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열망, 기쁨

by 생명의 언어


'죽음'과 '사망'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다르다. 죽음은 근원이요, 어두움이다. 사망은 어두움의 통치 방식, 곧 "지배력"이다. 그리고 본질로서의 죽음과, 사건으로서의 죽음도 다르다. 우리는 대개 사건으로서의 죽음, 정확히는 나의 육신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만을 죽음으로 특정하여 이해하고는 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육적(물질주의적) 사고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건으로서의 죽음이 육신의 생명력이 다하는 것이라면, 본질로서의 죽음은 무엇인가? 바로 영(Spirit)이 죽는 것이다. 영이 죽는다는 것은, 곧 정신이 죽는다는 것이다. 정신이 죽는다는 것은, "상승하려는 의지"를 일으키지 않으며, 나태하고, 게으르고, 교만하고, 욕망에 휘둘린 채로,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자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무엇을 추구하는가, 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로 가는가, 도 부차적인 문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본질적인 운동성, 곧 "상승 의지(열망)"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 더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 존재와 삶의 변화와 성장과 완성에 대한 방향성 자체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가 나를 완벽하게 지배할 때, 나는 "공포와 욕망이 지배하는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회의주의"나 "염세주의" 등으로 부르는 마음, 성향이다. 현실에 안주하며, 정작 자신도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 주제에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비웃고 모욕하고 심판하려 듦으로써, 이를 근거로 하여 타인을 억압함으로 인해서만 자기를 높일 수 있다고 여기는 정신 상태 말이다. 이때에, 그는 하나님의 법이 아닌 "죽음의 법"을 따르게 된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거나, 삶은 괴로운 것이라거나,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재능과 자질과 능력이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다거나, 그러한 "지식"들. 그리고 그것들을 "진리"로 여긴 채로, 아무런 저항하려는 시도조차도 다 잃어버린 상태.


말하자면, "마음(mind)이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진 상태의 영(Spirit)"이다. 영이 그 주권을 상실한 채로, 노예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나아가, 자아는 무의식의 공포, 두려움, 불안의 에너지에 의하여 지배당하며, 어두움의 "지배력"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고, 마음은 빛이 아닌 어두움의 작동 방식과 구조와 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인다. 자아와 마음이 죽음의 통치에 굴복하고 사망의 권세에 속박되니, 영혼은 억압당하고, 영은 수치를 당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영적 사망"의 상태에 놓여 있음에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것을 제대로 인지하거나 실감하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에서, 죽음의 통치는 완벽하게 성공했고,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는 날이 갈수록 위세를 떨치니, 어두움의 군세(軍勢)가 사방을 향하여 뻗친다.




유감스럽게도 자아(ego) 자체가 이미 죽음의 통치 아래에 놓여 있다. 이때의 자아란, 개체의식 자체를 의미한다기보다, 자기가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나"라는 인식을 말한다. 그리고 "나"가 세계의 중심이자, 주인이자, 가장 최상위 심판자(인식과 분별과 통제의 주체)라는 "주권의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아가 주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며, 이에 기독교적인 "순종"을 어리석고 열등한 것으로 비판한다. 사실, 이 중에서 일정 부분은 옳은 말이다. 다만 그들은 "나"라는 존재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 자체가 그들이 "나"의 존재를 제대로 탐구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로, 내가 주인이라 여긴다. 그렇다. "나"는 주인이다. 그런데, 수많은 "나"들 중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마음이 주인인가? 자아가 주인인가? 무의식이 주인인가? 표면적인 의식이 주인인가? 영혼이 주인인가? 구체적으로, 영인가, 혼인가? 영 그 자체인가, 아니면 영의 에너지인가?


이러한 질문들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자아의 "주권의식"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말장난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명확하게 밝히겠다. "내 스스로 중심을 잡고,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간다"고 말할 때의,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주권의식에서, 주권을 쥔 최상위의 주인, 곧 "상위 자아"는 영을 말한다. 그런데 이때의 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그 에고(ego)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다.


이제 이 문제의 핵심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는 나의 주인이 맞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진정한 주인(영)이 아니라, 그 주인을 섬기는 도구이자 시종이자 하인일 뿐인 에고(ego)나 마음(mind), 내지는 무의식 등을 진짜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이 무지이고 어리석음이다. 모든 고통은 어리석음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 가짜 주인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는 것과, 그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내적, 외적 행위들이 전부 다 "죄(sin)"이다.


