 팔도 들어갈 듯) 제대로 된 무언가를 수납하기는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이런 공간이 있는 덕에 창문을 열어놓아도 안심이 되었다. 실제로 1년 가까이 사는 동안 창밖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불쾌한 일을 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좌 세탁기가 있는 보일러실, 우 창문의 수납공간


옷장 행거와 커튼 세트는 그대로 가져왔다. 공간이 많이 넓어졌기 때문에 책상과 의자도 생기고 1층 침대도 생겼다. 사진 속에 보이는 기다란 하얀 협탁은 원래 집에 있었던 옵션인데, 가로로 놓고 친구들 여럿이 둘러앉아 술 마시고 놀기 딱 좋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예전부터 참 사람을 좋아했었나 보다. 항상 내 집이 복작복작했으면, 사람의 온기로 가득했으면 했다. 그래서 더 좋은 집, 예쁜 집을 항상 갈망했을지 모르겠다. 집을 보여준 부동산 사장님은 전 세입자도 결혼을 해서 나가고, 그전 세입자도 결혼을 해서 나갔다고 했다. 나도 2년 후에는 이 자취방을 마지막으로 결혼을 해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에 부풀었던 것 같다.



이 집은 저 세로 꽃무늬의 포인트 벽지가 참 끔찍했다. 그래도 뭐 에어컨도 있었고, 나름 깔끔했기 때문에 이전 빌라에 비해서 크게 만족하고 살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엄청난... 언덕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청파동 동네를 와봤다면 알 것이다. 서울역 뒤편(택시 기사님들은 서부역이라고 부르더라)의 골목으로 들어가는 집이었는데.. 엄청나게 가파른 언덕을 10분은 끈질기게 올라야 집이 나타난다. 지금은 못 살겠지만, 그땐 어렸고 뭐 이 정도 언덕쯤이야 강제 운동되고 좋지 않겠어? 하는 마음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더랬다. 집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개여서 조금 완만하지만 돌아가는 언덕 길도 있고, 가파르고 좁은 계단 지름길도 있고, 매번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한겨울 눈이 쌓여 꽝꽝 얼었을 때도 위태로운 하이힐을 신고 거길 오르내렸으니, 나도 참 대단했었다. 택시 기사님들도 우리 집을 싫어해서 내가 "저 골목으로 들어가 주세요"라고 하는 순간부터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돌아가는 길이 없다고 얼마나 구시렁댔는지 모르겠다. 한밤중에 술 마시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막무가내로 자기는 못 올라간다고 나를 그 앞에 떨궈주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얼마나 서러웠는지.


그래도 나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까지 어떻게든 잘 기어들어갔지만, 모두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가끔 언덕과 계단 한복판에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아저씨나 총각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 또래로 보이는 어떤 청년은 빳빳한 정장을 입고, 목 끝까지 넥타이를 꽉 조인 채 계단 중턱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스푸름한 새벽에 그를 발견한 나는 계단 산행으로 인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래 맨 정신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너는 오죽했겠냐, 이까지 온 게 장하다 장해- 일종의 동지애를 느끼며 잠시 내려다보았다. 신입사원일 것이 분명한 그가 원치 않는 회식 자리에서 얼마나 시달렸을지, 살만한 집을 찾기 위해 나처럼 이 언덕 끄트머리까지 쫓겨 와야만 했을지, 그래서 집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길바닥에서 잠이 들어야만 했는지, 그가 겪고 있을 청춘의 설움과 빈곤함에 짧은 묵념을 보냈다.


그래도 그 언덕이 가져다주는 낭만이 있었다. 우리 집 앞 돌계단에 앉으면 남산타워를 비롯한 서울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 보였기 때문이다. 그 계단에 앉아 맥주 한 캔, 두 캔을 비웠고 다정한 대화가 오갔고 생애 오래오래 기억될 설레는 순간들이 탄생했다. 청파동 골목골목에 내 청춘의 조각들이 그렇게 스며들었다.  

