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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준 Mar 24. 2021

아날로그

아마도 16 혹은 17, 정확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잠시 만났었던 친구는 내게 자주 선물을 주었었다. 각종 기념일 때에는 그에 맞는 선물을 항상 주었었고, 아무 날도 아닌 날에도 간식이며 소소한 선물을 주머니에 넣어주곤 했었다.  중에는   편지도, 짧은 쪽지도 함께였다. 증명사진이나 친구들과 이미지사진을 찍을 때면 항상 남은 여분을 나에게 주었었는데 헤어지고 나서 보니  양이 은근 많았었다.   무슨 호기심에서였는지 받있던 편지와 사진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나쁘게 헤어졌거나  친구를 증오할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한번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아파트 지하계단에 내려가 쭈구려 앉아 불을 붙였다. 생각 외로 마치 헤어진 관계를 부정이라도 하는   타지 않았다. 타다 말다 반복하며 생긴 얼룩진 기억들의 잿더미를 신발 밑창으로 지지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그 이후로는 사귀었던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접근성이 쉬운 디지털식 흔적들을 끊어내기로 했다. 핸드폰 속 사진과 연락처, 메신저와 sns는 마치 그 사람과 일절 연이 없었던 것 마냥 지워낸다. 그리곤 남은 흔적들은 오래 된 운동화 상자 안에 보관한다. 대게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 나이기에 나름의 아날로그적인 usb를 만든 셈이다. 아무리 빠른 디지털화 시대에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져 버린 것, 지나갔지만 다시금 예전 그 자리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것엔 사진과 편지만한 게 없다. 빛바랜 과거의 냄새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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