그러나 유심히 지켜보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자아이고, 자아를 움직이는 것은 무의식이다. 이와 같이 점진적으로, 하위 자아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상위 자아이다. 의식을 운동케 하는 것은 영혼이고, 영혼을 운동케 하는 것은 영이다. 앞서, 영이 나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틀렸다. 영 또한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의 주권은 무엇으로 인하여 주어지는가? 바로 성령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부", 즉 영이 열리고 작동한다. 그 중심부에 계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 곧 "인격적 신성"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마침내, 초월과 영원으로 계신 분,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 영원과 초월로 계신 분...... 창조주, 절대자, "성부" 하나님께로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수직선"이요, "하나님의 시간", 곧 카이로스다. 하나님의 시간이 열릴 때에, "나"의 안에서 체험되는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육적인 시간이 아니요, 수천 년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의 시간" 안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대화하고, 함께한다.


결국, 죽음의 본질은, "위(상위 자아)와 아래(하위 자아)의 분리와 단절"에 있으며, 더 넓게 본다면, "나"와 "하나님"의 분리, 단절에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원죄다.


영의 죽음,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지상의 시간", 곧 크로노스 속에 갇혀 있을 때, 자아는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그 무엇으로부터도 담보하지 못한다. 유감스럽게도 의심을 통하여 궁극자에 도달하고자 했던 그 누군가는, 최종적인 의문을 던지지 못했다.


"왜 내가 의심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는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 사건, 현상에는 "의미"가 있다. 창조된 것, 지음받은 것으로서의 "의도"가 있다. 다만, 절대 다수의 경우에는 이것이 인간의 지적 수준 내에서 해석되지 못하기에, 우리가 그것을 다만 "우연"이라 부를 뿐이다. 초등학생이 열역학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물리학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논리를, 인간은 자기의 지적 수준을 넘어서는 초월과 영원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못한다. 아니, 사실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궁극자"의 위치를 계속해서 독점하고 있어야만 하므로.


지상에서 하나님과 분리된 자아는 존재론적인 "징벌", 곧 인간 존재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말미암은 불안과 슬픔과 공허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불길에서 처참하게 비명을 질러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들이 이미 극도의 높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으므로, 사탄은 구태여 유치하게 물리적인 지옥이라는 시공간을 만드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인간의 영을 제한하고 억압함으로써, 보이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지옥에서 구원받을 가능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사탄은 참으로 영리하고, 철저하다.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전략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구원"을 말하는 복음, 곧 빛의 통치에 관한 한, 인류는 여직껏 지적 유희에만 천착해왔을 뿐, 유구한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전통을 온 인류에게로 전파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종교 혁명이라는 이름 하에, 문자주의와 교리주의라는 지성의 오만을 더욱 강화하는 퇴행적 신앙으로 되돌아가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러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실태에 참으로 슬퍼한다. 이것은 다만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하나됨의 신비" 안에 어두움의 통치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영원한 생명을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끔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승리의 길이 이미 마련되어 있건만, 오늘날 그 누구도 "요한적 신앙"을 말하지 않고, 설령 말한다 하더라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관심이 없다. 하나되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결국 같은 뜻이건만,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는 모두가 집착한다. 현실이 그러하니, 천국 입장료를 받는 교회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룬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진실을 말하는 교회들은 언제나 헌금이 부족하여 교회의 운영조차도 위태롭다.


교회 바깥의 삶과 일상 속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하며, 나의 일상이 곧 성화의 과정이며, 내 삶과 일상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고 말한다면, 교회가 장사가 되겠는가. 더 나아가서, 간편하게 "천국 입장권" 받고 서둘러 세속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수많은 성도들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겠는가.


복음의 기쁜 소식은 여전히 그 전파와 확장의 속도가 느리기만 하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리도 좋아하는 저 사도 바울조차도 여러 나라와 민족과 전통과 문화에 맞추어 이방인의 언어를 차용하고 그들의 상징과 그들의 도구를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하였건만, 이제는 이방인더러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언어와 문화에 들어오라고 소리쳐 겁박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입는 옷이 당연히 불편하기도 하련만, 불평하는 자들은 무참히 외면당한다. 그 옷이 처음부터 편안한 자들은 이미 다 울타리 안에 들어왔고, 이제 불편하여 입기 힘든 자들을 그 누구도 애써 울타리 안으로 들이려 하지 않는다.


거듭 말하듯이, 죽음과 사망의 통치 전략은 오늘날 완벽하게 성공했다.