이 집에서는 하루도 어긋나지 않게 정확히 1년을 살았다.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슬슬 언덕길에 지치고 '더 좋은 집에 가고 싶다'라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와 다음 집을 알아보다 보니 이사 날짜가 절묘하게 그렇게 잡혔더라. 소소한 것에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는 나는 그것조차 운명이라 생각했다. 더 좋은 곳, 더 나은 곳을 향해 내 인생이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할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3. 상도동 투룸 벽돌집 - 월세 1000/35
2층 / 실평수 10-11평 / 다세대 주택

그다음 집은 바로 셀프 인테리어 끝판왕 집이었다. 널찍한 10평 공간에 살아본 나는 이제 분리된 공간을 원했다. 같은 평수여도 방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또 행거형 옷장도 지긋지긋했다. 나는 문짝 달린 진짜 옷장을 원한다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수준의 깔끔하고 예쁜 방은 어마어마하게 비싸거나, 어마어마하게 좁았다. 그리고 대다수 신축 건물들은 애완동물 허용이 되지 않았다. 고양이를 키워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애초부터 내가 포기해야 하는 집들이 반절은 넘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찾고 찾으면 내가 찾고자 하는 그 집이 나오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다만 남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하고, 조금 더 재빨라야 한다. 자취방을 구할 때 부동산보다는 피터팬 카페를  애용하는 편인데, 꼼꼼히 게시글 검색만 할 뿐 아니라 내가 원하는 키워드를 설정해 해당 글이 올라오면 핸드폰으로 실시간 알람을 받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좋은 집은 올라오는 즉시, 정말 거의 실시간이라도 해도 될 만큼 빨리 나가기 때문이다. 아래 글을 읽어본다면 집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키워드를 걸어놓고 올라오자마자 이거다! 싶어 찾아간 집이 이 집이었다. 이 집 세입자도 결혼을 해서 나간다고 하는데 회사에서 글을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셀프 인테리어를 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낡아도 괜찮으니 주인이 좋고 공간이 넓고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그리고 당연히- 평지에 있는 집을 찾고 있었다. 이 집은 벽돌로 된 다세대 주택 건물로 주인집 노부부가 가장 위층인 3층에 살고 있었고, 2층에 두 가구 1층에 두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당도 있었고 이전 세입자가 피터팬에 올린 글을 보니 강아지를 키워도 아무 문제없으며, 집 안도 세입자가 벽에 설치한 조립식 선반으로 가득했다. 이미 나는 사진과 설명만으로 그 집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내가 원하는 집이라는 강력한 느낌이 왔다. 미리 등기부 등본까지 떼보고 별문제 없으면 내가 계약을 하고 싶다고 연락했으나 이미 나보다 먼저 보러 오기로 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애가 타기 시작했다. 퇴근하자마자 뛰쳐나갔지만 결국에는 내가 그 사람보다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고작 10분 정도?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이미 그 사람이 집을 보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에이 설마 보자마자 계약을 하겠어, 초조하게 집 앞에서 기다리는데 한참 동안 나오지를 않는다. 그러다 마침내 세입자와 둘이 나왔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주인집인 3층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아 이런... 설마 했는데 진짜 그 사람이 바로 계약을 한다는 것이다.


같이 집을 보러 와준 형부와 함께 있었는데, 나는 이때 진짜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터질 지경이었다. 난감해진 형부는 이 근처에 또 이런 집이 있지 않겠냐고, 나를 달래며 집 근처 부동산으로 데려갔고 그렇게 한두 곳 근처의 주택을 더 보고 있는데.. 부동산에서 같은 가격대에 보여주는 집들의 수준이 너무 끔찍해서 더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조금 전 그 집의 세입자였는데, 헛걸음하게 만들어서 너무 죄송하다며 혹시나 해서 주인한테 다른 방이 나오지는 않을지 여쭤봤는데 아직 부동산에 내놓지 않은 방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세입자가 내놓은 방은 1층이었고, 그 방은 2층이었다. 심지어 더 좋은 조건인 것이다. 당장 나는 달려가서 그 방을 보았고 1층보다 조금 더 좁긴 했지만 셀프 인테리어를 하면 충분히 좋아질 것이라는 각이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의 상황이 아닌가. 형부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나 역시 바로 3층으로 올라가 계약을 완료했다.


