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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 Dec 04. 2018

부탁 열 개도 들어드릴게요 언니

여자도 충분히 나쁠 수 있으니까요

*본 포스팅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시사회로 미리 만나본 안나 켄드릭, 블레이크 라이블리 주연의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참 잘 빠졌다. 실력과 외모 모두 탄탄한 투톱 배우에 때깔 나는 포스터, 이미 검증받은 베스트셀러 원작까지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구색이다. 캐스팅-포스터-예고편 순조로운 3단계로 한껏 고조된 기대는 감탄스럽게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꽤 괜찮은 영화를 봤다'는 만족감과 동시에 함께 본 사람과 수다를 떨고 싶어 들뜬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하는, 제법 오랜만에 마주친 그런 영화였다.  


얼음처럼 차고 드라마틱한 진 마티니를 닮은 영화
-The Washington Post-

달라도 너무 다른 둘, 케미가 왜 그렇게 좋아요..?


아니 대체 이야기가 어디까지 가는 거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다소 황당무계함을 달리는 스토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올곧게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캐릭터다. 그 캐릭터를 연기한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안나 켄드릭이라는 아주 멋진 두 배우들 말이다. 한국에서는 '가십걸'과 '피치 퍼펙트'로 더 익숙한 둘은 마치 물 만난 듯,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마음껏 연기력-매력 대결을 펼쳐 보인다. 덕분에 관객들은 러닝타임 내내 안나 켄드릭의 귀여움과 잔망스러움에 감탄하다가,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섹시함과 노련함에 혀를 내두른다. 웬만한 남녀 커플보다 더 큰 덩치 차이와 끝내주는 캐릭터 설정 때문에 이미 팬들 사이에서 둘의 케미는 배우들 본인까지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 제가 본 적이 없어요...


맘들을 위한 브이로그를 운영하는 열정 넘치는 싱글맘 스테파니와,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인 에밀리. 둘의 접점은 조금도 없는 듯하지만 유치원 절친인 둘의 아들 덕분에 나름 서로에게 '특별한' 우정 관계가 형성된다. 워낙 바쁜 에밀리를 위해 종종 스테파니는 대신 아이를 픽업해주곤 했는데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간단한 부탁'을 받게 된다. "급하게 출장을 가는데, 잠깐 돌봐줄래?", 하지만 그 이후로 에밀리는 감쪽같이 행적을 감춘다. 천성이 오지라퍼에 관종인 스테파니는 남편과 경찰에 사실을 알릴 뿐 아니라 직접 에밀리의 사무실을 뒤지고 브이로그 시청자들한테 행적을 공유하는 등 나름 그녀를 찾기 위해 최선에 최선을 다한다.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그 부탁...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끊임없이 혼란스럽다. 대체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 거야? 누구한테 감정 이입을 해야 돼? 누구 편을 들어야 하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속 캐릭터들은 전부 다 나쁘고, 전부 다 어떤 면에서는 착하며, 전부 다 어느 정도(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미쳐있다. 그러니 어떤 캐릭터를 좋아해도 혹은 싫어해도 괜찮다. 심지어 모든 반전이 공개되고 선과 악이 분명히 분리된 결말에서조차 완벽한, 나름 꽉 막힌 해피엔딩을 선사한다. 마치 끝내주는 야경 드라이브를 한 뒤처럼, 단 하나의 찜찜한 구석 없이 상쾌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면에서 참으로 바람직한 오락 영화가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부탁 하나만 들어줘>를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점은 완벽한 여성 중심 영화라는 것이다. 하긴 <고스트 버스터즈><스파이><내 여자 친구의 결혼식>의 폴 페이그 감독이 메가폰을 든 순간 이미 예견된 사실일 것이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거의 유일한 남성 캐릭터는 에밀리의 남편뿐이다. 10년 전 베스트셀러로 유명 작가 대열에 올랐지만 그 이후로는 에밀리의 돈만 축내고 있는, 그냥 좀 귀엽고 훈훈한 남편.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 캐릭터는 스테파니와 에밀리 사이에서 나름 팽팽한 신경전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딱 거기서 끝난다. 이 멋진 여자들은 그가 그저 같잖은 지식과 쌔끈한 껍데기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멍청한 바람둥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그를 이용하고 맘껏 취하되 믿지도 속지도 않으며 쓸모없어지는 순간 과감하게(라고 하는 것이 무색할 만큼 아무 생각 없이) 버린다. 대부분의 영화들에서 아름답고 섹시한(하지만 텅텅 비어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눈요깃감으로 소모되는 것처럼 말이다. 꼭 섹스어필을 위한 캐릭터가 아니라 할지라도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서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명당> 리뷰에서 언급했듯 대부분 여성 캐릭터는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다 한들, 남성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로 쓰이기 때문이다. 


https://brunch.co.kr/@21jess/49


하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줘> 속에서 남자의 역할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쁜 것도, 웃긴 것도, 똑똑한 것도, 미친 것도 모두 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 야무진 영화 속에는 오직 여성 캐릭터의 서사만이 존재하며 남성 캐릭터는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데 소모되는 도구, 조력자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스토리는 여성에 의해 전개되고 모든 큰 일은 여성의 손에서 완성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폴 페이그 감독의 영화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그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는 뚱뚱한 여자도, 섹시한 여자도, 사이코패스인 여자도, 현모양처인 여자도, 그 어떤 형태의 여자도 존재한다. 마치 이제까지 남자의 세상이 그래 왔듯이. 그것은 결코 특이하거나 주목받아야 할 일이 아니다. 숨을 쉬듯, 밥을 먹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디폴트는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가 연기를 하면 '여배우'고, 여자가 못되게 굴면 '악녀'가 된다. 폴 페이그는 이런 구구절절한 부연 설명 없이, 누구한테도 불쾌감을 주지 않고 묵묵히 새로운- 아니 가려져 있던 나머지 반쪽 세상을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정말 멋진, '남감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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