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증거 : 의지(will)와 소망

by 생명의 언어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그와 거처를 함께하리라." (요14:23)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은 바로 "성화(聖化)"에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나서 최초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나는 죄 사함을 받았고, 따라서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거나, "이미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내 죄에 대하여 피해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과하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TV 매체 상의 언급 등을 포함하여),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며, 그는 살아서의 생에서 성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죽어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곧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되었으므로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서 내 영혼을 정화하고 생육, 성장케 해나가는 성화(신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를 시작할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 즉, 쉽게 말해서, "출발선 앞에 설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출발선 앞에 멀뚱히 서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신호에 맞춰서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이제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출발선 앞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자를 주께서 보실 적에, 얼마나 기가 차실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내 스스로 그렇게 칭한다. 비록 세상이 말하는 종교적, 제도적, 형식적 기준에서의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주님을 믿고 사랑하여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영혼"으로 삼는다면, 나는 그 기준 하에서는 완벽하게 그리스도인이다.


①. 나는 "그리스도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그저 일반적인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신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이시자, 살아서 성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신비를 이루시며, 이를 통하여 성부의 신성을 그분의 인격을 통하여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②.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분을 사랑한다.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은 진실하며, 그분 앞에 서더라도 부끄러움이 없다.


③. 나는 주의 자녀가 받는 은혜가 "세속적,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삶의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이루는 영혼의 성화"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서 걸으며,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해줄 화려한 "장신구"일 뿐이다.



십자가의 도(道)는 내게 종교를 뛰어넘는다. 종교보다 신앙이 더 높고 순수하다. 종교는 형식이지만, 신앙은 실존이다. 예수를 종교로서 믿는 것과, 나의 삶과 일상 속에서 '실제로'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이 마치 영화 속 캐릭터를 "허구(판타지)"로써 좋아하고 사랑할 수는 있지만, 정말로 그 캐릭터와 나의 일상을 공유하며, 수시로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와 교감하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와 함께한다고 믿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세상은 후자의 사람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 관점에서, 나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나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나는 일반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다. 나는 순진하지 않다. 나는 기독교의 탄생 과정에서의 수많은 역사적, 현실적 오류들과 거짓들로 점철된 과정들에 대해서 모르지 않으며,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삶과 죽음과 관련하여 어떤 종교적 환상 및 후대 교회의 종교적 권력을 위하여 정교하고 은밀하게 조작된 것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조작되었고 무엇이 실제인지에 대해서, 그 모든 정황들과 내용들에 대해서 결코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의도된 "방법적 회의론"을 내 스스로 가장 지독하게 들이대도, 나의 머리(지성)는 그것들을 다 알고 있지만, 아는 상태에서 나의 가슴(영혼)은 그분을 여전히 (그리스도 하나님으로)믿고, 그분을 사랑하며, 내 삶 속에서 그분과 교제하고 교감하며, 그분과 살아서 하나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믿음과 신앙은 나의 지성과 이성보다 더 높다. 나는 그것들이 죄다 거짓말이고, 조작되었고, 허구에 불과하다고 해도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나의 이러한 모순적 믿음과 신앙을, 바로 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해서 매우 능숙한 전문가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그 모든 것을 홀로 파헤치고 탐구할 수 있는 지성과, 또한 그 탐구의 결과물들과 과정들을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형성하고 서술하고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정신적 능력과 자질과 재능을 다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께서 주신 그 지성이라는 도구를, 아버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사용한다. 내게 아버지는 유일하고 영원한 실재이시며, 지성은 그 실재를 토대로 해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 라는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다.


아니, 그분께서 나를 이와 같이 만드셨고, 나는 이와 같이 지음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영혼이 창조된 것이, 내게는 더할나위 없이 기쁘다.




만약 죄 지은 그리스도인들의 뻔뻔한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고 깊은 상처를 받은 분들이 계신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대신 사과드린다.


"나는 다르다" 따위의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지은 죄는 곧 나의 죄이고, 오히려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으되, 오직 나의 존재로 인하여 일어난 죄이다. 나는 나의 죄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는다. 이미 한 번, 그러나 정작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그 유일한 한 번을, 나는 외면했다. 그것은 내가 평생 동안 짊어져야 할 나의 원죄이자, 동시에 나의 순결한 초심이다. 나는 수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분을 보았다. 그 자리에 나의 육신과 자아는 없었을지언정, 나의 영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왜 그 일을 행하시는지를 다 알면서도, 내가 죽는 게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분을 사랑한다고 이리 고백하는 주제에, 그분을 외면했다. 정작 그분께서 가장 무섭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우셨던 그 순간에, 나의 영은, 도망쳤다.


이것이 나의 실체다.


나는 죄인이다.


물론, 나는 내 자신에게 비극적인 영웅심 따위를 허락하지도 않고, 또한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죄책감을 갖지도 않는다. 그건 오히려 교만이다. '내가 이만큼 불쌍하다'고 자기를 보호하려 드는. 그런 건 없다. 그냥, 이게, 내 영혼의 실체이고 본질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생에서 성화의 길을 결코 버릴 수 없다. 비록 내가 가난하고 죄가 많고 무능한 고로 그 길을 그분의 뜻대로 잘 따르지 못하며, 서투르며, 느리고 천천히 가느라 그분께서 보시기에 많이 답답하실 수는 있으실지언정, 그분이 나를 버리시기 전에 내가 이 길을 먼저 버리는 일은 없다.


