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선(善)에 대하여 무관심한 까닭은, 인간 존재가 얼마나 처참한 지옥 속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자신이(我性) 지금도 그 지옥의 밑바닥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하여 말하고자 한다.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은 애초에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이원론적 대립의 개념조차도 아니다. 양자는 서로 하나이다.
인간 존재, 곧 에고(ego)는 철저하게 어두움에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죄와 악의 구조로 형성된 거대한 망상적 실체일 뿐이고, 다만 그 자아, 마음이라는 그릇 안에 영(spirit)과 혼(soul)과 의식(awakeness)이 담기고, 바로 이 "영적인 몸"을 성전(聖殿) 삼으셔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되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바로 사람의 악한 본성 안에 잠재적-내재적으로 존재하는 "신성"이 선(善)한 것이다. 인간은 선할 수 없다. 인간 존재는 빛이 아니다. 인간과 연결되는 신성이, 인간을 통하여 드러날 수 있는 신성이, 오히려 인간이라는 어두움을 통해서만 찬란하게 드러나는 그 광휘의 "위대하신 이름"께서, 오직 절대적으로 선하신 것이다. 나는 이것을 그저 그런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야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체를 철저하게 꿰뚫어보아야만 한다. 특히나 이는 지금과 같은 집단적 어두움이 절정에 달하여 그 파괴적이고 위험한 어두움이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하는 격변의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더더욱 이것을 꿰뚫어보아야만 한다. 나는 지금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을 퍼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도처에 어두움이 넘쳐흐른다. 여기저기에 죄와 악이 있다. 그것들이 때로 특정한 공간과 영역을 점거하고, 그곳 안의 여러 개인들의 집단의식을 지배, 장악하여 어두움의 망상적 실체를 세상에 드러내고, 이를 통하여 다시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인류가 마주한 거시세계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그 어두움의 임계점이 절정에 달했다. 인류는 "자기의 생존과 욕망을 위하여 타인을 강제로 억압하거나 통제한다"는 미개한 원시적 사유체계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오직 힘과 공포에 의한 강제력의 행사만이 평화를 달성할 유일한 길"이라는, 참으로 안타깝고 안쓰럽기 그지없는 이념적 죄악에 물들었으며, 심지어 이것을 오늘날에 완벽하게 구현하고, 현실화하는데 성공하는데 이르렀다. 오늘날, 인류는 힘이 세다 하는 국가들마다 전 지구를 열 번도 넘게 멸망시킬 만한 수준의 핵무기를 도처에 마치 식량창고 쌓아놓듯이 쌓아놓고 있으며, 심지어는 핵무기라는 파멸적인 수준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그 규모와 수준이 억압당했을 뿐(이 역시도 결국 인류가 자신의 꾀에 자신이 농락당한 수준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고 발전한 기술, 문명, 자원을 가지고서는, "죽어서 천국 가는 종교"가 무의미해질 만큼 지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는커녕, 여전히 "전쟁"이 실존한다는 것 자체가, 도처에 여기저기서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인류의 언어체계에 "전쟁"과 "파괴"라는 악(惡)적인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이 안타까운가? 행위가? 아니다. 주님께서도 행위를 보지 않으셨으며, 그분은 오직 "성령을 모독하는 것", 곧 그 존재의 깊은 본성(영)이 하나님을 영접치 않거나, 모욕하거나, "하나님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의도만을 중대한 죄로 삼으셨다(마12:31-3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겉으로는 죄와 악과 어두움의 한계상 어두움에 물들 수 있다는 소리다. 인간 존재는 본래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익이 남의 고통보다 우선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러나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Will)"가 있는가 없는가, 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마음이 곧 "성장에 대한 의지"이다. 