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중함
KPI(한반도평화연구원) 회원인데 해마다 시네토크를 개최한다. 올해는 서울국제영화제 출품 영화인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가 시네토크로 선정되었다. 서대문구에 있는 필름포럼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 이란희 감독을 패널로 초대해서, 심혜영 교수님의 사회로 시네토크를 진행하였다. 영화에 대한 관람객들의 감상과 질문을 듣고 감독님의 답변을 들으면서 서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 제목이 ‘3학년 2학기’라서 특성화 고등학생의 취업 준비에 관한 이야기로 보였다. 청소년 교육이 비전인지라 관심이 있어서 관람했다. 특성화고 3학년 이창우와 친구 김우재가 나온다. 인천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고3인 창우와 우재는 경인 공전 입학과 병역특례가 보장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단의 공장에 실습생으로 들어간다. 다른 학교의 고3인 성민과 다혜가 일을 이미 하고 있다. 둘은 그곳에 적응한 모습을 보인다. 이창우와 김우재는 인생 첫 회사에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한다. 과장은 두 학생에게 오전 8시까지 출근하라고 요구한다. 관리자인 송대리는 창우와 우재에게 일을 주고 확인하면서 함부로 말한다. 어투가 다그치고 나무라고 공격하는 말투다. 납땜 일을 하는 한주임이 송 대리의 언행에 대해 자제시키면서, 기계가 위험하니 앞치마와 토시를 사주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송대리는 일을 못 한다고 창우와 우재에게 높고 강한 어조의 막말을 계속해 댄다. 창우와 우재는 상사의 공격 앞에서 무방비로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우재는 그만두고 아버지의 편의점에서 일한다. 성민이의 고등학교 선배인 수하가 다른 공장에서 일하다가 안전사고로 죽는다. 창우도 철야를 하다가 돌아가는 기계에 팔을 다치는 사고를 당한다. 성민이는 공장에 온 노무사에게 철로 된 앞치마와 추락 방지 철장을 요구한다. 성민이는 상사에게는 말을 못 하다가 노무사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내고 난 뒤 퇴사한다. 이후에 라이더의 생활을 시작한다. 저마다 자신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간다.
창우는 아버지가 중1 때 돌아가셔서 엄마가 세 아들을 키우고 있다. 창우는 엄마를 도와 막냇동생을 돌보는 장남이다. 창우는 실습비로 나온 돈으로 막냇동생이 먹고 싶어 했던 치킨 두 마리를 사서 가족과 같이 먹는다. 방 세 개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는 데 천만 원가량이 부족해지자, 엄마는 창우에게 부탁한다. 창우가 받은 급여로 딸기도 사고, 이사할 때 전세금에 보태기도 한다.
창우가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는데 적응기가 필요했다. 어떤 일을 처음부터 능숙하게 잘할 수는 없다. 적응하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치킨과 딸기를 사기 위해서는 고군분투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가만히 누워있는데 하늘에서 치킨과 딸기가 뚝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일상에서 시간과 노력이라는 기회를 나에게 부여하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창우는 1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을 익힌다. 부단히 참고 최선을 다해서 살기에, 어떨 때는 치열하다. 그래도 소소한 기쁨과 행복이 곳곳에 있기 마련이다. 창우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경인 공전의 대학생이 되어 캠퍼스를 걸어 다닌다.
창우는 성격이 느리고 소심하지만, 꾸준하고 성실하다. 공부는 잘 못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찾아간다. 영화에서 창우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계약서를 어른들이 주면서 사인을 하라고 하자, “사인이 없는데 이름을 써도 될까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써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사인이 없이 이름 석 자로 시작하던 창우도 언젠가는 멋진 사인을 가진 사회인으로 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지금은 자신의 주관이 확고하지 않지만, 소신이나 주관도 세워가는 어른으로 성장하리라.
창우가 나온 세상에는 친절한 사람도 있고, 송대리 같은 장애물도 있었다. 어느 곳에나 행복과 평화를 깨는 사람이 있다. 장애물을 뛰어넘는 고통을 통과하면서 용기를 기른다. 어두움과 빛이 있듯이 일상은 고요하지만은 않다. 행복과 즐거움만 있는 게 아니다. 참고 견뎌야 하는 시간과 상황이 존재한다. 전쟁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평화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소소한 행복과 평화를 지키는 사람인가. 아니면 전쟁을 만드는 사람인가. 나는 존중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피스 메이커로 살고 싶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일하는 터전인 공장과 창우의 집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그려져서 일상의 소중함을 잔잔하게 느꼈다. 창우가 엄마를 도와 빨래를 개거나, 반찬을 집어 먹는 모습이 나온다. 공장의 내부에서 불꽃 튀는 기계를 조작하거나 납땜하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창우가 공장에서 지게차를 운전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지금도 돌아가는 기개의 굉음을 음악 삼아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굳이 일을 노동과 다른 일로 구분하고 싶지 않다. 어떤 일이든 노동이 포함된다. 노동을 떠나서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다. 무슨 일이든 소중하다. 생존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정체감이기도 하다. 매일 해내야 하는 일이고 하루를 일로 수놓는다. 도망가고 싶은 현장이기도 하지만 삶을 유지해 주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곳이다. 일이 일상이고 삶이며, 그 속에서 울고 웃기도 하고 행복을 건지기도 한다.
어떨 때는 일상이 지긋지긋해서 도망가고 싶다. 하루를 어렵사리 버티기도 한다. 때로는 딴 곳으로 탈출했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런 하루를 어찌어찌 잘 넘기고 무사히 살아내서 감사하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반복되지만, 사랑하기 위해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일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매일의 작은 그림이 쌓여서 인생의 큰 그림을 만든다. 하루는 축복의 선물이다. 신이 생명을 가진 자에게만 허락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랑하면서 살기로 한다. 이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나와 모두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