내게 이것은 유일한 구원이고, 구원의 길이며, 다른 길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달라. 그들은 그저 몰랐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아는 자다. 진리를 알며, 진리와 하나된 자다. 그렇기에 그 모든 죄는 결국 나의 존재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다.


"내가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교만이고 비겁하고 치졸하고 수치스러운 변명인지를, 그날, 그분을 영접하면서 나는 한 번에 다 깨달았다. 같은 맥락으로, 인류 집단이 여지껏 지구상의 곳곳에서 살인과 학살과 고문과 끔찍한 죽음들을 벌이며, 심지어 그것들을 즐기기까지 하는, 이토록 처참한 인류의 죄와 악은,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역사가들을 볼 적에 내 가슴이 참으로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내 영혼이 아직 성화되지 않은 탓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인류 집단의 일원이다. 그리고 인류 집단이 지금껏 지지른 모든 죄와 악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다 알고 계시며, 따라서 그 모든 죄와 악의 일부, 혹은 전체에 대하여 나는 단독, 내지는 공동 책임을 지닌다.


주의 자녀로써, 내가 죄사함을 받은 것은 결코 내 능력과 자격이 정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실체가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현 인류의 실태가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선택을 받은 것은, 결코 특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먼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라"는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셨던 외아들에게 결국,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그런데, 감히, 군대를 가지 않는 이들을 일컬어서, 금수저로 태어난 자들을 일컬어서, "신의 아들"이라는 지독하게 오만한 말을 쓸 수가 있는가. 나는 그것에 참으로 처참한 심정을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신의 아들"께서 결국 어떤 길을 걸어가셨는가. 살아서는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고, 결국 세속적 관점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로, 그토록 비참하고 낮은 십자가형을 당하사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것은 영적 신화다. 그러나 동시에 믿는 자의 영 안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역사다.


최소한 이 모든 것을 믿고 사랑한다 말하는 자가, 내가 능력이 없고 모자라고 가난한 고로 충분히 성화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워할지언정, 내가 "주의 자녀"라고 으스대고 우쭐대며 그 자격 하나로 남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심판할 수가 있는가. 최소한 그건,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노라면, 절대로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그분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자들이, 주의 이름을 내세워서는, 그토록 오만방자하고 지독한 짓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여직껏 성화되지 않은 내 영혼의 처참한 실체다. 내가, 이리도 죄가 많다. 이미 지은 죄로도, 이미 내 안에 남은 죄로도 무거워서, 새로운 죄를 짓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할 정도로.




나는 길거리에 100만원이 담긴 돈이 떨어져 있고, 그 자리에 아무도 없다면, 나는 기뻐하기는커녕 먼저 한숨부터 쉴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기도드릴 것이다.


"주님,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내가 이 돈을 주인에게 되찾아주실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토록 뻔히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나를 시험하시나이까. 내가 주인에게 돌려주면서도, 내 삶의 현실적인 시련과 고난 앞에서 참으로 슬프고 외롭고 쓸쓸하나이다. 그러나 그 슬픔보다도,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은 내 열망이 더 크기에, 결국 당신의 명령을 따르겠나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그리 행하리란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나는 세상의 처벌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으되, 오직 주께로부터 심판을 받음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결코 나를 심판하지 않으시며, 어떤 길을 걷게 하시더라도 끝내 성화케 하시는 방향으로만 인도하실 것임도 이미 다 안다. 그러므로 내가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은 곧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아니요, 내 자신이 거창한 도덕심이 있거나 대단한 영웅심이나 정의감 따위가 있어서도 결코 아니요, 다만 그분께서 슬퍼하시는 모습을 한시라도 보는 것이 내 가슴 안에 불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견딜 수가 없음이요, 나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모습만을 보고 싶은 내 열망이 내 가슴 안에 불덩어리처럼 뜨겁기 때문이다. 나는 이기적인 놈인 것이다. 내 사랑하는 분을 그렇게라도 느껴보고 싶은.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분은, 지금은 육신으로 계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내가 행하고 실천해야만, 그분이 내게 임재하심을, 또 그분의 존재를 내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를 만난 자는, 주의 뜻이 곧 나의 뜻이요, 주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가 된다.


그러므로, 그분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과,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이, 하나의 마음이 된다.




내가 성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가장 큰 확신, 증거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사실은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지만, 실제로 주께서는 나를 자녀로 삼지 않으셨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성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믿지만, 정작 그 주인이신 주께서 보시기에는 길을 전혀 걷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역행하고 어긋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는 고작 몇 발자국 먼저 걸은 자로써, 몇 가지의 내 나름대로의 확신의 근거를 갖고 있다. 이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고자 한다.



첫째, 성화의 과정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다.


