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명, 서로 사랑하는 것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했던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여전히 지상에 어두움이 깊다. 세상은 갈수록 어두워져 가며, 밤은 점점 깊어진다. 나는 내 스스로의 짐을 짊어지고 내 생의 시험 하나조차도 온전히 통과하기 어려운 탓에, 그분의 시선이 이르는 곳을 뒤쫓기가 매번 힘이 들고 심령에 민망할 적이 많다. 그분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저 먼 곳까지 임하실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義)를 향하고 계시지만, 내가 그분께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나의 힘듦이고 나의 민망함이며 나의 시험의 무게일 뿐이었다. 그 시차(時差)가 언제나 내게 부끄러움이며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분의 모든 생애는 그 죽음의 순간까지도 아버지와 함께셨고, 아버지의 뜻과 하나되어 계셨다. 나는 그 하나됨의 신비를 증언하는 요한복음의 말씀들을 종종 그분께서 임하시는 때에 목격할 때마다, 내 가슴 안에서 일렁이는 이 심정을 차마 말로 다 헤아리기가 어렵다. 가슴으로 깊이 체험하고 교감하여 온전히 하나된 것만이 제대로 된 이해(Understanding)이고, 그저 지식이나 이론이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고 믿을진대, 나는 아직도 그분의 하나됨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생에 생을 넘어서 영원히 내 영혼이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순환하면서 끝없이 묵상하며 가까워져 갈, 영원하고 유일한 관상기도의 주제는 "하나됨의 신비" 그 자체일 것이다.
참 희한한 것은, 나는 언제나 먼저 체험하고, 나중에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 나는 직장에서 작은 고민이 있어서 그 당일을 앞두고 그분께 기도드렸다. "내 마음대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이에 관한 모든 것을 주께 맡기오니,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주소서. 당신께서 말씀만 하시면 내게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날 내가 염려했던 것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기쁘고 평온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점심시간에 조용히 산책하는 길에,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모녀가 서로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는 것을 보았고,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분의 음성을 느꼈다. 내게 익숙한, 그러나 더없이 기쁜 그 고유한 느낌과 감각을 나는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나 실례가 될까 하여 잠시 지켜보다가, 나는 다가가서는 "사진 찍어드릴까요?"하고 여러 각도로 (비록 실력은 없지만, 성심껏)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찍어드렸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조용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이상하게도 그분께서 내 발을 붙드시는 것 같다, 는 느낌을 받았고, 그때에 나는 헤아릴 수가 없는 심정으로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 "주님, 내 발이 이토록 더럽습니다. 내가 이토록 죄인이니 당신께 이러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 순간에, 그 작은 선행이라도 그분을 위한 사역이 될 수 있음에 기뻐하는 마음과, 그분의 임재에 한참이나 빠져들고 몰입하는 기쁨과, 고요한 평화와, 또한 그분께 대한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마음들이 뒤섞였다.