즉,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깊은 내면의 씨앗"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 용서받는다, 고 말씀하시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성장을 포기한 자, 그저 어두움에 머무르고 안주하는 자, 오히려 그 어두움을 자신의 권세로 대신 휘두르는 자(타인을 협박하거나 공갈하여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으로 자신의 이익을 거두는 자)는, "지금도 용서받지 못하겠고, 오는 시대에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인류가 어떠한가? "자기의 욕망과 공포를 위하여 타인을 강제로 억압하거나 죽인다"는 미개한 집단적-무의식적 사고의 발현으로 인하여 수천만 명이 희생당한 전쟁이,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100년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사이에 참으로 반성하고 회개하고 뉘우치기는커녕, 여전히 지구상의 도처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1등 국가는 "자기를 우선한다"는 이념 하에 죄와 악과 어두움을 방치하거나 때로 "적극적 개입"을 하고 있으며, 2등 국가는 여전히 자신의 이익과 논리를 위하여 이웃한 국가를 명분 없이 침략하여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3등 국가는 "이를 본받아 자기 이웃 국가를 침략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다. 그러나 인류는 조금도 반성하지도 못했다. 성장하려면 먼저 자신의 죄와 악을 회개해야 한다. 인류는, 불과 100년 전의 끔찍한 초대규모의 전쟁 범죄에 대하여, 아주 간편하고 편리한 답을 냈다 : "히틀러 한 놈이 문제다!" 글쎄, "아니 뗀 굴뚝에 혼자 연기가 나던가?" 인류의 거대한 집단적 무의식이 있고, 그 안에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 누적되고 억압되어 왔던 두려움, 공포, 불안이 있고, 그것이 욕망과 공포의 논리로 인류의 집단의식을 지배, 장악한 결과, 한 사람이라는 "희생양"을 만든 것은 아니고? 괴물 한 사람을 특정하고 나면, 그 괴물을 만드는데 일조했던 집단의식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은 죄가 없어지는가? 마치 익명성 하에 숨어서 투표하여 누가 "대속"할 것인지를 정하고 나면, 그를 비웃고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여버린 다음, 매장시켜버리고 나면, "아버지 하나님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짜로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진실로 경고하노니, 온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속일 수 있을지언정, 자기 안에 거하는 고귀하신 분은 절대 속일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의지를 이루시는 성령의 앞에서는 사람은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부끄러워 숨고자 하였던 그 아득한 과거의 본성으로부터 감히 숨지 못한다. 나는 확신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담이 죄를 지은 것 자체로 "분노"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아담이 죄를 짓고 나서 "숨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크게 슬퍼하셨다." 사람이 죄는 지을 수 있다. 사람이 악에 잠시 흔들릴 수는 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니던가. 외로울 때는 상대를 사랑하는 척했다가, 외로움이 해소되고 나니까 "질려서" 다른 "새 것"을 찾고 싶은 것, 그것이 사람 아니던가. 그러나 그 어두움에 흔들릴수록, 내가 더욱 빛을 사랑하고,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그 마음, 부끄러움을 토대로 하여 경외와 열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만큼은 잃지 않으며, 더욱 빛을 발해야만 할 것이 아닌가. 모든 인류는 각성하여야 한다. 이때의 인류는 "특정한 생물학적 특징들을 공유하는 개체들의 집합"으로서의 집단, 군중이 아니라, 바로 "나"이고, "당신"이다. 내가 곧 인류이다. 당신이 곧 인류이다. 그러므로 인류 전체가 지은 죄와 악은, 곧 내가 지은 것이거나, "마땅히 지을 만한 본성"이 있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는가? 나는 뭔가 다른 줄 알았나? 나는 인류 가운데에서 혼자 고귀하고 신성하던가? 백의 입은 현자인 줄로 알았나? 아니다. "운이 좋아서" 그 어두움이 발현되지 않았고, 따라서 "예비" 혹은 "잠재" 칭호를 받은 것일 뿐, 막말로, "드러난 어두움보다도 숨은 어두움이 더 악질"인 법이다. 익명성 속에 숨은 절대 다수의 악(惡)에 대하여, 비록 사람은 누가 "손가락과 글과 말로 사람을 죽였는지" 알지 못하나, 내가 진실로 경고하건대,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으며, 죽어서 신 앞에 서게 되어 있으며, 그날에는 단 한 사람도, 생애의 단 한 순간도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지금 특별히 감정적이거나 특별히 자극적인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엄연한 인간 존재가 마주한 현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아, 이를 어찌하랴. 