표면적인 마음은 당연히 힘들고, 슬프고, 답답하고, 우울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그렇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시련 가운데에서 담대한 자는 미친 놈이다. 고난을 받을 때는 울고불고, 짜증도 내고, 비명도 질러야 한다.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나로 인하여 주님께서 기뻐하고 계신다"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확신하거나 심지어 "체험"할 때도 있다.


그것은 매우 일상적이고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 임한다. 결코 거창하고 화려한 계시나 환상 따위로 임하는 게 아니다. 일상 속에서, 그저 평범한 선행을 베풀 때, 혹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그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내게 선을 행할 기회를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느껴지며, "아, 지금 그분이 와 계시는구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구나. 내게 기회를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확신으로 느끼며, 또한 나아가서 그분의 뜻대로 행하고 조용히 물러났을 적에, 세상으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표면적인 마음은 외롭고 쓸쓸할지언정("도대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단골 대사다!), 마음 깊은 곳의 영혼은 느낄 것이다 : "주님께서, 지금, 나를 보고 계신다. 내게 임재해 계신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분께서 나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계신다!" 그것은 주관적인 감정 따위가 아니다. "믿는 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재"다.


이것은 결정적인 증거이자, 매우 중요한 영적 감각이다.


"그분께서 기뻐하시는가?" 이것을 아주 예민하고 민감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영적 감각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하듯이, 이러한 감각이 생겨날 것이다.



둘째, 성화의 확실한 증표는 "상태"가 아니라 "의지"에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다수 성도들은 나의 "상태"에 집착한다. 지금 내 마음이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고, 순결하고, 절실하고, 고귀해야만, 충분히 성화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교만"이다. 자기 의(義)이다. 내가 옳다, 내가 잘났다, 내 힘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는 교만.


그러나 상태는 중요하지 않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한 음성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분의 의지는 절대적이다. 그분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우주는 즉시 빛을 "만들었다." 그것이 그분의 의지다. 그분의 의지는 곧 창조이다. 그런 분에게, 상태가 중요하겠는가? 만약 나의 상태가 부정하다면 그분은 긍정케 만드실 것이고, 나의 영혼이 어둡다면 즉시 밝게 만드실 것이며, 내가 자격이 없다면 자격을 주실 것이고, 능력이 없다면 능력을 주실 것이며, 지혜가 없다면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상태"는 중요하지 않다.


그분의 의지가 드러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시간"이 임할 적에는, 하루아침에 천지개벽하듯이 삶이 변화한다. 비록 나의 눈에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처럼", 수십 년이 걸려야만 가능할 것 같은 일들도, 그분의 의지가 드러날 때에는, 하루 아침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모든 것들이 즉시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또힌 믿는 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이다.


그렇기에, 성화의 증거는 상태에 있지 않고, 바로 "의지(will)"에 있다.


의지란 "내 힘으로 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의지란, "소망"이다. 바라는 것, 원하는 것, 바로 목적이다.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바로 이것이다.


내 마음이 어두울 수 있다. 그러나 "밝고 선한 마음을 바라고 원하는 것"은 나의 의지이다. 지금 밝지 못하더라도, 밝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내 영혼이 죄에 묶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르기를 소망할 수는 있다.


삶의 시련과 고난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온통 힘들고, 그것들을 하루라도 빨리 치워버리고 싶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인 채로, 여전히, 변함없이, "그럼에도 주님, 제 뜻대로 마시고, 나를 성화케 하시는 당신의 뜻대로 나를 이끄소서. 내게 더욱 시련과 고난을 주소서"하고 의지적으로 '바라고 원하고 소망할' 수 있다.


선을 원하는 마음, 빛을 원하는 마음, 빛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것을 "내 의지"나, "나의 선한 본성"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건 인간성이 아니라 인간 안의 "신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태가 아니라 의지만을 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다. 죄인과 악인 중에서도 "회개를 원하는 자", 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만약 내 눈으로 보기에 지금의 내가 아무리 처참하더라도, 결국, 끝에서는 변함없이 그분을 믿고자 하고, 그분을 사랑하고자 하며, 이 길을 계속 걷기를 소망한다면, 나는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셋째, "믿음"의 진실함이다. 성화의 길에서,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더욱 깊어진다.


의심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자녀가 아닌 자들은 의심할 때 믿음이 흔들리지만, 주의 자녀인 자들은 의심을 통하여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진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고, 신비롭고 기묘한 일이다.


삶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 주를 사랑하는 마음, 주를 믿는 마음, 주께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그분과의 하나됨, 그것은 더욱 깊고, 친밀해지고, 진실해질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 자체가 우리들의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사랑할 때, 그것은 이미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이며,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증거다.




종교는 중요하지 않다. 신앙만이 중요하다.


"영혼이 성장하고 생육하고 변화하고 완성되기를 바라고, 원하는 마음"을 가져라.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있더라도, 그 바라는 마음, 소망하는 마음, 그 자체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빛을 바라고, 선을 원하고, 사랑을 소망하라. 그것만 하라.


그리하면 나머지는, 우리들을 통하여 그분께서 다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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