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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준 Dec 20. 2020

쪽지

서울 번화가의 한 옷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침 겨울세일을 시작한 때라 코로나가 극심한 시기에도 쇼핑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탓에 결제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회색의 털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 여성분이 옷을 들곤 내 앞으로 왔다. 담아갈 봉투가 필요하냐는 내 말에 그녀는 아니요 라고 말했다. 브랜드에서 새롭게 런칭한 맴버쉽 프로모션으로 인해 10% 할인이 가능했는데 할인을 원햐나는 물음에도 그녀는 아니요 라고 답했다. 옷을 건네주며 감사하다고 마무리인사를 건내는데 그녀가 조심스레 내게 무언가를 내밀고 떠났다. 간혹 영수증을 버려달라는 손님들이 있어 당연히 영수증이겠거니 생각하며 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곳을 보니 고이 접은 자그마한 쪽지가 올려져있었다. 쪽지를 집어 들고보니 그녀는 이미 매장 밖을 나간 뒤였다. 자칫하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뻔한 그 것을 난 고스란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않아 쉬는시간이었기에 휴게실에 올라가 쪽지를 꺼냈다. 쪽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일지 예상은 됐지만 혹시나 아무 글씨도 없는 쓰레기이거나 다른 어느 매장의 영수증은 아닐까하는 약간의 재미있는 의구심을 품곤 펼쳐보았다. 다행히도 내 예상과 일치하는 내용의 4줄로 된 손글씨와 자신의 연락처가 적혀져있었다. 그녀가 나를 오늘 처음 보았는 지 전에도 몇 번 보았었는 진 알 수 없었지만 고맙게도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며 한줄 한줄 적어내린 마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퇴근을 하고서 적혀진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집에 도착 해 샤워를 하고 밥을 먹는 중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름 늦은 시간이었기에 그려려니하고 적당히 할 일들을 마무리 짓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그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잠이 많은 성향인가 하면서도 이상했다. “먼저 맘에 들어 연락처를 주곤 답장을 안한다고?” 이것이 신종밀당인가 하며 메시지함을 들어갔다. 타이핑 된 글자 밑에 전송됨이라는 문구는 선명한데 읽음이라는 문구는 영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는 연락처의 메시지를 차단한 것인가 그렇게 설정할 수도 있나 생각하며 카카오톡을 키고 연락처를 동기화시켰다. 푹 눌러쓴 모자탓에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나를 두근대게했다. 내 외적인 취향과 비슷한 그녀의 프로필사진을 보며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비슷한 문구로 그녀에게 다시 한번 연락을 했지만 그녀는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채팅창을 보며 겪어본 적 없는 신경쓰임의 울림은 증폭되어만갔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크게 나누어보면 답은 2가지 중 하나일 것 이었다. 연락처를 주고선 마음이 바뀌었던 지, 핸드폰에 문제가 생겼던 지. 정확한 해답은 아마도 영영 알 수 없을거란 생각에 체념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더불어 약간의 화가 슬그머니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 어이없음을 가만히 방치했다간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미스테리한 이 상황이 혹시 전 여친의 몰카는 아닐까?,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의 골탕작전은 아니었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피해망상까지 갈 기세였다.


재빨리 초점을 바꾸었다. 그녀가 나에게 쪽지를 건냈던 그 찰나의 순간, 그리고 그 쪽지를 펼쳐보았던 또 다른 찰나의 순간만을 기억하기로 했다. 물론 그 찰나의 감정과 그에 달려 온 행복의 여운까지 모조리 담았다. 그녀에 대한 회색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슬그머니 올라왔던 검은 화는 가라앉고 하얀 설렘만 가득했다. 만나게 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있고, 그게 아닌 관계는 그저 인연이 아닌거라고. 그래서 난 우리를 이렇게 스쳐지나가겠다고, 당신은 이미 날 지나쳤을지라도.


혼자가 편했고 혼자가 어울렸던 12월에 잠시나마 둘이 되게 해 준 그녀에게 이 글이 닿았으면 좋겠다. 그 언젠가에 이렇게 말할게요. 그 때 전 그랬어요, 당신은 그래서 그랬었군요. 알아요. 사실 몰랐어요. 당신은 알죠? 그냥 그렇다구요, 그게 다 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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