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상경의 꿈
말은 제주로, 사람은 한양으로 보내랬다. 옛말을 고분고분 따라야 하는 시대는 지났지만 나는 항상 그 속담이 좋았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 세뇌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어쨌든 모든 재미있거나 중요한 일은 죄다 서울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재미있는 삶을 사는 중요한 어른이 되고 싶은 나는 서울로 가야만 했다. 그 찬란하고 악랄한 서울공화국에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발을 디뎌야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았기에. 그래서 나는 꼭, 서울 사람이 되기로 한다.
튀김소보루와 노잼의 도시 대전에서 19년이 흘렀다. 원대한 꿈을 품은 많은 지방러들이 이 시기에 서울로 탈출을 성공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차례는 아니었다. 오히려 충청남도 논산의 어느 산기슭으로 좌천되었고, 쉽게 이룰 수 없는 서울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져 갔다. 대학 시절 내내 ‘이 놈의 대학을 서울로 갔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를 독처럼 품고 살았다. 대학 사람들과는 인사치레처럼 한숨을 주고받았다. 우린 왜 여기에 갇혀 있는 걸까? 왜 그때 서울로 안 갔을까? 서울 아니 경기 끝자락에 위치한 이름 모를 대학이라도 시골에 갇혀 있는 것보단 백배 나으리라,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이제는 애증의 대상이 된 나의 모교가 부끄럽거나 그 시절이 불행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교육적으로 등등-,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수도권 대학생들에 비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부족했을 뿐이다.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주말마다 ktx를 타고 서울 등하교를 하며 수도권 대학생들의 연합 동아리 활동에 껴보기도 하고, 온갖 대외활동에 지원하기도 했다. 방학이 되면 무조건 짐을 싸서 당시 사회초년생이던 친언니의 비좁은 원룸이 위치한 분당으로 향했다. 침대, 옷장, 책상을 놓으면 꽉 차는 작은 공간에 강아지 모모까지-, 집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그 자취방이 내게는 어른의 상징이자 곧 서울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친구를 만나도 서울에서, 알바를 해도 서울에서. 찔끔찔끔 서울의 달고 짠맛을 간 보며 자유의 몸이 될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졸업만 하면 서울 입성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아직 취업이라는 큰 벽이 있었다. 한국 대학생의 본연에 충실하게 전공에서 흥미와 재능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쳐버린 나의 그 당시 꿈은 ‘한국 영화산업에 한 획을 그을 멋진 영화인이 되는 것’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온갖 크고 작은 영화 수입사, 제작사, 배급사, 마케팅사 등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대학 기숙사에서 나온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부모님의 품뿐이었는데, 두 분은 이미 대전을 떠나 경상남도 함양의 고즈넉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지 몇 년 된 차였다. 시골이라는 속성은 변하지 않은 채 계룡산에서 지리산으로 지리적 위치만이 변경되었고 나는 서울과 한 발자국 더 멀어졌다. 논산이라고 하면 훈련소 얘기라도 꺼내며 아는 척을 하지, 함양은 열이면 열 모두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함안? 함평? 함경? 한양..? 한 번은커녕 대여섯 번을 말해도 제대로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기차도 들어오지 못하고, 칠흑 같은 밤이 유난히 일찍 찾아오며, 길 잃은 새끼 포켓몬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진짜배기 시골. 내가 그 시골에서 보낸 취준 기간은 딱, 3개월이었다.
나는 3개월, 그러니까 약 100일을 사람이 새로운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최소 기간이라 칭한다. 다르게 얘기하면 내가 그것 혹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 취향에 맞는지 아닌지 파악하는데 3개월 정도 되면 확실히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 100여 일의 유예 기간 동안에는 아무리 싫은 것도 어찌어찌 버틸 수 있기 마련인데, 처음엔 모든 게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든다 해도 ‘아직 잘 몰라서 그렇겠지, 조금만 더 견뎌 보자-‘ 하는 식의 명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래서, 내가 성격파탄자가 되지 않고 함양을 버틸 수 있었던 마지노선도 딱 100일이었다. 처음 한 달은 다 좋았다. 속세에 찌든 마음을 정화시키는 투명한 공기, 짙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산책로, 계곡 위 그림 같은 정자… 유유자적한 선비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신선놀음이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두 달이 지나자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천국과도 같은 이 곳엔, 젊은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 고장의 인구는 오직 10세 미만의 유아와 50세 이상의 어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몇십 키로 반경 내에 말 섞을 2-30대 동년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외로움과 뒤엉킨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평화, 안정감, 고요함 같이 아름다운 가치들은 타오르는 청춘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다. 내가 애타게 찾는 것들은 환락, 불안감, 무모함 따위였고, 듣자 하니 그들은 서울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그마한 영화 수입사로부터 최종 합격 문자를 받는다. 유배 생활 2개월 하고도 28일 차. 낮아진 자존감은 땅에 처박히고 치솟는 짜증은 하늘을 뚫기 일보 직전이었다. 25년 산 투덜이 감당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한 만큼이나 허겁지겁 짐을 싸고 올라가는 차표를 예약한다.
내가 드디어, 서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