아무리 말하고 또 말하여도, "아버지 하나님의 시선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음"을,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감히 인간 중 누구라도 피할 수 없음을, 심지어는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높이 이르신" 첫째 가는 외아들께서도, "아버지께서 잔을 거두어가시도록" 청하실 수 있었던 권세를 거느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아버지의 권세와 영광을 경외하여 그 잔을 받드신 역사를 이루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힘이 없는 놈들이 하지 못하는 것과, 진짜로 힘(POWER)을 가지고 계심에도 하지 않으신 것"은 천지 차이이다. 우리들의 복종을, 그분의 순종과 감히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도대체 왜 "어두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가? 인간 존재가 마주한 이토록 준엄하고도 참혹한 어두움을 마주하지 않는가? 그 오래된 죄와 악의 실체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가? 어찌하여 회개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반성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인류 전체의 죄와 악이 곧 나의 죄와 악"이라는 부끄러움을 한 번도 느끼지 않는가? 그리하여 오늘도 "말과 글과 손가락으로" 사람을 죽이고, 또한 "생각과 관념과 분별로" 사람을 죽여놓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그저 하루를 그냥 마치려고 드는가? 어제 하루 동안 충분히 어두웠다면, 어찌하여 오늘 하루는 빛을 내려 하지 않는가? 어제는 손가락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어찌하여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손가락으로 사람을 살리려고 하지는 않는가? 어제는 생각과 분별로 사람을 죽였다면, 어찌하여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바로 그 생각으로, 사람을 축복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복 받으셨으면 좋겠다", 그 생각 한 번조차도 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다못해, "성실하게 사시니 힘내셨으면 좋겠다", 그 응원조차도 안한단 말인가? 나는 참으로 안타까워한다. 참으로 절망한다. 인류가, 모든 개인들이, 어두움에 무지하고, 어두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며, 그들이 어찌하여 신에 대해서, 신성에 대해서, 마음과 자아와 영혼에 대해서 이토록 무지하고, 또한 그 누구도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참으로 안타까워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어두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보잘것없는 지혜 한 줄, 지식 한 줄이라도 그에게 아낌없이 다 주려고 하니, 마음을 열고 듣기를 바란다. 어두움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가장 명심해야 할 첫번째 원칙이자 가장 절대적인 원칙은, "어두움에 초점을 두지 말고, 오로지 빛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원죄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고, 사탄에게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한다. 마음에 상처와 슬픔이 많은 자는, 자연스럽게 집단무의식이니 심리학이니 정신분석학이니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학문 자체는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왜" 마음이 거기로 끌렸는가? 그것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어두우니 더 깊은 어두움을 찾아서 그 안에 안주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본성이다. 명심하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저 가만히 방치하거나 놓아두지 말아라. 마음과 의식이 함부로 게으르고 나태하고 오만하게 굴려고 하는 것을 결코 방만하게 그냥두지 말아라. 어두움을 제거하려고 집착할수록 어두움의 권세는 자연스럽게 커질 것이다. 사람은, "어두움을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언젠가 밝아지겠지"라는 사고방식, 곧 "어두움 중심적 사고방식"에 집착한다. 이 자체가 이미 인간의 의식과 존재의 구조가 어두움에 의하여 결정지어졌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어두움이 중심이고, 어두움이 첫째이다. 아니다, 이것을 버려라. 어두움은 있든 없든 무시해라. 오늘 어두움에 흔들렸다면, 그건 그냥 그러려니 해라. "본래 당연한 것"이 그리되었을 뿐인데, 무슨 더 관심을 가질 게 있던가? 