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의 한국 제목이 이상한 이유

#11 막내가 바라본 영화 수입사의 생태

by 신재

영화 수입사에 다니게 된 지 반년이 되지 않아 나는 그저 영화산업의 허울 좋은 겉모습에 반했던 것이지 진정 이 곳에 뼈를 묻고 싶을 정도의 애정도 열정도 없었다는 슬픈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나는 영화를 좋아하고 웬만큼 유명한 작품은 거의 다 보았지만, 열 번 넘게 볼 정도로 제대로 꽂힌 영화는 없었다. 작품과 경력을 주르륵 나열할 정도로 깊이 있게 좋아하는 감독도 배우도 없었다. 뻔한 상업 영화는 굳이 보고 싶지 않지만 보면 또 웃으라는 장면에서 열심히 웃고 울라는 장면에서 열심히 운다. 예술 영화를 곧잘 보긴 하지만 ‘대체 이건 뭐 어쩌라는 거야’ 싶어 지루함에 몸부림을 칠 때도 많다.


영화 업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정작 주변의 영화광 친구들보다도 내 알량한 지식은 한참 좁고 얕았다. ‘혹시 내가 이 곳에 있을 자격이 없나..?’ 하는 희미한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어갔고 그에 따라 퇴사에 대한 열망도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소기업인 만큼 수입, 마케팅, 서무 등 그야말로 다양한 직무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중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마케팅이었다. 순진했던 나는 영화사가 좋은 영화를 대중에게 전파하는 멋진 곳이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장사를 하는 곳이었고 다만 그 품목이 영화일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회사는 목적은 수익 창출이지 이상과 공익 추구가 아니니까. 그렇게 내 환상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와장창 깨졌다.


글쓰기는 자신 있는 터라 보도자료나 콘텐츠 작성, 인터뷰 정리 같은 일들은 그래도 재미있고 보람도 있었다. 내가 쓴 글이 기사로 나가거나 대형 포털 메인에 떡하니 걸리면 신나서 여기저기 자랑도 했다. 비록 내 이름 석 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내가 창출해낸 무언가에 많은 이들이 반응한다는 게 너무 좋았다.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말이다. 반면 영화 제목과 카피, 포스터 같은 것들을 정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물론 단순히 그 과정 자체만 두고 보면 가장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일임이 틀림없지만 하나, 막내인 내게는 아무 결정권이 없으며 둘, 목적은 오직 영화 홍보지 영화 소개가 아니라는 점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성질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감독의 의도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원제목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단어, 어떤 이미지를 써야 시선을 끌 수 있을까? 한 번의 클릭을 더 유도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중요했다. 회사는 돈을 버는 곳이니까. 그래야 내 월급을 줄 수 있으니까.


포털이나 SNS에서 우리 영화를 검색하면 ‘제목을 왜 이 따위로 바꿨냐’, ‘예고편에 속았다. 완전 다른 영화다’ 하는 글들이 수두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들에 속했었다. 그때는 영화 관계자들이 단지 무지하고 무심해서 그런 만행을 저지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든 것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일단 속았더라도 영화를 보게 했으니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흥행에 도움은 안 되겠지만, 조용히 망하는 것보다는 어그로라도 끄는 편이 낫다고 해야 할까. 자본의 굴레에 엮여 내가 욕하던 바로 그 어그로꾼이 된 기분은 비참했다. IMDb나 로튼 토마토 같은 해외 사이트 정보로 무장하고 쯧쯧 쟤네는 이런 것도 모르나, 국내 수입/배급사를 속 편히 손가락질할 수 있는 그 위치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물론 입사 전 나의 상상처럼, 내 허세를 가득 채워 주는 부분도 있었다. 베를린, 칸 같은 세계적인 영화제로 출장을 다닌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보통 사람들은 영화제라고 하면 화려한 배우들이 몰리는 레드 카펫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사실 그 뒤편에서는 거대한 필름 마켓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우리 회사도 주요 필름 마켓에 참가해 어떤 작품들이 나왔는지 검토하고 수많은 제작사들과 미팅을 했는데, 해외팀 소속이라 대표님의 보조이자 비서처럼 옆에서 졸졸 따라다녀야 했던 나는 잔뜩 들뜨고 잔뜩 긴장했다. 세계의 모든 영화 관계자들이 모여드는 곳. 그만큼 국적도 언어도 문화도 다양하다. 대학에서 우물 안 영어만 파다 온 내게는 모든 외국인들의 말이 알쏭달쏭한 암호처럼 들렸다. 일단 대표님 옆에 앉아 끄덕끄덕, 눈을 맞추고 웃음을 짓기는 하는데, 대체 뭐라는 지 하나도 모르겠다. 무기처럼 노트와 펜을 들고 있으면 뭐하나. 듣는 게 있어야 받아 적기라도 하지. 솔직하게 말하고 물어봤으면 될 텐데, 못난 자존심이 발동해 안 그래도 바쁜 대표님께 “방금 무슨 얘기 한 거예요?” 라며 무식한 티 내기가 싫었다. 처음 참가한 필름 마켓, 얼마 가지 못해 나의 실상은 낱낱이 들통나 버린다.


“좀 전에 거기, 개봉이 언제쯤 이랬니?”

“네..? 기억이 잘...”


“그래? 그럼 감독이 누구였지?”

“어… 음..”


“제작비가 얼마랬지?”

“………”


“야, 너 뭐야? 그럴 거면 미팅은 왜 들어오니?”


백 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혼나는 것도 쪽팔리지만, 그보다 내가 생각해도 따끔히 혼나야 될 만큼 모자랐다는 점이 견딜 수 없게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리스닝 실력이 늘 리는 만무하다. 궁리 끝에 다음 날부터 미팅이 시작되면 조용히 핸드폰 녹음 어플을 켜 테이블 위에 엎어 두었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대표님께 질문을 던지고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했다. 한 번 출장을 가면 30분짜리 미팅이 백 개쯤 잡힌다. 보통 열흘 이내이니, 하루에 적어도 열 곳 이상을 만난다는 이야기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서는 본격적인 복습이 시작되었다. 그 날 있었던 모든 미팅 내용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번을 돌려 들으며 모든 내용들을 받아 적고 달달 외웠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자 적어도 대답을 못 해 혼나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물론 허술한 부분은 많았지만 노력하는 게 보이니 대표님도 넘어가 주셨으리라. 그렇게 몇 번 출장을 다녀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녹음본이 필요 없을 만큼 한 번에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과 가십으로 처음 보는 관계자들과 그럴듯한 대화도 이어갈 수 있었고, 나중에는 대표님 없이도 웬만한 곳과 혼자 미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모르면 무조건 물어보라’는 교훈을 아주 어렵게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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