셀프 인테리어 전/후 안방의 모습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간신히, 마음에 드는 세 번째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주인과 같은 건물에 사는 것은 장단점이 분명하다. 우선 택배도 대신 받아 주시고, 집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대문도 열어 주시고, 이틀 넘게 택배가 제자리에 있으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며 꼬박꼬박 안부전화까지 해주셨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여성으로서 어떤 울타리 안에 속해 있다는 든든함을 느낌과 동시에 가끔 그 관심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대체로는 좋은 점이 더 많았지만 말이다. 셀프 인테리어를 하겠다고 사전에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내가 바닥을 깔고 페인트칠을 할 정도로 대대적으로 뜯어고칠 거라 생각은 하지 못하셨는지 초반에 소소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 음료를 들고 찾아가 전문적으로 다 알아보고 하는 것이니(그 당시 만나던 친구가 만능이었다) 집 상할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미리 자세히 설명을 못 드려 죄송하다 양해를 구하니 원래 좋으신 분들이었던지라 허허 기왕 한 건데 잘해야지 뭐 어떡해, 기분 좋게 허락을 해 주셨다. 그 이후로도 사는 내내 양파니 고구마니 부모님이 보내주는 선물들을 부지런히 3층으로 갖다 바쳤고 집을 나갈 때까지 집주인분들과 훈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나오면서 좋아진 집 상태로 인해 월세도 훌쩍 올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계약보다 빨리 나오게 되며 내가 직접 세입자를 구했는데, 글을 올리자마자 문의가 폭주했고 경매하듯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모두가 계약 의사를 밝혔다. 덕분에 인테리어 비용과 가구, 에어컨 등 권리금까지 받고 집을 빨리 넘길 수 있었으니 월세 셀프 인테리어는 결코 부질없는 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셀프 인테리어의 과정이 어땠는지는 이 게시물 하나로 대략 설명이 될 것이다. 한 달의 시간, 약 백만 원가량의 돈이 들었고 노력과 수고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들을 포함한다면 차라리 애초에 더 비싼 월세방을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낡은 집을 한번 뜯어고쳐본 경험 덕분에, 조금 더 집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겼고 가구 배치나 인테리어에 대한 감각도 깊어졌다. 내 손이 안 닿은 곳이 하나도 없는 만큼 애착이 가고 사랑스러운 집이기도 했다. 평수는 이전 집과 비슷했지만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문이 달린 방이 2개였고, 화장실이 있고, 부엌이 있었던 것이다. 보통 이럴 경우 큰 방을 안방으로 쓰고 작은방을 옷방 창고같이 많이 쓰는데, 나는 방 하나를 옷장이나 다용도실같이 쓰는 것이 싫어서 테이블과 책장을 넣어 서재로 만들었다. 사실 입구 방이라 춥기도 하고, 에어컨이 여기까지 닿지 않아 덥기도 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많이 활용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은은한 조명을 켜놓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 한잔 기울이는 그 감성과 재미는 캬,,,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사진 속의 동그란 러그가 내 첫 번째 집의 홍수 난 때 흠뻑 젖었던 바로 그 러그이다. 나름 역사가 깊은 소품이지만 너무 지저분해져서 이 집을 마지막으로 처분해버렸다.



그전까지의 집들이 고만고만한 월세방이었다면 이 집으로 인해 내 자취생활의 수준이 한껏 높아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 1000/35, 투룸이 있다고? 반지하나 옥탑방도 아니라고? 내가 사진을 보여주면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집주인 분들이 큰 욕심이 없어서 월세가 방 크기에 비해 저렴하기도 했지만, 셀프 인테리어의 덕이 엄청났던 것이다. 이 집의 가장 큰 단점은 화장실에 세면대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한때 집을 볼 때 세면대 없는 집은 무조건 제외를 하기도 했었는데, 막상 다른 조건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포기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었다.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인지 입주 날부터 곧바로 적응해 불편한 것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오래된 벽돌집 건물이었기 때문에 안을 어설프게 뜯어고쳐도 특유의 낡은 느낌- 삐걱삐걱, 들쑥날쑥, 그런 느낌은 아무리 해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또 나름대로 오래된 벽돌집과 집 앞 가로등이 주는 낭만이 있었다. 그 집은 철제 대문이 있어서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와 내 방이 있는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는데, 계단이 대문 위로 노출되어 있어 2층에서 현관 너머가 훤히 보였다. 그 말은 즉슨 현관 밖에서도 계단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대화가 오갈 수 있다는 얘기다. 택배나 열쇠 같은 것도 계단 위로 곧잘 주고받곤 했었다. 친구가 놀러 올 때면 나는 미리 계단에 나와 골목 저 끝에 보이는 그림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갈 때도 골목 너머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오래오래 배웅했다. 그 집 대문과 가로등의 조합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익히 보던 그런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바래다줘서 고마워, 여기가 우리 집이야.. 아쉬움에 젖어 가로등 아래 오래오래 눈을 마주치다, 삐걱 들리는 문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후다닥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그런 장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늦은 밤 집 골목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누군가를 항상 기다리고 기대했다. 처연하게 비라도 맞으며, 네가 올 때까지 몇 시간이라도 기다렸어,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어서... 그런 아날로그 감성을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 준다면 나는 꼭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고, 그렇게 혼자 몇 번이고 되새기며 얼굴을 붉혔다.    

