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께 계십니다. 그분의 신성과 가르침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며,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핵심이자 전체입니다. 이것을 놓치거나 외면하거나 거부하고서는 그 어떤 것도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은 곧 그분의 신성으로 말미암으며, 그분의 신성은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으로 인합니다. "하나됨"이라는 것은, 결국 사랑을 말합니다. 상대를 사랑할 때, 나는 상대를 위하여 희생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희생이 이전에는 고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이전에는 고통스러운 희생일 뿐이었습니다. "내가 손해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사랑할 때, 사랑에 빠질 때, 한 영혼의 내면에서 가장 위대한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 놀랍게도, 희생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됩니다. 약속에 조금만 늦으면 불같이 화를 냈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속을 까맣게 잊어서 하루종일을 기다리고서도, 더 기다리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기다린 시간들로 인하여 기뻐합니다. 타인을 위해서는 손톱만한 인정도 베풀지 않았던 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슬며시 작은 선을 행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희생입니다. "내가 인정받을 수도 없고, 얻는 것도 없는데, 책임만 짊어지는", 사람은 실천하여 행할 이유가 전혀 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합니다. "사랑" 그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정확히는, "사랑으로 인한 기쁨"으로 인하여, 그리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최종적인 단계는 결국에는 "신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모든 교리 중의 교리, 가르침 중의 가르침, 율법 중의 율법...... 그것이 무엇인가? 결국,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뜻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마22:37-38)입니다. 이것이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라 하셨습니다. 첫째는 으뜸이라는 뜻인데, 그 앞에 굳이 '크고'라며 한 번 더 강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지요. 결국, 명료합니다. "사랑하면 행하게 된다"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기에 기쁜 것이고, 기쁘기에 행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 않던가요.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에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로 말미암아 내가 기뻤던 모든 순간들이, '의도했던' 거였습니까? 그리하여 그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간에, 조금이라도 뭔가를 해주고 싶었던 그 "선한" 마음들이, 거짓이었나요? 너무나도 선명한 "진심"이었으며, 그 진심의 표증은,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실천하여 행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을 내 뜻처럼 사랑하게 되며, 그리하면 행(行)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넘쳐흐를 때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요14:27) 것입니다. 그 기쁨의 정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과)하나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됨은 기쁨의 다른 표현입니다. 영의 언어로는 결국 '기쁨'이 유일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기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실함"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표증이자 증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할 수는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기도하고, 그럴듯하게 예배하고, 그럴듯하게 찬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듯하게" 사랑에 빠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나깨나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온통 내 마음이 그리스도께만 가 있으며, 오직 성령께로 말미암아 내가 기뻐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걸음 걸음으로 인해서만 내가 행복해하는 것, 그것은 결국 "꾸며낼 수 없는" 유일한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정확히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첫사랑"의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우리 형제들 각각의 영혼 안에 소중히 간직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된 그 첫 순간 말입니다. 그 순간은 결국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죽음과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은" 기억입니다. 삶의 가장 절망적일 때,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하고 공허할 적에,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던, 그러나 아무도 이를 알아주지 않았을 적에, "가장 은밀하고도 가장 위대한" 나만의 역사가 일어나매, 내 안에서 기적적으로 평강이 흐르고, 기쁨이 흐르는 그 일들을 목격하였던 그 순간 말입니다. 결국, "부활"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얻었던 기억 말입니다. 이것은 나의 부활이 아닙니다. 나는 그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죽음의 덫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또 다시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적에, 위대한 "부활"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재현됨으로 말미암아, 놀랍게도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한가운데에서 나의 영혼이 평화와 기쁨 안에 거하게 되는, 바로 그 일 말입니다. 이것이 임재이고,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첫사랑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호칭이 변화합니다 : "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의 주!"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버지께서 나를 영원토록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심을 내가 온전히 믿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임재의 순간이 짧더라도, 그리고 나의 육적인 몸과 자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아버지께로부터 멀어진 시간이 길더라도, 마치 어린아이가 눈앞에 부모가 보이지 않으면 부모가 죽은 것처럼 공포에 울부짖다가도, 부모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며,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내게로 돌아오신다는 것을 체험하되, 마침내 "아버지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얻는 것처럼, 그 믿음 하나로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나긴 순간"을 울지 않고 대견하게 잘 지나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침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보이는" 세상 전체보다도 더 "높아지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곧 "실상이자 증거"가 된 것입니다(히11:1). 그리고 이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이 깊어질수록, 더욱 뜨거워지고, 더욱 진실해지며, 더욱 간절해지고, 더욱 충만해져만 갑니다.
특정한 종교와 교단에 속해야만 구원받는다고, 그리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이름을 믿는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또한 주님께서도 여러 차례 외적이고 표면적인 것들이 아니라 오직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실천하여 행하는 모든 영혼들이 다 "그분의 가족이자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두가 다 아는 너무나도 쉬운 말씀입니다. 오히려 너무 쉬워서, 너무 익숙해져서 잊어버리고 만, 가장 "순결하고 뜨거웠던 첫사랑"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진리의 본질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 하나일 뿐이라고, 저는 감히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란,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그 마음으로 선(善)을 증거하고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모든 영혼들을 이르는 말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종교를 초월하여, 그리 뜨겁게 사랑하는 모든 영혼들이 다 "형제"라고, 마침내 저는 확신합니다. 그것 하나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아버지와 사랑에 빠지는 것", "오직 아버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 결국에는 이것 하나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