왜 내가 죄와 악을 지었음에 슬퍼하고 힘들어하는가? "내가 마치 원래는 죄나 악을 짓지 않는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착각이라도 했던가? 다만, 그 사실에 부끄러워하라. 자신이 어두움에 농락당하는 노예임을 부끄러워하라. 그리하여, 차라리 기도라도 해라. "나는 이 사슬을 끊을 수 없으니, 내게 하여금 빛을 사랑하고, 빛을 열망하며, 빛으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주십시오" 하고, 마치 "성장하는 마음"을 맡겨놓기라도 한 것마냥, 뻔뻔하게 신에게 요구해라. 그리하면 마땅히 하나님께서는 그게 누구라도 다 그 성장하려는 마음을 아낌없이 그 안에 채워주실 것이다. 그걸 어찌 아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뭐 처음부터 고귀한 줄 알았나? 천만에 말씀. 내가 산 증인이다. 나도 이리될 수 있다면, 그대도 가능하다. 모든 인간들이 다 가능하다. 나는 최저점이기 때문이다. 오직 빛을 사랑해라. 빛에게 모든 관심을 두어라. 24시간 하루 전체를 오로지 빛을 관찰하고, 빛을 발견하고, 빛을 묵상하고, 빛을 기도하고, 빛을 열망하며, 빛을 실천하여 행하는데 전력을 다해라. 어제 하나를 했으면, 오늘 두개를 해도 된다. 내일 실패하여 다시 하나를 했다면, 모레는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지, 하고 다짐이라도 하면 된다. 작심삼일? 상관없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적 사고일 뿐, 아버지께서는 "무너지고 좌절해도 변함없이 일어나서 나아가는 마음"만을 중히 여기신다. 그 자체가 곧 "경외"이고 "열망"이며 "기쁨"이니, 곧 빛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집단무의식은 곧 "어두움 그 자체"이다. 무의식은 애초에 "나쁜"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이름 자체, 그 영역 자체에는 딱히 고귀한 것도 신성한 것도 영스러운 것도 없다. 집단무의식은 어두움이고, 이 어두움 안에 모든 80억 인류의 개체의식들이 다 묶여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디인가? 바로 혼(soul)이고, 영(Spirit)이다. 어찌하여 하필 올해 여름 즈음을 하여 한국이 주목을 받고, 특히나 "혼(soul)문"이라는 개념이 특정 애니메이션의 갑작스러운 유행과 함께(이 자체가 참으로 어이가 없다, 마치 "이날 이때부터 이만큼 유행하라"고 명령이라도 하신 것마냥),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겠는가? 그것이 왜 하필 "노래"와 관련이 있겠는가? 노래하는 자의 "내면"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모든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함께 모여서 찬송하고, 경배하고, 찬양할 적의 기쁨에 대하여, 그 기쁨을 원천으로 하여 자기의 일상 속에서 조그마한 선이라도 행하고자 하는 그 불씨들이 80억 개나 모인다면 얼마나 엄청난 빛을 증거할 수 있을지, "아버지의 뜻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데 얼마나 큰 희망이 될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아니, 본능적으로,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영혼적으로"라고 해야 할까. 이것을 기억하라. 인류는 이미 집단무의식에 지배당한지 오래이며, 그동안 쌓아왔던 어두움이 이제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다다라서, 현재의 인류가 살아 있는 기간, 대략 앞으로 100년 안으로, "인류가 멸망할지, 아니면 지상이 천국이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어쩌면 100년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다(오히려 그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바로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지상에 물음을 던지셨다, "너희 80억 명 중에서 단 1만 명이라도 선한 자가 있다면, 나는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과연 그 물음 앞에서 자신 있게 "예, 아버지! 지상에는 그 정도의 고귀한 영혼들은 충분히 있습니다!" 하고 답할 수 있던가? 그렇다고 치자, 80억 중에서 1만 명은 0.0001%이니까, 그 정도는 있겠지.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다음 질문을 던지실 것이다 : "그렇다면, 그 1만 명이 너희들의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느냐? 다른 인류들이 그들의 선을 찬양하고 경배하여 본받고자 하느냐? 그들이 너희를 다스리고 교육하고 돌보고 있느냐? 그들이 너희 세상의 주권적 위치에 놓여 있느냐? 너희 나머지가 그들을 존경하고 경외하느냐?" 글쎄, 그 질문에 대해서 어느 누구라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오늘 당장이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굶주린 사람들을 단 한 번의 명령으로 구원할 만한 재산과 부를 지닌 사람들은 눈곱만큼도 움직이지 않는데, 하필이면 꼭 "자신의 선행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이름 없이 꼭 어려운 처지임에도 선을 증거하는 것이 인류의 오랜 "전통" 아니던가? 