이곳에서 나름 만족스럽게 지내며 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실컷 자랑을 했지만, 일 년 넘게 살다 보니 슬슬 이번에는 신축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주는 깔끔함과 안락함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분명히 알았던 것 같다. 이번 집 역시 내가 결혼하기 전 마지막 자취방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4. 연희동 공간 분리 빌라 - 전세 1억 2천 / 관리비 5(인터넷, TV, 주차, 건물 청소)
2층 / 실평수 10평 / 버팀목 전세자금 대출

일단 월세로 나가는 돈이 너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 짬이 생긴 만큼 대출이 그렇게 위험하고 무서운 게 아니며 전세 대출을 끼면 훨씬 나은 조건의 집에서 더 적은 지출로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억 내외의 서울 전셋집을 찾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부동산 어플, 피터팬 카페를 들여다보다 퇴근하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집을 보러 다니는 고된 일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보던 중 생각보다 빨리, 연희동의 이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출근 시간이 십 분에서 한 시간으로 늘어난다는 점 때문에 사방에서는 극구 말렸지만 나는 꿈쩍도 않고 계약을 밀어붙였다. 사실 출퇴근 30분 내외 거리의 집들을 알아보고 있긴 했지만 지도 검색을 해 보니 한 시간이어도 환승이 필요 없어서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집이 너무 마음에 들어 계속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집을 많이 보다 보면 그런 감이 생긴다. 실제 내가 생각한 조건과 같든 다르든, 아, 이 집에서 내가 이렇게 꾸미고, 가구를 이렇게 놓고, 호동이는 여기를 좋아하겠다, 이걸 해야지- 그런 것들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집을 만나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되면 세면대가 있든 없든 회사와 거리가 멀든 가깝든 무조건 가계약이라도 거는 것이 답이다. 그렇게 해서 후회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런 좋은 집은 누구에게든 구미가 당기는 집이기 때문에 하루만 더 생각해봐야지, 하는 순간 날아가 버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변에서는 괜찮다고 부추기는데 내가 확 당기지 않는다면 재고할 필요도 없다. 결국 집은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괜찮고 감당할 수 있다면, 내가 보는 장점이 단점보다 더 크다면 그만인 것이다. 모두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월세 말고 전세로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사를 하게 되었다. 신축 빌라에 내가 두 번째 세입자였던지라 건물 자체가 깨끗했고 1층에 현관 비밀번호도 있었다. 아무리 쓸고 닦고 예쁘게 꾸며 놓아도 전 집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쾌적함과 세련됨이라 해야 할까, 솔직히 연희동이라는 동네가 가진 메리트도 무시 못 하게 컸다. 연남동과 더불어 요즘 부쩍 뜨고 있는 연희동. 말만 들어도 뭔가 부내나고 힙한 동네일 것 같은 그런 느낌. "저 연희동 살아요."라는 말 뒤편에 숨겨진 나의 부질없는 허세. 사실 그 메인 스트리트와 내가 사는 주택가는 그리 가깝지도 않다. 같은 연희동이라지만 마을버스를 타고 2-3 정거장은 가야 하는 거리다. 집이 있는 곳은 주택들밖에 없는 한적인 외곽 느낌이지만, 동네가 주는 조용한 안정감이 좋았고 바로 뒤편에 홍제천이 있는 것도 좋았다. 이로 인해 내 삶의 질이 또 한 번 올라간 것 같았으니까. 홍제천에서 자전거를 타며 이게 사는 거지,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으나 왔다 갔다 하는 길의 오르막이 너무 가파랐던 관계로 고작 두세 번 나가본 게 다였다.