그리고 이제 요한복음 13장을 보니, 거기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대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은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실천하는" 순서가 익숙하다. 그러나 내게는 늘 이러했다. 먼저 행하여 경험한 다음, 그 뒤에 말씀과 배움과 이해가 뒤따랐다. 이것이 그분께서 자녀들을 가르치시는 방식이시구나,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나는 알게 되었다. 제아무리 이론을 주구장창 가르쳐봤자, 결국 그 이론으로 사람의 심령을 흔들지 못한다. 사람이 무릇 진실로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성례전적 전통이라도 결국에는 무의미한 겉모습의 흉내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며, 결국 임재와 역사의 통로는 온전히 마음을 다하는 믿음, 그 하나인 것이다. 이에 그분은 먼저 나의 더러운 마음을 친히 씻기셨고, 그제야 나는 "온전히 마음을 다하고, 진실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겨우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 체험한 다음에야, 비로소 내가 예전에는 얼마나 더러운 마음이었는가, 부끄러운 마음이었는가, 하는 것을 선명하게 자각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분의 의지이셨다. 그분께서는 내 마음이 더럽다고 하여 혼내지 않으셨고, 꾸중하지 않으셨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위를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비판하지 않으셨으며, 그저 아무 말 없이, 언젠가부터 내게 임하셔서는, 내 삶의 과정들을 함께하셨고, 나의 생애의 시간들을 통하여 그분 자신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분의 생명을 통하여 내 영과 영혼과 자아와 마음과 몸을 거듭나게, 다시 말해 "깨끗이" 되도록 씻어주셨다. 그런 다음에야, 말씀을 내게 보내셔서, 이와 같이 가르치신다. 그리하되, 나는 그 말씀들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일렁이고 내 마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됨이란 이런 것이며, 신성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다만, 그분께서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하나됨의 신비 안으로 나를 초대하셨고, 나의 손을 잡고, 내 생애의 시간과 공간들 속에서 신성이 임재하시도록 성령을 보내셨다. 인간이 인간을 가르치는 방식은 결국 죄악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다만 그분께서 인간을 가르치시는 방식은 더없이 의롭고 고귀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분께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성령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그 시간들이 깊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인간적인" 방식에 대해서 깊은 회의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사실(fact)이다.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행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지은 모든 것들은 이미 행한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지독하고 악랄한 것이다. 우리는 숱한 죄를 지었고, 죄 지은 자에게 기꺼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는 이 지구상에서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뿐, 나는 이미 누군가를 살인했고, 누군가를 죽였고, 누군가를 고문하고, 학살하고, 심지어 편안한 죽음이라는 마지막 자비조차도 비웃고 짓밟았으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죽어가는 자의 그 마지막 순간을 나의 욕망과 교만의 충족으로 삼았다. 나는 지금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임재는 곧 나의 의식이 맑아지고 정신이 깊어지는 성화의 과정이다.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나는 내 안에도 그러한 어두움이 있는 것을 본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았을 뿐, 결국 그 죄와 악의 본성이 내게도 있다. 아니, 오히려 악을 행한 자들은 겉으로 드러내었으되, "아닌 척" 교묘하게 감춘 그 보이지 않는 무의식적인 의도와 심성은 더욱 악랄하다. 나는 기회와 환경만 주어진다면, 수백만 명을 죽이고 학살한 독재자가 될 것이고,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기회와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나는 수천만 명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전쟁의 집행자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죄를 지었을 것이다. 지옥으로 갔을 것이다.
결국, 그 앞에서, 내 손에 묻은 피의 "양"이 조금 적다고 하여, "더" 많이 묻은 자를 재단하고, 심판하고, 이로써 자기를 정당화하려 드는...... 그 "인간주의적"인 관점과 사고와 집행 방식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탄생과 삶과 늙어감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거룩하고 실존적인 그 순간들을 마주할 적에, 대관절 그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나는 참으로 덧없고, 허무하고, 허망하기 이를데 없노라고 그렇게 느끼고야 마는 것이다.
