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 부산에 사는 친구가 날 보기 위해 잠시 서울로 올라왔다. 먼저 도착해 서촌의 한 카페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카페 입구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입구로 나갔다. 문 앞에서 마주친 그 친구의 손엔 새빨간 한 송이 장미가 들려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꽃 선물이라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 고마움이 더 컸다. 하루 종일 부쩍 추워진 날씨를 머금은 찬바람에 이리저리 치인 잎사귀는 그새 풀이 죽어버렸다. 집에 들어와 긴 가지를 조금 잘라내고 화병에 물을 담아 넣어주었다. 이미 죽어버려 차가워진 장미는 쭉 말이 없었다.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는 탓은 분명 귀찮음 때문이었다. 침대 근처 수납장 위에 자리 잡은 장미는 언제든 내 시야 안에 공존했다. 화병 안 물을 새로 갈아주는 건 채 1분이 걸리지 않는 일이지만 24시간 중 그 몇 초를 이미 죽은 것에 할당하는 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장미와 함께한 지 5일째 되는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무심하게 쳐다본 그것엔 분명 무언가 확연히 다른 느낌이 있었다. 시야를 낮춰 자세히 보니 가지 중간쯤에서 새로운 잎사귀가 22개나 생겨나있었다. 새로 난 작은 잎사귀들은 죽음을 거스르며 더욱 푸릇한 녹색을 띠었다.
적잖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말 못 하는 식물에게서 들려오는 말을 들은 기분이랄까. 살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이 속해있는 환경 따위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 전혀 문제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8개월 만에 다시 바뀔 환경 앞의 난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불가능한 이론을 뒤집을 만큼 과연 절실한가 다시금 되뇌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