개인적으로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똑같은 틀에 똑같은 옵션을 가진 오피스텔형 원룸을 좋아하지 않는다. 깔끔하고 안전하다는 장점은 분명하지만 그냥 너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조금이라도 특이한 점을 가진 집을 찾아 헤매는데 이 집은 그런 나의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방문은 없었지만 부엌과 작은방이 공간적으로 분명히 분리가 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10평 남짓의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 부엌으로 통하는 짧은 복도가 있어서 색다르다. 부엌 끝에는 다용도실도 있어 안 쓰는 물건들을 박아둘 수도 있다. 현관에는 커다란 빌트인 신발장이 있어서 드디어 원 없이 내 신발과 각종 짐들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낡은 집과 새 집의 가장 큰 차이는 화장실이 아닐까 한다. 누렇게 빛바래고 틈새가 새까만 오래된 욕실은,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를 해도 속 시원하지가 않다. 항상 어딘가 찝찝하고 균이 득실득실할 것 만 같다. 반면 신축 건물의 화장실은.. 어찌나 깨끗하고 반짝반짝 빛나는지 그 안에서 밥을 먹어도 만족스러울 지경이다. 물론 창문이 없는 탓에 곰팡이가 하루 단위로 무섭게 번지지만 또 닦으면 닦이는 대로 다시 말간 모습을 드러내니 청소하는 보람도 쏠쏠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룸 화장실이 주는 단점은 욕조가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 욕심이 끝이 없어서 그런지, 항상 아쉬운 점은 언제 어디서든 슬쩍 고개를 들기 마련인가 보다.


상도동 집 화장실 vs 연희동 집 화장실


사실 연희동 집은 내가 구할 수 있는 원룸의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위치도 시설도 인테리어도 더없이 만족스럽고, 내 이전 집들을 알고 있는 지인들도 와서 보고는 많이 출세했다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니까. 항상 딸이 시원찮은 집에서 고생한다고 걱정 많던 부모님도 이 집만큼은 안심이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일 년이라는 시간이 서서히 다가와서일까, 뭔가 이 집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마냥 더 크고 비싼, 좋은 집으로 옮겨가고 싶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좋은 집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무언가 부족한 이 느낌이 대체 뭐 때문인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지 그렇게 새로운 고민은 시작되었다.  




끊임없이 더 좋은 집을 찾아 헤매고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내가 사는 곳에 정성을 들일 때, 참 많이 들었던 말은 "네 집도 아닌데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였다. 그래 어차피 월세이고, 기껏해야 전세인데. 네 돈 들여 고치고 꾸며봤자 집주인만 이득 아니냐, 시간과 돈이 아깝다, 그냥 최대한 절약해서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마음껏 해라. 그런 말들을 참 많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오지랖이다. 내가 월세로 살든 전세로 살든, 계약한 기간 동안 그 장소는 법적으로 내 집이 맞다. 남의 집이 아닌 온전한 내 공간인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한 달을 살든 일 년을 살든 아니면 십 년을 살든, 내가 사는 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집이 좋아짐으로 해서 얻는 혜택은 바로 그 곳에 사는 나에게 당장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집주인에게도 이득이 가는 부분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내가 퇴근하고 돌아가 쉬는 곳, 주말에 여유를 부리며 뒹굴뒹굴하는 곳,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 곳은 이 집이다. 그 혜택을 보는 것은 집주인이 아닌 나 자신이다. 언제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막연한 미래 말고 당장 닥친 현재에 내가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내 집인데, 어째서 돈과 정성을 쏟는 것이 의미 없고 어리석은 짓일까?

우습게도 그런 나 역시 막연히, 언제 올지도 모르는 결혼을 무작정 기다리며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미루고 또 미뤘다. 나중에 큰 집에 가면 이것도 사야지, 저것도 사야지, 지금은 잠깐 거쳐 가는 집이니까 여기까지만 꾸미고 더 이상은 안 해야지, 나중에 내 집이 생기면, 그때 다 할 거야. 그렇게 자취방을 전전하고 나이가 들어가며 서서히 깨달았다. 아, 어쩌면 그때는 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혹은 아주 나중에 올 수도 있겠구나. 전혀 약속되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며 현재의 행복을 마냥 보류시키는 것이, 결코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넓은 집에 좋은 가구를 두고 살고 싶어 결혼을 서두르는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나름대로 즐겁고 충분히 행복했던, 가난하고 어렸던 원룸 시절을 졸업하고 또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더 나은 나의 모습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나의 청춘을 함께 해준 모든 자취방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고마웠어,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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