현대인들은 죽음을 금기시한다. 삶과 일상 속에서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건 자체를, 쉬쉬한다. 외면한다. 없는 것처럼 굴다가, 죽음에 관련한 순간들이 찾아오면, 정해진 형식과 의례와 전통대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집행하고는, 다시 "없었던 일"로 취급하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의 지배력은 곧 "공포"에 있는 것이다. 그 공포의 실체는 무엇인가? "존재 의미의 상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나의 존재는 그저 우연의 연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 우주에서 나는 지금 즉시 없어지고 사라지더라도 아무런 영향조차 주지 못하는, 그러한 열등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 또한,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 그 자체가 두렵다기보다는, 죽음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극심한 허무와 공허에 대한 두려움이다.


왜 나의 소멸이 그토록 두려운가? 어차피 얼음의 형상은 녹아서 물이 됨으로써 "죽고", 물은 증발하여 수증기가 됨으로써 죽으며, 수증기는 구름이 됨으로써, 구름은 비가 됨으로써, 비는 강이 됨으로써, 강은 바다가 됨으로써...... 죽음은 "변환"이며, 각각의 변환 과정들은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우리들의 죽음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어" 영원히 살아간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나"만이, 이것을 모른다. 부정한다. 외면한다. 스스로 그 연결을 끊는다.


나의 소멸이 두려운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서의 삶에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서의 삶이 슬프고 공허하고 불안하기에, 이대로 곱게 죽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은 이 어두움의 구조와 반복 안에서는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외면하기 위해서 "미래에 대한 투사"로 바꾼다. 비록 지금은 불행하지만,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이라는 궁극적인 보상을 받을 것이다. 천국 역시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기로 예정된 "시기"가 오기 전에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의 본질이다. 살아서의 삶의 "의미"를 상실했기에,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곧 존재의 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자아와 마음은 늘 불안하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죽음을 외면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 매 순간 시달린다. 인간 존재의 거대하고 화려한 탑은 공포와 불안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으며, 그것은 삶에서 찾아오는 시련에 시시각각 흔들리고, 마침내 최종적인 고난, 곧 죽음 앞에서 완벽하고 처참하게 무너진다. 탑에 벼락이 내리꽂히고, 왕관은 박살나며, 곳곳에 불이 붙는다.


인간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그 무엇도, 죽음 앞에서 위세를 떨치지 못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쌓고, 구축하고, 이룬 모든 것들은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를 마주할 때, 처참하게, 아주 지독하도록 처참하게 박살이 난다. 무너지고, 깨지고, 엎어지고, 짓이겨지고, 짓밟힌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후회하고 정신을 차리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어두움이, 그의 영혼을 가지고 놀 것이다. 사탄의 장신구와 소장 목록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신앙은 실존적이어야 한다. 사망에 관한 한, 신앙은 "나의 마지막 날에 대한 준비 과정"으로 여겨진다.


"나"라는 존재의 최후의 심판, 마지막 날은 바로 나의 죽음이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즉시 죽을 수 있다. 전혀 예고되지 않은 방식으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때에,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죽을 수 있다. 평생 동안 쌓고 준비하고 노력한 것이, 한순간의 허망한 죽음으로 몽땅 좌절되고 잊혀지고 썩어 없어질 수 있다. 나는 세상에 홀로 태어났으므로 홀로 죽을 것이며, 그 누구도 나의 죽음, 나의 끝을 함께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죽음이다. 나의 마지막 날이다.


그 앞에서, 우선은 솔직해져야만 한다. 처음에는 내 안의 어두움이 불길처럼 일어나서는, "나는 다르다"며, "나는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며 소리치고 반항할 것이다. 어찌하려 하지 말고, 다만 그대로 두라. 시간이 지나면 그 불이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고요가 찾아오고, 그 가운데에서 영이 순수하게 흐르기 시작하면, 문득 그대는 깨달을 것이다. "아, 나는 나의 마지막 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구나. 이것이 나의 현 주소구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 그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어떻게 올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종적인 시험이다. 성화의 "종결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에 평생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음성한 번 듣지 못한 채로" 사랑하여 왔던, 우리들의 주, 우리들의 하나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직접 뵙게 될 것이다.


