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교육원은 이런 곳입니다
드라마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있다면 한 번쯤은 접해 보았을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방송 관계자 지인도 없었던 나 역시 많은 고민 끝에 용기 내어 문을 두드렸었다. 당시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속 시원한 후기는 찾을 수가 없어 혼자 궁금하고 막막했던 것이 떠올라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방송 작가 지망생들을 위해 최대한 솔직한 후기를 써보려 한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랜만에 방송작가교육원 홈페이지에 찾아가 보니 마침 곧 모집 기간이다. 4월과 10월, 1년에 두 번 모집을 하고 반 종류는 아래와 같이 나누어지는데 드라마반은 기초-연수-전문-창작반 4단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의로 과정을 선택할 수 없고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글을 좀 써봤든 아니든 드라마 작가를 처음 꿈꾸는 사람이라면 기초반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기초반은 서류 및 면접심사로 당락이 결정이 되는데 서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거의 기본적인 사항만 기입하게 되어 있고, 자기소개도 몇 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서류 접수를 한 대다수가 면접을 보게 되는데 면접은 5-10분 내외로 빠르게 진행이 된다. 큰 면접장 안에 면접관(주로 작가, PD 님들)이 각각 앉아 계시고 호명된 순서대로 들어가 동시다발적으로 1:1 면접을 진행했었다. 한 공간 안에서 5명 내외 정도가 동시에 면접을 보았던 것 같다. 내가 면접을 보았던 작가님은 인상이 좋으신 중년 여성 분이셨는데, 지원 동기와 그동안 써왔던 글들, 그리고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에 대해서 물어보셨다. '청춘시대'라고 답했는데 왜 좋았는지 물어보셔서 내 나름대로 생각을 말했더니, 활짝 웃으시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라고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는지 모른다. 그렇게 좋은 느낌으로 면접을 무사히 마쳤고, 나중에 찾아보니 내가 어렸을 때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 시리즈물의 작가님이셔서 더더욱 뿌듯한 기분이었다.
기초반 면접 경쟁률은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다. 너무 맥락 없이 글에 관련된 경험이 없는 사람이거나, 애정과 열정이 부족해 보인다거나, 일반적인 수업 과정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은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무난히 통과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수, 전문, 창작반의 경우 별도 면접은 없고 이전 반에서 완성한 작품을 바탕으로 평가가 진행된다. 기초반에서 연수반으로, 연수반에서 전문반으로 레벨 업하듯 한 단계씩 올라가는 구조인 것이다. 출결이 포함되긴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고 따라서 담당 선생님의 주관적인 평가에 따라 당락이 좌지우지된다. 더 높은 반에 올라가지 못해서 같은 반을 재수강하는 학생들도 꽤 많다. 같은 단계라고 해도 담당 선생님이 바뀌면 또 새롭게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결코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당연히 윗 반으로 올라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진다. 가장 높은 단계인 창작반의 경우 각 반에서 1등을 해야 갈 수 있는 수준이고, 전액 장학금이 지원된다. 수업 시간대도 낮이기 때문에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정말 드라마 작가에 '올인' 해야 하는 클래스인 것이다. 기초에서 연수로, 연수에서 전문반으로 올라가는 경쟁률은 체감상 1/2~1/3 정도라고 느꼈다. 굉장히 올라가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진급하는 동급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업을 듣다 보면 열심히 하고 적극적인 무리와, 결석도 꽤 하고 소극적인 무리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지는데 적극적인 무리가 글의 퀄리티도 빠르게 올라가고 진급률도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성별은 여자 9 남자 1의 비율이라고 보면 된다. 연령대는 20 초반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나이가 어리다고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다. 드라마는 인생을 좀 살아본 사람들이 잘 쓴다고, 많은 선생님들이 말씀하셨으니. 가장 흥미로운 건 직업군이다. 여기에 올인하려고 지방에서 싹 정리하고 올라와 고시원 생활을 하는 분도 있는가 하면, 현직 의사나 변호사 분들도 의외로 적지 않다. 전업 주부나 아무래도 나처럼 회사를 다니며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분들이 많았고, 라디오 작가라든가 다큐 작가, 드라마나 예능 PD 등 방송 관련 종사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담당 선생님들은 모두 현직 작가 or PD 분들로 구성되어 있고 당연히 윗반으로 올라갈수록 유명한 분을 만날 확률도 높아진다. 그분들이 해주시는 각종 연예계 뒷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보통 기초반에서는 이론수업 뒤 단편 드라마 1편을 제출하고, 연수 및 전문반에서는 2편씩 작성하여 제출한다. 한 반에 30명 정도였는데 한 주에 3-4명씩 순서대로 작품을 올리고 모두 그 글을 미리 읽고 와 수업 시간에 피드백을 주고받는 방식이다. 자유롭게 학생들이 의견을 말하고 나면 선생님이 마지막에 잘못된 부분과 개선 방향을 지시해 주는데, 반이 올라갈수록 평론의 수준도 높아지거니와 경쟁의 분위기도 치열해진다. "저는 이런이런 점이 좋았고~ 이런 점이 아쉬웠고~" 하고 착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이게 대체 뭔지 모르겠는데요. 읽으면서 시간낭비라고 느꼈어요."처럼 가슴에 비수를 내리꽂는 사람들도 꼭 몇 명은 있다.