조건과 환경과 물질적 현상과 같은 것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치졸하고 악랄하기까지 한 변명에 불과한지를, 나는 절절하게 느꼈다. "내가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의롭고 정당한가?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자기 뜻과 무관하게 전쟁에 끌려가서는, 서로 다른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죽임당하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또 누군가는 죽였다는 죄의식과 가책 속에서 영혼이 죽어가는, 그 짓들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나 홀로 "정당하고 의롭다"고 한들,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나 홀로 내 영혼이 "깨끗하고 순결하다" 한들, 그게 대관절 무슨 의미라도 있단 말인가. 다른 모든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심지어 죽어서조차도 사람들로부터 "귀신"이라 하여 비난 받고 회피하고 "정화 대상"이 되어가는데, 내가 죽으면 나는 그와 같지 않을 것인가. 다른 영혼들이 죽어서 지옥에 가는데,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나 홀로 명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됨의 신비 안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평화를 누려봤자 무엇한단 말인가. 심지어 그 평화와 신비는 본래 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이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지를 아는가. 나 또한 이제 서른한 살의 남성이지만, 대개 남자들이 이러한 "거룩함"에 대하여 대단히 무감각하고 무지하며, 노골적으로 말해서, "철이 없다."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에 대해서 민망해할 줄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인간의 생애의 "신성한" 사건과 시간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며, 또한 마땅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기도조차 하지 않는다. "하나님, 내가 이토록 무지하고 어리석습니다, 당신의 임재와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귀를 허락해주소서, 그 순간을 내가 마땅히 알고, 또한 기뻐하며 함께할 수 있게 하소서"...... 메달라지도 않는다. 소망하지도 않는다. 그리하므로, 그 무감각함으로 인하여 방치하고 외면한다. 오직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류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아야 할 그 작은 생명이, 고작해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들 곳"이 없다는 지극히 헛되고 작은 이유만으로, 태어나자마자 죽어가야 하는 대단히 놀라운 사건들이 지금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심지어 아주 흔하다. 나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내 탓이야?" 그리고 이어서, 나는 항변했다 : "그건 인류 집단의 구조적 문제지, 내 탓이 아니야." 그 말은 상식적으로 옳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지독하게도 부끄럽고 민망한 말이다. 그리 말할 적에, 내 안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그분께서는 비록 나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나, 다만 나로 인하여 크게 "슬퍼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이 슬퍼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분께서 나로 인하여 슬퍼하시는 것을 내가 느낄 때, 나는 내 가슴 안에서 불덩어리가 있는 것 같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집단성 뒤에 비겁하게 숨는 자, 숨어서는 자기는 깨끗한 척, 위선을 부리는 자. 그게 나이고, 내 실체이다. 여전히 그건 살아 있다.
사람의 육신이 잠들고 영혼이 안식하는 순간,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그 순간이 또한 얼마나 거룩하고 신성한지, 또한 거룩하고 신성"해야만" 하는지를 아는가. 그러나 또한, 나는 대단히 무지하고 어리석으므로, 그 죽음의 순간들이 단지 "죽어간다"는 이유만으로도 다른 모든 조건들을 불문하고 그 자체로 모든 인류의 엄숙한 위로와 영접과 함께함과 기도와 묵상을 한 몸에 받아야만 함에도, "비용"과 "효율"이라는 이름 하에, 그 마지막 순간마저도 결국 덧없고 허망하게 잊혀져가는 그 순간들을, 나는 보았다. 장례식장 안에서, 고인을 위하여 축복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저 돈 몇 푼 냈다고 "나는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 채로, 육개장이나 먹고 소주나 마시고는, 취해서 입으로 죄를 짓고 혀로 악을 행한다. 아무도 그 순간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자기의 종교적 의례와 율법 때문에 절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작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아무도 실천하지 않는다. 관이 없어서 "골판지 관"을 대량 생산하고, 자연으로 되돌리는 대신에 "한꺼번에 대량으로 불태워서 질량과 부피를 압축"하는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이유 하에, 획일적인 방식으로 마치 "공정을 처리하듯" 그 과정은 집행된다. 그것은 감히 말하건대, 폭력이다.
늙어감은 어떠한가. 본래 늙어감은 축복이다. 삶의 경험을 통하여 지혜가 쌓이고, 또한 늙음이라는 것은 곧 지상에서 멀어지되 하늘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며, 젊은이들은 그 "하늘의 지혜"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늙은이들은 장차 뒤를 이을 세대들을 위하여 섬기고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성심을 다하는 아름다움은 다 사라지고, 늙은이들은 지혜 없이 무지한 채로 늙었다는 것 자체로 교만하며, 아랫사람들과 젊은 세대들의 고통과 비명을 외면하고 비웃고 조롱하며, 또한 젊은 세대는 나이 들고 늙어가는 이들을 대할 적에 마치 자기는 평생 늙지 않을 것마냥 그토록 어리석은 행태를 보인다. 도처에 죄악이 만연하다. 이제, 늙어감은 그 자체로 죄가 되었다. 늙은 죄. 늙어서, 다른 가족의 짐이 된 죄. 아마 안락사가 합법화된다면, "눈치껏 먼저 죽어야 할 도의적인 책임" 같은 게 생겨날 것이다.