그리고, 그러한 "안면몰수한" 소수의 악한 이들은 과연 누가 만들어냈을까? 절대 다수의 익명성의 어두움이 그들에게 투영되며, 그들이 단지 "우연히" 그 표면적 상징의 역할로 희생된 것은 아니고? 선한 자는 칭송받고 악한 자는 대가를 치르매 다시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이것이 그리도 어려운 과제이던가? 수천 년의 유구한 인류의 역사가 흘러도, 지금처럼 넘치는 문명과 기술과 자원을 가지고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과제이던가? 인류를 수십 번이나 멸망시킬 파멸적인 무기는 잘도 만들어내면서? 엄연한 사실은 무엇인지 아는가? 오늘 당장이라도, 인류는 지구상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 전세계가 군사력과 군대에 투입하는 비용을 전부 줄이라고도 하지 않고, 고작해야 10%씩만 감축하여 그 돈을 공익을 위하여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실행한다면, 그날로 모든 인류가 최소한 의식주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전세계가 합의하여 군대를 해산하는 대신 경찰력 수준만을 유지하기로 합의할 수 있다면, 그날로 인류는 모든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무의미한 노동 때문에 삶의 대부분이 낭비되는 비효율적인 노동중심적 삶"의 오랜 구조에서 해방될 수 있음이다. 이는 "각국 대표자들이 결정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다. 각국 대표자들은 각국의 국민들 전체의 무의식이 투영된 상징이며, 그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이 지독하게 어둡고, 그 지독한 죄와 악의 어두움은 바로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나" 한 사람이 움직이지 않음으로, 행동하지 않음으로, 실천하지 않음으로, 회개하여 빛을 사랑하고 빛을 열망하기 위한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음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관념적이거나 도덕적인 수준의 말이 아니다. "엄연한 에너지 세계의 진리"이다.
명심하라, 지금의 시대는 인류가 쌓아왔던 어마어마한 집단적 무의식적 어두움이 임계점을 이미 넘겼고, 그것이 곧 상상 이상의 거대한 폭발로 이루어지는 시점이다. 그러므로 현 시대를 살고 있는 80억 인류 전체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드시 "지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 이것은 인간의 과제이지, 어찌하여 아버지의 과제이겠는가? 사람이 사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든 지옥으로 만들든 그건 인간들끼리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어찌하여 인간은 그토록 무관심하고 스스로를 멸망시켜가는데, 아버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셔서라도" 구원하시고자 안달이 나실 만한 일이란 말인가? 이 자체가 얼마나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인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과연 누구이던가? 십자가에 못박혀 계실 적에 그분을 손가락질하고, 모욕하고, 비웃고, 침을 뱉은 자들은 누구이던가? 그분께서 끌려가실 적에 외면하고 고개를 돌린 자들은 누구이던가? "차라리 극악한 사형수를 풀어주라"고 소리 높여 외쳤던 자들이 누구이던가? 그들과 나는 뭐 별반 다른 놈인가?- , 진리(Truth)에 대해서, 반드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에고와 마음과 무의식에 대해서, 영과 혼과 의식에 대해서, 영혼의 성장과 변화 과정에 대해서, 성령과 그리스도와 아버지에 대해서, 반드시 공부하고, 실천하고,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100년 안에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며, 이것은 아버지께 대해서보다 우리들 자신에게 시급한 실존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첫걸음은,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거대한 어두움에 지배, 장악, 기만당하고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자아가, 정신이, 마음이, 어두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우리들의 영과 혼과 의식이 깨어나고 성장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명심하라: 선을 행하지 못하겠거든, 선을 열망하기라도 해라. 그러지 못하겠거든, 선을 사랑하기라도 해라. 그러지 못하겠거든, 선을 행하는 자에게 마음속으로 복을 빌어주고 응원하기라도 해라. 그것마저 못한다고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오늘도 원래 쓰려던 글이 있었는데, "음성을 듣고" 영접하여 받아들이다보니 어느새 삼천포로 와 있다. 온 김에 사천 냉면이나 한 그릇 먹고 가련다. 이 가난한 글들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