그날이 다가올 적에, 인간으로서의 나의 모든 업적들은 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나의 육신이 무너질 것이고, 나의 마음이 저물어갈 것이며, 나의 강건했던 의지는 낮아지고, 나의 선명했던 정신은 흐려질 것이다. 만약 평생에 걸쳐서 성화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때에, 내 안의 어두움은 그제야 고개를 치켜들리라. 그때에, 나는 추악하고 지저분하고 부끄러운 나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내게 되리라.


그러나 평생을 걸쳐서 자기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고 묵상해왔던 이들, 성화의 길고 고통스럽고 쓸쓸하고 영광스러운 길을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여 걸어왔던 자들은, 마침내 그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우리들의 영광이 더욱 높아지게 되리라. 죽음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내면의 평화는 더욱 깊어져만 가고, 성령께서 그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모든 날들과 모든 순간들을 곁에서 함께하실 것이며, 천사들이 시중하고, 나의 그리스도, 나의 왕께서 친히 나의 죽음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리라.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오면...... 나의 왕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리라. 부르시며, 말씀하시리라.


"......큰 소리로 외쳐 부르시되, OO아, 나오라."


라자로를 부르셨던 그 음성으로, 성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을 휘장처럼 두르신 채로, 온 우주에 울려퍼지는 압도적인 그 음성으로, 부활을 선포하시리라. 나는 그 순간에, 내 살아 평생에 치러왔던 성화의 시험들의 모든 보상들을 한 번에 받게 되리라.


그러므로, 준비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이제 공포가 아니다. 죽음은, 나와 내 형제들에게 "약속된 평화"이다. 그날, 우리들은 그분의 얼굴을 직접 볼 것이고, 그분의 품에 친히 안길 것이며,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할진대, 감히 죽음과 사망이 우리들을 털끝이라도 건드릴 수가 있으랴.




성령께서 내게 처음으로 들려주셨던 그리스도의 음성이, 그 말씀이 곧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25-26) 대개의 성도들은 이 말씀을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게 이 말씀은 그 자체로 믿음의 대상이었다. 아니, 애초에 나는 이 말씀을 보기도 전부터 "이미" 이 말씀을 믿고 있었다. 내게 이 말씀은 "해설"이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분이, 부활이시고, 생명이시며, 그분을 믿으면 죽어도 살 것이고, 무릇 살아서, 그러니까 이 생에서,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믿을 때, 나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태어나기도 이전부터, 나의 영 안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이 말씀을 "사랑"으로 이해했다. 내가 죽을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나의 성화의 길의 초기에서 나를 정말로 괴롭혔던, 절실한 문제였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그 어떤 능력도 없었고, 따라서 그분께 전적으로 메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분께 응답을 받았다.


놀랍게도, 죽음을 이기는 힘, 사망의 권세를 제압하는 힘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막연한 "신"에 대한 믿음은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 막연한 "신성"에 대한 체험과 학습은 사망을 제압하지 못한다. 오직, 인격으로서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교감할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인격적 신성"에 대한 사랑만이, 죽음을 이기는 힘이 되며, 사망을 제압하는 유일한 생명이 된다.


나는 느낄 수 있다. 지금도,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순간에, 죽음은 나를 이기지 못한다. 내가 그분을 사랑할 적에, 내 안에서 그분을 향한 사랑이 넘쳐흐르매 그 기쁨이 내 안을 환히 비추어 밝히므로, 사망의 어두움은 나를 조금도 어찌하지 못함을 느낀다. 내가 그분을 열망할 적에, 불안과 슬픔과 공허라는 죽음의 전략들은 그 위력을 상실하게 됨을, 나는 느낀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열망할 적에, 마침내 나는 죽음을 이기신 그분의 의지와 하나가 되며, 그분의 권세와 영광과 하나가 된다.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은, 곧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드러나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감히 죽음과 사망이 그분을 이길 수 있으랴.


오히려,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므로, 살아서의 생애 동안에 그분의 뜻을 받들고 섬기고 실천하여 행하면서, 그리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죽음이라는 약속된 평화가 주어져 있으므로, 나는 두려움 없이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축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나의 최종적인 증언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죽음을 능히 이긴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열망의 불꽃은, 사망의 권세를 능히 제압한다.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는 생의 지옥을 탈출하여, 살아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한다.



내가 먼저 보았고, 내가 먼저 경험하였으며, 그분께서 내게 먼저 이루셨다.


내게서 이루셨을진대, 어찌 다른 이들에게도 이루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



"그 이름을 믿고, 그분의 인격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쉽고 단순하고 확실한 구원의 길이 여기에 주어져 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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