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 어느 새벽, 가수 ‘해쉬스완’ 의 ‘스쳐지나가자’ 라는 노래를 들으며 문득 올해 나를 스쳐지나갔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가사의 내용은 연인과의 헤어짐에 있어 지친 감정을 그냥 서로 스쳐지나가자고 말하는데 연인과의 관계 이외에도 올해 나를 스쳐지나갔던 사람은 누가 있었고, 그 외의 존재들은 또 어떤 것들이 있었는 지 궁금해졌다. 스쳐서 지나갔다는 건 내 곁에 잠깐 머물다갔거나 머무를 새도 없이 사라졌거나하는 유통기한이 짧았던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지만 스쳐지나갔다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실 중요한 건 기한이 아니라 ‘어찌되었던 현재 내게서 사라진 것’ 이라고 좀 더 넓게 스펙트럼을 잡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있어 유제품 같은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또 사라진 통조림들은 무엇이었을까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올해 초를 회상했다.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던 올해 초, 나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내 삶에 있어 앞으로의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는 발걸음을 함께 걸어주던 사람이었는데 봄이 다가오면서 관계가 멀어졌다. 급작스러웠던 이별에 당황스러웠고 또 무덤덤하였지만 그 이후에 보여주었던 그녀의 에티튜드는 내 상식 밖이었다. 함께 두 가지의 계절을 미처 다 보내지 못했던 관계는 그렇게 스쳐지나갔다.
더불어 그 달에 함께 스쳐지나갔던 건 촬영이었다. 앞으로 모델 관련 된 일은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고 주변의 지인들을 만날 때 마다 입 밖으로 꺼내며 다시 한번 슬금슬금 피어오르려던 미련을 입막음하던 때, 모델시절 몇 번의 촬영을 함께 했던 포토그래퍼와의 촬영을 마지막으로 난 스튜디오를 떠났다. 많은 촬영을 하며 수 없이 카메라렌즈에 담겼던 나를 등지고 그렇게 내 10년의 커리어와 스쳐지나갔다. 잠깐 앞으로 돌아와 ‘스쳐지나가자‘ 의 노래가사를 보면 “스친 옷깃이 하필 정전기가 나버린 거지 뭐 정말로 마지막인가봐 여기까지가” 라는 가사가 있는데 가삿말대로 그저 스치고 말 옷깃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괜한 정전기를 만들었던 건 아니었는 지 돌아보게 되었다.
봄이 가고 무더운 여름이 왔을 땐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졌었다. 돌이켜보니 성인이 된 후로 무엇인가에 몰두하여 공부를 해 본적이 없었다. 이왕 하는 거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분야에서 그리고 추후에 증명할 수 있는 자료로 남기고 싶어 자격증을 알아보았다. 그 당시 하고 있었던 일에 관련된 자격증을 알아보니 2달 후에 VMD자격증 시험이 있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시험신청을 한 뒤 서점에 가 관련전공책을 구입해 하루 1시간 씩 틈틈이 공부를 하였다. 시험 1주일 전 혼자 여수로 여행을 갔었는데 오고 가는 기차 안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었던 기억이 있다. 1차 객관식과 2차 주관식이 합쳐진 시험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딱 주관식 1문제 차이로 2차에서 떨어졌다. 아쉽게 자격증은 발급받지 못하였지만 새로운 무엇인가에 자발적으로 도전했다는 점에서 나 자신에겐 합격점을 주었다. 자격증도 그렇게 여름장마 빗방울처럼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가을과 현재진행중인 겨울엔 아직 스쳐지나간 존재는 없다. 지나간 올해를 귀담아 들어보니 스쳐서 사라진 것들 보단 스쳤음으로 인해 남겨진 것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작년의 나에겐 없었던 존재들이 올해의 나에겐 스쳐 존재하는 수 많은 새로운 것들에 대해 다시금 각인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예전엔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며 만나고 알게되는 새로운 사람들에 대해 가끔씩 의도적으로 잣대를 들이밀곤 했다. 이 사람은 나와 맞지않아, 기껏해야 한두번보고 말 사이야. 이 사람은 결이 나와 비슷한걸 보니 왠지 평생 친구가 될 것 같아. 등의 일방적인 시선으로 관계를 미리 앞다퉈 정하기도 했었는데 요새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느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주제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내가 굳이 애쓰고 정하려 하지않아도 스쳐지나갈 건 지나가게 되있고, 내 곁에 남겨질 건 남겨지게 되있다. 그게 사람과의 관계든 어떤 것이든 간에.
앞으로도 수 많은 어떤 것들이 나를 스칠 진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굳이 붙잡지 않으려한다. 사라져가는 그 그림자가 좋을테고, 남겨지는 체취의 온기도 좋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