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취방 복도빨래 절도사건
이 집에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빨래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세탁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손바닥만 한 방구석, 덩치 큰 세탁기가 어디 찬장 위에라도 웅크려 있을 리는 없고, 혹시 착각했나 싶어 글을 다시 확인해 봐도 분명 옵션에 세탁기가 들어가 있다. 있을 리 만무하다는 걸 알면서도 화장실부터 신발장까지 몇 번을 확인한 끝에 빌라 주인 할아버지한테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저.. 며칠 전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세탁기는 혹시 어디에…”
“아~ 세탁기? 그거는 지하에 있지. 공용이여 공용!”
겉보기에도 허름한 빌라 건물,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로 용기 내 발을 딛자 바닥 한편에 굳건히 자리 잡은 낡은 통돌이 세탁기가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왜 나는 이 사실을 집을 보러 왔을 때 확인하지 못했던 것인가. 과거의 나를 원망해보지만 이미 일어난 일. 후회는 접어두고 빠르게 현실에 적응하기로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빨래 바구니와 세제를 품에 안고 불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로 조심조심 내려간다. 너무 어두운 덕에 세탁기의 청결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어쩐지 알고 싶지도 않아 한 번도 플래시를 비춰 본 적은 없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니까. 주말 황금 시간대면 사람 대신 빨래 가득한 바구니들이 계단부터 세탁기까지 나란히 줄을 서 있는 풍경을 마주칠 수 있는데, 이래 봬도 이 녀석 혼자 열 세대가 넘는 1인 가구의 빨랫감을 책임지고 있기에 끝나자마자 재빠르게 회수해 오는 센스는 필수이다.
워낙 무던한 터라 찝찝한 건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어도 까마득한 어둠을 마주할 때면 매번 식은땀이 났다. 공포영화 도입부에 나올 법한, 지하실로 내려가는 첫 희생자의 모습이랄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보다 귀신이 더 무서운 나는 누구보다 침착한 태도로 빨래와 세제를 넣고, 뚜껑을 닫고 동작 버튼을 누른 후 뒤를 돌아 그야말로 꽁무니가 빠져라 후다닥 도망갔다. 등을 돌리는 순간 왜 두려움은 배가 될까. 한 둘도 아니고 열댓 명이 사용하는 공간인데, 불 좀 달아 주지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매주 공포 특급열차를 찍게 하나. 주인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컸지만 소리 내 표현하기에 그때 나는 너무 소심했다. 다만 언젠가 내가 꼭 집주인이 되어서, 세입자에게 정말 잘해줄 테다- 하는 무언의 다짐을 가슴에 새긴다.
좁은 방, 세탁기 놓을 자리가 없는 건 고사하고 빨래 건조대를 놓을 자리도 부족했다. 대다수의 입주민들은 현관 맞은편 비좁은 복도에 건조대를 나란히 펴놓고 사용했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시류에 편승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어느 평화로운 날 저녁, 사건이 발생한다. 빨래를 걷으려고 복도에 나가 보니 무려 반절 넘는 옷가지들이 훌쩍 증발해 버린 것이다. 남아 있는 건 양말 나부랭이와 목 늘어난 티셔츠 정도였다. 사실 정확히 어떤 옷, 몇 벌이 없어졌는지 기억나지도 않았지만 눈물 날만큼 억울한 건 큰 맘먹고 새로 사서 아직 개시도 안 한 원피스가 거기 속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빌라 입구에는 잠금장치도 없었고, 보여주기 식 가짜 CCTV조차 달려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빨래 몇 장 없어졌다며 경찰을 불러 지문 감식을 할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해도 발만 동동 구르는 것 외에 잃어버린 빨래를 찾을 방도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의 피해를 공론화하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절제된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나의 목소리와 달리 할아버지는 침착하기 이를 데가 없다. 연륜이란 대단한 것이다.
“아아, 누가 착각해서 가져갔나 보네~ 종이에다 써서 돌려달라고 붙여봐~”
머리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 세상은 내 생각보다 아름다울지 몰라-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노트를 쭉 찢어 또박또박 큼지막하게 글씨를 써내려 간다.
[ 201호 빨래 잘못 가져가신 분, 꼭 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건조대 뒤 벽에 야무지게 붙여 놓고, 혹시나 기적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다음 날, 흡사 첫눈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현관을 열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 202호 빨래도 돌려주세요! ]
[ 저희 집 빨래도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복도 벽은 줄줄이 빨래 주인들의 애타는 외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이 도둑, 정말 작정한 거였구나. 평생 내 잃어버린 원피스를 다시 볼 일은 없겠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위안이 되었다. 그래, 나만 힘든 게 아니고 다 같이 힘든 거였구나.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더니 정말 그런 것인지 이상하게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쥐가 나올 것 같은 지하실의 세탁기를 나눠 쓰고, 도둑이 제 집처럼 드나드는 낡은 복도에 빨래를 맞대 널어놓은 우리는-, 서울 한 귀퉁이, 500에 30으로 결속되어 얕은 뿌리를 내리고 저마다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애쓰고 있던 것이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도, 인사 한 번 나눈 적도 없지만 같은 공간과 비슷한 순간을 공유하는 서러운 이방인들. 그 느슨하고 미적지근한 연대감이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큰 위로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