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하고도 위대한 부활의 기적
내게는 익숙한 "부활의 패턴"이라는 게 있다. 매 시험의 순간마다, 유난히 견디기 힘들 만큼, 정신과 마음의 고통의 압력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이 올 적마다 숨기지 않는다. "자기를 낮추라"는 주님의 명령은, 겸손한 척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 앞에서 위선(僞善)을 떨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지금 무척이나 고통스럽다고, 더 이상 이대로는 못 갈 것 같다고,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보여주시라고, 너무하신 것 아니냐고, 나는 숨기지 않는다. 그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든 모습들을. 내 뜻을 이루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소리친다. 이제는 아버지마저도 나를 떠나신 것이냐고 있는 그대로 외친다. 그만큼 그 순간까지 이어왔던 나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과 함께한 신앙의 여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매 순간이 고비였기 때문에, 그러한 시험을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홀로 외롭게 지속해왔기 때문에, 그러한 임계점들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늘 항상 "이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한 순간에,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일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늘 그렇듯이 죽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를 찾고, 살아남기 위해서 주님을 찾았으며, 살아서 이 여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성령께 절실히 의지한다. 그런 채로, 고통과 함께 잠든다. 잠들고 일어나서도 여전히 상황은 절망적이고, 임계점을 넘어 폭발할 것만 같은 느낌은 이어진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희한하게 그날 오후나 저녁 즈음하여 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일상적인 일, 평범한 일,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저녁이 되고, 다음날이 되면, 나는 문득 깨닫게 된다. 이틀 전의 그 지독했던 고통 속에서 "내 뜻을 이루어달라"고 발버둥쳤던, 그만큼 절실했던 나의 신앙의 길에서의 고통들이 마치 온데간데 없는 것처럼, 사흘째 되는 날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사, 나의 내면에 신기하리만치, 절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평강"과 "고요함", 그리고 "기쁨"이 다시 한 번 흐르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패턴이다. 실존하는 신앙이다. 그렇게, 나는 내 안에서 주님과 다시 한 번 친밀해지게 된다. 내 힘으로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그분께 살기 위해서 메달려야만 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교감이 없었더라면 내가 일찌감치 이 모든 여정들에서 탈락하여 지금쯤 세상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내게 신앙은 언제나 절실하고도 간절한 문제였던 셈이다.
부활의 희망 따위는 버려야 한다. 부활은 나의 권세(power)가 아니다. 신성한 파스카 성삼일의 축원은 "우리들이 부활케 해달라"는 아버지 앞에서의 떼쓰기가 핵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순간에 대한 열망이며, 그 순수하고 순결한 열망들이 마치 공명하듯이 함께 모여서 지상에 빛을 증거하기 위함이며, 이를 통하여 아버지의 의지(WILL)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한 행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게 부활의 희망 따위는 없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내가 또 한 번 이번에 죽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통과하여 지나간 것처럼. 자살하지 마라. 자살은 자신의 실존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도피일 뿐이며, 경고하건대 죽는다고 모든 것이 다 없어질 것 같은가?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 그 많은 죄와 악과 어두움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육신이 없어진다고 그대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적 세계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살아서 해결하지 못한 어두움이 사슬이 되어 죽음으로 도피한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갈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다만 살아서 죽음을 받아들여라. 눈앞의 상황이 절망적이라면, 그냥 넘어져라. 좌절해라. 깨져라. 박살이 나라. 처참하게 무너져서 울어라. 발악해라. 그런 다음, 하룻밤을 자라. 다음날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고통은 절정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모든 희망의 불씨가 꺼지고, 죽음이라는 장막이 서서히 걷히는 순간, 온 우주마저도 숨을 죽인 채로 나의 영혼이 어두운 밤을 통과하여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그 순간, 사흘째가 되매,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실 것이고, 그가 다시 한 번 위대한 부활의 권세를 이루사, 나는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부활의 희망을 갖게 될 것이며, 이에 부활을 이루신 그분을 찬양하고 경외하고 열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철저한 희망없음이며, 그와 동시에 내 안에서 그분께서 다시 한 번 부활의 권세를 이루시는 것은 모든 희망의 빛의 근원이므로, 희망없음과 희망은 같은 말이다. "이미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삶의 시련과 고난이 주어지는 까닭"은,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들을 벌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여 지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대속과 중보와 "내 안에서 대신 십자가를 지되 사흘째 되는 날 다시 부활하시는" 실제적인 행사를 통해서만, "인간의 영혼과 삼위일체 하나님 간의 교감과 소통과 친밀함"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된 크리스천의 실존적인 신앙이다. 신앙은 실재이자 실존이 되어야만 한다. 나의 이 작은 경험으로 다시 한 번 이를 고백할 수 있게 됨에 내가 다행히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