나 역시 혼자 신나서 이건 마스터피스야, 천재가 나왔다고 놀라면 어떡하지? 하고 기세 등등하게 냈던 작품이 신랄하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던 적도 있고, 반대로 기대 없이 벌벌 떨며 냈던 작품이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은 적도 있었다. 내 글을 몇십 명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심지어 퀄리티 높은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주변 사람들 중에 글을 쓰거나, 하다못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어디 찾아보기 쉬운가? 아무리 지인들에게 글을 보여줘 봤자 돌아오는 피드백은 "재밌었어~" "지난번 것보다 좋은 것 같아~" 수준이다. 글을 써 본 사람, 많이 읽어본 사람만이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피드백을 줄 수 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내 대본을 프린트해서 밑줄까지 쫙쫙 그어가며 정독을 해오고, A4에 가득 채워 독후감을 제출한다. 물론 도마 위에 오른 내 글이 문단과 문단 단어 한 글자 단위로 분해되어 난도당하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 글의 성장을 위해 그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임은 분명하다.
'방송작가교육원'을 수료하면 무조건 드라마 작가가 된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실력도 높일 수 있고, 많은 기회도 잡을 수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한 학생은 선생님의 마음에 들어 공동 작가로 이름을 올리는 것을 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 드라마 작가라는 꿈을 꾼다면, 가장 쉽고 확실하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곳 아닐까 싶다.
나의 경우 기초반부터 연수반까지 1년 반 정도 교육원을 다니다 그만두었다. 물론 창작반까지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창작반 학생들의 작품은 따로 출판도 되거니와 현업 종사자들이 가장 눈여겨본다고 한다. 실제로 방송작가교육원 홈페이지에 가 보면, 현재 방영하는 거의 대다수의 드라마들이 해당 교육원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공신력 있고 체계화된 드라마 작가 양성소인 것이다. 하지만 창작반에 도전하려면 일단 직장을 그만둘 수 있을 정도의 배짱과 확신이 있어야 했고, 사실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지쳐 드라마 작가라는 일이 처음만큼 흥미롭지 않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세네 편의 작품을 써 보고 수많은 피드백을 들었으니 어느 정도 최소한의 감은 잡겠는데, 내가 이걸 어떻게 더 고치고 또 어떤 새로운 작품을 써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물론 7-80만 원의 수강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좋은 수업들이었지만, 어떤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 듣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연수원을 졸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제 어떻게 쓰는지는 알았으니, 마음이 있다면 내가 계속해서 쓰기만 하면 될 일이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그게 가장 힘든 부분이지만 말이다.
드라마 <사랑의 온도>의 하명희 작가님도 방송작가교육원 출신인데, 그래서인지 극 중 드라마 작가인 현수(서현진)의 모습에서 자전적이지 않을까, 생각되는 모습들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여의도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현수가 국회의사당 대로변에서 버스 창 밖을 바라볼 때, 카메라는 교육원이 위치해 있는 금산빌딩을 또렷이 비춘다. 수많은 작가들을 배출해 냈고, 현수처럼 고생 끝에 빛을 볼 수 멋진 작가들을 지금도 끊임없이 양성 중인 바로 그 역사적인 장소. 그 은근하고도 직접적인 오마주를 알아챌 수 있어서, 남몰래 기뻤더랬다.
비록 나는 그곳에서 처음 가졌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내가 조금 더 현실적인 꿈을 꿀 수 있도록,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준 교육원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