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 장르는 시트콤인가요

#8 자취방 천장의 폭포수를 맞이하는 자세

by 신재

이 집에서는 자꾸만 나를 서럽고 힘들게 하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정작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이랬다.


“ㅋㅋㅋ야, 너 시트콤 찍냐?”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시트콤 속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해보았다. 그들에게 쉴 새 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떠올려 보니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없다. 하나 주인공이 열을 내며 팔짝 뛸수록, 그 광경을 전지적 시점으로 지켜보는 관객은 깔깔 배를 잡고 웃는다. 그토록 제삼자를 행복하게 해 주건만 정작 주인공들의 환하게 웃는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익숙한 것은 당황스럽거나 난처하거나 혹은 수치스러운 표정뿐.


그렇게 나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이번 비극 역시 한밤중에 문을 두드렸다. 정확히는 천장 아니, 바닥을 두드렸다고 해야 하나. 고막을 뚫을 뜻 시끄러운 빗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대로 누워 반쯤 잠에 취한 상태로 사태 파악을 하려 애써 본다.


‘아, 시끄러워.. 갑자기 폭우가 내리나… 잠깐, 창문 열어놨나? 아닌데.. 블라인드도 쳐져 있고…’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그저 창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로 치부하고 다시 잠들기에는 무언가 찜찜하다. 호동이도 언제 깼는지 발치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두리번거리는 게 영 불안한 기색이다.


‘… 왜 이렇게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지..?.. 앗 차거, 뭐야 이거?!’


몸에 물이 튀자 정신이 번쩍 들며 한기가 온몸에 훅 끼친다. 벙커침대인지라 팔을 쭉 뻗자 천장에 손이 닿는데 손바닥 끝에서 정체 모를 격한 진동이 느껴진다. 후다닥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사다리를 내려가는데 발 끝이 방바닥에 닿기도 전에 찰랑거리는 물결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한 어둠 속, 벽을 짚고 발돋움을 한 채 팔을 뻗어 가까스로 전등을 켠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방 안 풍경은……


대중목욕탕의 냉탕에서나 마주칠 법 한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방 중앙, 전등 위 구멍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엄청난 기백은 감히 ‘천장에서 물이 샌다’ 따위의 담백한 표현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최소 ‘승천하는 이무기의 거센 위용’ 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굵기부터가 남달랐는데 내 두 손을 모아 한껏 큰 원을 만들어도 한참 부족한 정도였다. 물은 떨어지는 수준이 아닌,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지는 탄탄한 기둥을 만든 상태였고 좁은 방바닥에는 이미 발바닥이 잠길 정도로 물이 차 올랐다. 경이로움과 막막함에 잠시 멍을 때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부엌에서 가장 큰 냄비를 가져와 물기둥 밑에 받쳤다. 1분은커녕 10초 만에 냄비가 가득 차 올랐다. 가만히 보니 물이 떨어지는 곳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벽 쪽으로도 질질 흘러내리고, 얕은 물줄기가 여기저기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가운데 놈이 너무 강력한 탓에 묻혀 있었을 뿐. 온갖 냄비와 대접을 총동원해 여기저기 깔고 밥그릇으로 물을 퍼내 화장실로 버리기 시작했다. 호동이도 긴장된 기색으로 2층 침대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사투를 벌이다 바닥을 좀 말려볼 요량으로 현관문을 열었는데, 아아- 나의 동지들이 거기 있었다. 나뿐 아니라 옆 방도 줄줄이 다 천장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진작 현관을 활짝 열어 놓고 물을 퍼다 나르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렇게 얼굴에 흐르는 것이 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무렵, 나는 또 한 번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들은 이미 주인 할아버지에게 연락도 해놓은 상태였다. 이것은 나 홀로의 싸움이 아니었다. 위층 보일러가 터졌으며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하러 오고 있는 중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안심되는 말을 전해 들었다. 지원군이 달려오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니 확실히 물줄기가 잦아들었고 냄비가 차오르는 데 적어도 몇십 분이 필요했다. 전우들은 하나둘씩 방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으며 쾅, 쾅 순서대로 현관문이 닫혔다. 나 역시 나만의 요새로 돌아와 가난과 설움에 젖은 몸을 웅크리고 잠시나마 새우잠을 청했다. 내일이 일요일이어서, 너무너무 다행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마치 지난 새벽의 전쟁은 악몽에 불과했다는 듯, 모든 것이 멀끔한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보일러를 돌려서인지 물이 가득 차 올랐던 노란 장판은 보송하게 말라 있었으며 뜰채처럼 물이 숭숭 새던 천장은 구멍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냄비와 그릇들만이 어젯밤 일이 한겨울 밤의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줄 뿐. 불과 몇 시간 전 물을 퍼낼 때만 해도 당장 이 집구석에서 나가고야 말겠다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는데 이렇게 멀쩡해진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이다.


에이, 사람 사는데 그럴 수도 있지 뭐.




일단 대략적인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위 층이 대다수 공실로 비어 있었는데, 보일러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동파되어 터져 버린 것이다. 정황상으로도 인터넷상으로도 요리조리 따져보니 이건 100% 주인집 잘못이었다. 그러니 정당한 손해 보상 청구를 할 수 있단 말씀! 이사 온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집을 구해 나가는 건 너무 귀찮고 큰 일이었고, 그래도 그 새벽에 고생한 게 있는데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타협점으로 나는 물에 흠뻑 젖어 세탁이 필요한 카펫, 커튼 외 큼직한 의류 몇 가지에 대한 세탁비를 야무지게 청구하기로 한다.


빨래비 달라는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모른다. 일단 주인에게 손해 보상의 의무가 있다는 걸 확실히 조사하고, 관련 법령과 판례를 달달 외우고, 내 피해는 엄청나지만 난 합리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므로 최소한의 청구를 하는 것이다- 는 뉘앙스를 무해하게 전달하기 위해 연습 또 연습했다. 떨리는 실전, 준비한 대본의 반의 반도 말하지 못했는데 할아버지는 쿨하게 세탁비 영수증을 보내달라고 했다. 바리바리 한 짐을 싸들고 가 근처 세탁소에서 받아 온 영수증에는 고작 뭐 한, 5만 원쯤 찍혀 있었으려나.


보상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무색한 수준이지만, 덕분에 한동안 홍수의 현장이 생생하게 담긴 동영상을 들이밀며 새로운 에피소드로 많은 이를 즐겁게 해 주었으니 이만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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