탄생과 늙어감과 죽음은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거룩하고 신성해야 마땅하거늘, 그 순간마저도 결국 인류는 병들어가고 있다. 폭력이 만연해지고 있다.
이 기나긴 이야기 끝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강요가 아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희생할 수는 없다. 당장 출근을 해야 하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얼만큼 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을 대할 적의 내 마음, 말이다. 슬퍼하는 이를 대할 때, 그 슬픔의 이유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조언하기에 앞서서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마음. 절망하는 이를 대할 때, 그럴듯한 말을 떠올리기에 앞서서 그와 함께 절망할 수 있는 마음. 가난한 이를 대할 때, "국가와 사회의 구조적 문제" 따위의 덧없고 허망한 것을 떠올리기에 앞서서, 당장 그에게 따뜻한 물과 먹을 양식을 전할 수 있는 마음. 하다못해, 다른 이들을 위하여 조용히 마음으로 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는.
"내가 하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치졸하고 악랄한 변명인지를,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반드시 죄인일 수밖에 없는" 그 인류 공통의 죄와 악의 연대에 대하여,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되 다만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를, 나는 항상 그와 같이 기도한다. 나 혼자 구원받았다고 하여 지상의 만연한 죄와 악을 외면하거나, 오히려 이를 근거 삼아서 나를 정당화하지 않으며, 다만 죄를 함께 나누고, 악에 대한 징계와 처벌과 대가를 함께 감당하며, 인류의 짐을 함께 지고, 마침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지상의 내 형제들이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될 그날을, 나는 꿈꾼다.
오지 않을 꿈이다. 소위 "합리주의자"들이 뭐라고 말할지, 나는 이미 안다. 미안하지만, 내가 한때 "그쪽 진영"의 가장 냉혹하고 철저한 놈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지 않을 꿈이라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의 본성이 본래 악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나는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열망하며,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그 길을 갈 것이다. 불가능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나, 모든 형제들을 통하여 그분께서 일하실 때에는, 그분의 "이름과 의지"로는, 반드시 불가능조차도 가능케 되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나는 그리 믿기 때문이다.
"신존재증명"은 틀렸다. 신을 향하여 이와 같이 기도하지 말라 : "도처에 악이 넘쳐나는데, 도대체 당신은 뭐하고 있단 말입니까?"
이제 나는 이에 대하여 가장 명확한 답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사,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케 하셨으며, 이를 통하여 하나됨의 신비 안에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하늘의 가장 큰 영화와 축복을 허락하셨다.
신은 그동안 무엇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것이 그대의 질문이라면, 이에 내가 답하겠다.
그분은 세상을 사랑하사 외아들을 보내셨고, 외아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 그대도 양심이 있다면, 인류 집단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저질러온 죄와 악의 처참한 실태를 볼 수 있지 않은가.
신은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방치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그대의 질문이라면......
나는 답하겠다.
나의 주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다만 고통 받는 낮은 자들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사, 나를 대신 보내셨다. 나는 내 삶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과 함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말할 것이다.
또한, 그분께서는 그대도 부르고 계신다. 그대를 진실로 신뢰하셔서, 그분 대신 그대가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신다. 도처에 그대의 축복과 구원의 손길을 갈망하는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할 일이 없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일거리"는 넘쳐난다. 그러나 일할 자는 언제나 매우 적다.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신을 탓하면서 다만 죄악 속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신의 사자(使者)가 되어, 신과 함께, 그대의 삶을 통하여 신의 역사를 이루어갈 것인가.
나는 이미 응답했다. 그리고, 내 삶을 통하여, 그 책임을 그분과 함께 나누고 있다. 비록 나는 그분께 짐만 될 뿐이요 다만 그분께서 모든 짐을 다 지시지만, 그럼에도 이제 나는 그 사실에 가슴 아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그분은 태양이시요 나는 반딧불이이니, 나는 다만 그분과 동행하며, 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길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은 먼저 깨어난 자들을 기꺼이 신뢰하사, 우리들을 세상의 어두움 속으로 보내실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가서 할 일은 매우 단순하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
결국, 이것이 유일한 진리이며, 구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