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진실로 소망하는 것은 단 두 가지 뿐이다.
①. 이 생에서 죽기 전까지 인간이 되는 것.
②. 가능하다면, "선한" 인간으로 죽는 것.
나는 지금 농담하는 것이 아니다. 고리타분하고 뻔한 말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말장난을 싫어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선문답이다. 왜 그런 상징과 은유를 사용했는지를, 비록 해명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낱낱이 해명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게 깨달은 자, 곧 하나님을 만난 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성은 본래 신성의 다른 이름이다. 신성이 지상에서 육신을 입은 것, 그것이 인간성이다. 성부께서는 비록 존귀하시나 육신을 초월해 계시므로, 눈물 흘리는 자에게 다가가서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를 포옹하고, 그를 위로하며, 그의 영혼을 비추어 밝히실 수가 없는 분이시다. 용서하시기를, 내가 부족하고 가난하여 '할 수 없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성부께서는 그리하여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의지를 드러내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시며, 이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나는 이것을 떠올리고 묵상할 때마다, 내가 지금 누리는 신앙이 얼마나 위대하고 경이로운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내 영혼 안에 되새기고는 한다.
나는 아직 인간이 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언제나 내 가슴 안에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내 생의 곳곳에서, 내 삶의 순간 순간에서, 내 일상의 모든 사건들 속에서, 나는 여직껏 나의 죄성이 죽지 않아서 미쳐 날뛰는 것을 본다. 내가 지옥에 갈 것은 딱히 내게 슬프지 않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내가 슬픈 것은, 나의 죄성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내가 슬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나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슬퍼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나를 지옥에 보내심은 마땅하다. 그것은 본래 그분께 속한 권한이요, 또한 구태여 그분의 심판이 아니더라도 나는 원래 그곳으로 가야 할 운명이었다.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 노력으로, 그분께 가까이 가는 것이 얼마나 멀고도 험한 길인지를, 그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의 자력구원(自力救援)의 시간들이 그다지도 허망하고 부끄러운지를, 이제서야 더 늦지 않게 깨닫게 되어, 나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모르고 죽지는 않을 수 있으니. 내가 모른다는 것을, 그거라도 알고 죽을 수 있으니.
내가 지옥에 갈 것이 두려워서 신을 따른 적이 한 순간도 없다. 그곳에 가서, 나는 처참하고 부끄럽고 민망한 꼴을 보일 것이다. 고통에 울부짖고, 내가 이리 한평생 사랑했던 그분을, 고작해야 내 고통을 면하는 대가로 팔고, 또 팔고, 외면할 것이다.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악한 본성을 타고난 자로써, 존재의 본성이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신을 따른 까닭은, 나를 사랑하노라고, 나로 인하여 당신께서 크게 기뻐하시노라고...... 나를 향하여 환한 미소를 지으시던 그분의 모습을 내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그분의 표정을, 그분의 미소를, 그분의 음성을...... 내가 결코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거대한 기쁨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경이로울 수가 있구나.
나도......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고, 고귀하게 죽을 수가 있구나. 그러한 죽음이, 내게 허락된 것이었구나. 죽음과 사망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저토록 허망하게 살다가, 허망하게 죽는 것 외에,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면서 죽을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주어져 있는 것이었구나.
그 대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한평생 두 가지 뿐이었다.
①. 그분을 믿는 것.
②.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러므로, 내게 신앙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 그리스도교의 언어와 진리를 선택함은, 내게 그럴듯한 취미생활도 아니고, 남들이 물어볼 적에 내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답하기 위해 하나쯤 보험 삼아 들어놓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무의미함과 허망함과 쓸쓸함의 의미와 무게를 뼈저리게 느꼈고,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이 얼마나 처참하고 악랄한 적(敵)이 되는지를 애초부터 다 느꼈고, 인간에게 슬픔과 공허와 욕망이 얼마나 지독하게 고통스러운지를 어려서 이미 다 알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분이 내게 찾아오셨다.
오셔서는...... 다른 말을 않으셨다. 다만, "잠시 함께 걷자꾸나." 그 말씀뿐이었다. 걸으면서도, 그분은 말씀을 않으셨다. 오히려 내가 그분과 지금껏 '산책'하는 과정 속에서, 홀로 배우고, 홀로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분은 그저 자신의 존재를 내게 드러내셨다. 그 존재의 빛이 너무나도 내게 눈부셔서, 도저히, 배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분의 존재가 곧 영원이요 초월이라는 것을, 그분의 존재가 내게 곧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알았다. 나는 그분의 존재를 "규정"하거나 "해설"하거나 "정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어려서 깨달았다.
예수님이 성육신한 이후로 아무런 역사도 이루지 않으시고 홀로 그저 조용히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나는 그분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 나의 유일한 구원의 희망으로 삼을 것이다. 침묵하시고 조용히 여생을 마치시는 그분이시라 하더라도, 그분의 존재 자체가, 내게 곧 영원한 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분은 내게 점점 더 많은 말씀들을 하셨다. 구체적인 삶의 순간들마다, 나를 인도하셨고, 나를 이끄셨으며, 나를 통하여 그분의 의지를 드러내셨다.
