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리의 진급 기념 회고록
정신 차려보니 어느덧 대리가 되었다. 풋내기 타이틀을 벗는 게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실은 벌써부터 스스로를 신입이라 칭할 수 있었을 때가 그립다, 무진장.
졸업장의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정장보다는 후드티가 어울리는 따끈따끈한 신입사원들에게 완벽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입사원의 미덕은 열정과 겸손함만으로 충분할 뿐.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세 가지 인사말만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면 적어도 미움받을 일은 없다. 처음이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고, 실수도 용납이 된다. 물론 눈물이 찔끔 날만큼 서럽게 혼날 때도 있지만 윗사람도 분명 알고 있다. 신입 땐 다 그럴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친다는 걸. 그러니 어렸을 땐 어떤 일이 터져도 눈물 꾹 참고 씩씩하게 말하자. "제가 잘 몰라서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면 세상 모든 상사들은 혀를 쯧쯧 차면서도 결국은 이렇게들 말한다. "에휴, 신입인데 뭐 어떡하겠어.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세상의 모든 신입들은 무럭무럭 자라 간다. 어떤 일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언제 무엇을 시작하고 마무리 지어야 할지, 누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부딪히고 깨져 가며 이래저래 다듬어져 간다. 그렇게 각양각색 모난 돌들은 결국 둥글둥글, 능글맞기 짝이 없는 사회인으로 하나둘씩 레벨업을 하는 것이다.
반면 회사에서 짬이 높아질수록 '모른다'는 티를 내는 건 금기시된다. 아무리 직급이 높아도 사람인데, 어? 모를 수도 있고 까먹을 수도 있지. 하지만 생각해 보라. "난 이건 잘 모르는데.. 김대리가 한번 알아봐." 라며 늘 일을 떠넘기는 부장님이 있다면..? 앞에서는 굽신굽신 할지라도 뒤에서 '대체 저 놈은 그래서 하는 일이 뭐야? 아는 것 하나 없고.' 라며 숨 쉬듯 욕 얻어먹을 것이 뻔하다. 연차에 따라 올라가는 것은 연봉과 직급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기대치도 함께 올라간다. 만약 그에 걸맞은 연륜이 함께 쌓이지 못했다면, 당신만 모를 뿐 이미 팀원들 사이에서 무식과 무능력의 아이콘으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신입일 때는 당연히 주변의 기대치가 낮다. 그 말은 즉슨, 조금만 잘해도 크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처음이니까 뭐, 한 5 정도 해오겠지? 생각하며 일을 던져줬는데 어라, 얘가 8을 해왔네? 이번에 들어온 녀석이 아주 똘똘하고 쓸만하다고 소문나는 건 순식간이다. 어차피 신입 때는 사방에서 이래라저래라 고나리질 하고 가이드라인 쳐가며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난리들이다. 왜냐, 얘가 빨리 일을 배워야 내 일을 던져줄 수 있으니까. 얘가 제대로 못 받아먹고 퇴사하면 또 사람 뽑고 인수인계하느라 골치 아프니까. 그러니 두 눈 똑바로 뜨고 던져 주는 거 잘 보고 듣고 있다가, 하라는 대로 하나씩 야무지게 주워 먹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해도 아이고 잘 주워 먹었다 예뻐 죽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마치 어린아이 대하는 것처럼. 아장아장 몇 발자국만 걸어도, '어마'라고 어설프게 흉내만 내도 우리 아가 천재 아니냐며 뜨거운 박수 함성을 받는 시기- 그 유아기의 찬란한 영광을 다시 접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신입사원 때이다.
반면 중학생, 고등학생이 제 아무리 긴 다리로 뚜벅뚜벅 잘 걸어 다니고 '어머니'를 또박또박 발음한다 한들 손뼉 쳐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신입 시절, 그 영광의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하는 신참 대리는 그래서 서럽다. '8만 해와도 잘했다고 어화둥둥 난리였는데.. 이젠 10을 못해온다고 눈치를 받네?' 그렇다. 이미 그 자리는 나보다 더 야무지고 더 귀여운 새로운 신입에게 넘어간 지 오래고 어느덧 일을 눈치껏, 알아서, 척척 해내야만 가까스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잘하는 게 너무 당연한' 경력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건 비극이다.
누가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에게 책임 질만큼 중요한 일을 시키겠는가? 신입은 그저 '까라면 까는' 위치일 뿐이다. 나쁘게 보면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겠지만, 좋게 보면 일이 아무리 망해도 내 책임은 아니라는 뜻이다. 뭐 물론 같이 털리고 혼날 수야 있겠지만, 적어도 그 일 때문에 경위서나 사표를 쓸 일은 없는 것이다. 누군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그치면 순진무구한 얼굴로 "네..? 그게.. 박 과장님이..."를 읊조려주면 끝. 이제 모든 일은 박 과장이 알아서 할 것이다. 팀원의 막내이든, 프로젝트의 막내이든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 아무것도 기획할 필요도 리드할 필요도 없는 자유로움. 가벼운 어깨의 소중함. 왜 그때는 몰랐을까.
사실 이런 불평을 하기엔 대리도 너무나 어린 직급임을 안다. 하지만 이제는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 팀장님의 어깨 위에 각자의 몫에 맞게 놓인 묵직한 책임감이. 신입일 때는 마냥 위로 올라가면 좋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만년 대리로라도 영영 머물러 있고 싶다. 선임들이 처리해내는 업무량, 부담스러운 업무 내용을 어깨너머로 엿보는 것만으로 압사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신입 때보다도 훨씬 더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저기요 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대리 같은 거 시켜도 되는 거예요? 괜찮으시겠어요?
졸업해 보니 이제야 알겠다. 회사의 진정한 갑은 신입사원이었음을. 몰라도 못해도 안 쫓겨나고, 조금만 노력해도 많이 돌려받고, 일이 잘 풀리면 당연히 인정받지만 안 풀려도 비난받지 않는, 갑 중의 갑. 정작 그때는 내가 슈퍼 울트라 을인 줄만 알고 제대로 갑질을 하지도 못했으니 얼마나 억울한지 모르겠다. 인생에서 신입사원일 수 있는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짧으면 1년, 아무리 길게 쳐줘도 3년쯤은 될까. 모든 신입들은 하루빨리 경력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지만, 막상 경력이 되면 다시는 신입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심지어 직종을 바꿔 중고 신입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말만 신입이지, 당신이 익힌 업무적 그리고 사회적 기술은 결코 리셋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 대상보다도 소중한 상이 신인상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인생에 단 한 번 탈 수 있는 상,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 시기가 지나면 절대 받을 수 없는 상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당신의 파란만장한 신입 생활이 조금 많이 고달프고 서러워도 조금만 더 버텨 보자. 어쩌면 "그때가 좋았지, 아무 걱정도 없었고.."라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훌륭한 꼰대로 성장할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른다. 마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