비록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지금에서도, 나는 그분을 따른 것과, 나를 통하여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드린 것을, 여지껏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역사가, 이제는 그분과 나만 아는 그 역사가, 내게 유일한 살아갈 희망이요, 생명의 근거가 되었다. 내가 살아 있으며, 내 영혼이 "무의미"하게 "세계 내 존재"로써 던져지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내게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있다. 오늘날, 세상에서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오늘도, 직장에서, 삶의 순간 순간들에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는 슬픔과 억울함과 아픔을 가슴에 안고서, 결코 감당되지 않는 짐을, 결코 감당할 수가 없는 자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짊어지고 그리 외롭게 살아가는 그들의 생애가 얼마나 쓸쓸한지를 아는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의 아픔을, 함께하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다. 서로 짊어진 짐이 너무나도 무겁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 욕하고, 서로를 원수로 삼으며, 소리를 지른다. 부모는 짐이 무거워서, 자식은 죄의식이 무거워서...... 이 세상 모든 관계들이 그러하다. 나는 그 처참한 실태를 본다. 나는 그토록 가슴 아픈 모습들을 본다.
나는 묻고 싶다. 교회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자녀들의 모임 아니던가.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자녀들인 바,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여 이루는 자들이 아니던가. 그리할진대, 내가 참으로 한탄스러운 사실은......
"어찌하여 이 세상에서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자들이, 주저없이 교회의 문을 두드릴 수가 없단 말인가?"
신문지 한 장 덮고서 지하철에서 쓸쓸하게 추위에 떨면서 사는 자들이, 하루 동안 얼마나 비웃음과 모욕과 조롱과 심판당함의 폭력적인 언어와 행위들을 마주한 채로 하루를 감당하여 왔을지를, 나는 깊이 느낀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주제에, 그들의 아픔이 내 심장을 찢는다. 그럴진대, 그들에게 교회는 멀기만 하다. "주의 집"은 멀기만 하다......
그들이 교회에 발을 들일 적에, 교회는 "지저분한 행색으로 주의 집을 더럽히지 마라"면서 내쫓는다. 설령 마지못해 받아들이더라도, 그들은 "헌금을 내지 않으므로 교회에 효용 가치가 없어서" 눈칫밥을 얻어먹는다. 같은 성도들도, 나도...... 그들의 악취에 코를 막고, 눈총을 쏘아댄다. 눈총도, 총이다. 가슴을 꿰뚫는. 목회자는 신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와 교회의 영광을 드높이느라 정신이 없다.
가장 가난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슬퍼하는 자들이, 교회를 가장 두려워한다. 교회에 가기를 망설인다. 단죄당할 까봐. 심판당할 까봐. 꾸중을 듣고, 비난을 들을까봐.
믿는 자만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한다면, 어찌하여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단 말인가? 그분이 십자가를 지실 때는 오직 성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분을 믿지 않았는데.
나는 그 사실이 가슴 아프다.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의 의지에 충실하게 지금껏 순종했더라면, 내가 장담하건대, 지구상에서 굶주리는 모든 자들은 주저없이 교회를 찾았을 것이요, 삶에서 소외받고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자들은 모두가 주저없이 십자가 달린 집이면 어디든 찾았을 것이요, 삶에서 절망하여 의지할 데가 없이 벼랑 끝에 내몰린 자들은 전 세계 어디든 십자가 달린 집이라면 기꺼이 자신을 환대해주리라 믿었을 것이 아닌가.
오늘날,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 믿는 자들은 교회를 부담으로 여기고, 믿지 않는 자들은 교회를 두려워한다는 것이...... 내게 가슴이 아프다.
내가 이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하겠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죄이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을 칭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지런히 성장해야 한다.
간절히 호소하고 싶은 것이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아직 젊다고 하여 방심하지 말라, 젊은 혈기로 밤새껏 술을 퍼먹다가 방심한 사이에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그대는 아직 살아야 할 날들에 미련을 갖는 고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리라. 늙었다고 하여 자기가 준비되었다고 착각하지 마라. 살아 평생에 지은 죄와 교만과 욕망이 무거워서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리라.
나는 죽음이 무섭다. 꿈에서도 생각날 만큼 무섭다. 죽음의 순간에, 내가 그분을 사랑하지 못할까 무섭다. 죽음의 순간에, 내가 살고자 남을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던질까 무섭다. 그 순간에, 내가 처음으로 지은 죄를, 다시 반복할까 무섭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그분을 팔아넘길까 무섭다. 내가 바라는 바는 죽음의 순간에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하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할 꿈이다.
다만...... 나는 사람으로 죽고자 한다. 내 욕심이 좀 더 크다면, 선한 사람으로 죽고자 한다.
내 마지막은 오직, "그래도 그 사람, 선하게 살았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이 하나뿐이다. 악하게 태어난 주제에, 악의 세계에서 돌연변이가 되어서 주를 만났고, 주를 사랑했고, 주를 닮아가고자 열망하다가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로, 주의 자녀에게 죽임당하기를 원한다. 그게 내 이번 생이다.
소망, 그것은 이루지 못할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열망, 그것은 실현하지 못할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주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그 순간에, 그분께서 이루지 못하셨던 것들에 대한 쓸쓸함을, 늘 기억한다.
그러므로 우리, 최소한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죽기를 소망하자. 그렇게 되려고 노력이라도 하자. 그 노력, 멈추지 말자. 오늘 하루가 내 마지막이라면, 최소한 이것보다는 더 선하게 살다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이 내 마지막이었더라면, 하다못해 오늘 하루 무심코 내뱉은 말과 마음 없이 행한 것들에 대해서,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라도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악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최소한의 양심이 아니던가.
나는 인간으로 죽고 싶다. 가능하면, 선한 인간으로 죽고 싶다.
그것이 나의 꿈이고, 오늘의 나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