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나는(I AM) 아버지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by 생명의 언어

사실, 어떤 의미에서 "성육신"의 교리만큼, 가장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운 주제도 없다. 이해하기 쉽다는 것은, 오직 나의 영(Spirit)이 그분의 신성을 직접 "만남"으로써, 그분 안에 내가 거하는 순간, "신"에 대한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온전히 현현되시는 그러한 임재와 역사의 한가운데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며, 그리되는 길이 누구에게라도 다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가장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사람이란 본디 "나 중심의 능동태(내가 한다, 내가 산다)"적인 죄성의 존재-의식 구조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므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며,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며, 내가 판단하고, 내가 대처하고, 내가 결정하면서 그리 산다고 믿기에, 나 아닌 타자에게 의지하는 것은 곧 "굴종"이며, 이것은 곧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므로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극심한 존재론적-실존적 공포, 두려움, 불안을 느끼는 바, 특히나 "신에게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오늘날 절대 다수의 현대인들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자명하다. 이는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합리와 비합리로 세상과 자기를 바라보는 잣대를 나누고, 또한 그러한 이중적인 잣대 하에 이원론적인 현상계적 죄성의 무의식적인 사고의 구조 안에 자기가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줄도 모른 채로, 그러한 이원론적 기준과 잣대 자체를 심지어 사랑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적 사고에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고귀한 존재가 능멸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심히 안타까운 마음을 느낀다. 그분께서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으시는 자녀들인데, "거미줄 끼고 먼지가 내려앉고 곰팡이가 낀" 그들의 마음이라는 집마저도 그분께서 그들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기꺼이 그곳에 앉으시고, 그 침대에서 잠드시는 모습을 내가 보았건만...... 어찌하여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내가 심판자라도 된 것마냥 감히 비판할 수 있으리요, 다만 그들의 그러한 보편적-집단적 어리석음의 의식 구조를 일깨우기에는, 본래 죄 없이 오신 그분과는 달리, 나의 능력과 힘과 지혜가 너무나도 미약하고 모자라매 이를 그저 "그분의 뜻"을 기다리면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음에,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뿐이다. 이 안타까움마저도 결국에는 나의 죄성이되, 나는 끝까지 "어리석은 자들이 죄 짓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셨던"(눅23:34) 그분의 심정을 내가 감히 흉내내고 모방하기 위한 기도와 묵상과 찬양으로써 이를 끝까지 내 영혼 깊은 곳 안에 견지하겠노라고, 그리 다시 한 번 다짐할 뿐인 것이다. 결국, 오늘날 사람들은 신을 "믿는 것", 신에게 "의지하는 것", 신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1인칭 능동태를 죽이고 깨뜨리기 위한 진리의 언어들에 대부분 저항한다. 그들은 "권위"에 저항한다. 보라, 똑같은 말일지라도, "내맡김", "내려놓음", "순응", "명상", "참선", "깨달음"...... 이러한, 진리의 또 다른 측면의 불교적 언어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도 순응하고 받아들이면서, 정확히 똑같은 진리의 맞은편 측면인 기독교적 언어, 그러니까 "순종", "믿음", "찬양", "경배", "그리스도 중심성", "구원", "부활"...... 이러한 단어들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낸다는 것이, 너무나도 웃긴 것이다. 오래된 은유를 잠시 빌리노라면, 부처님은 왼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셨고, 예수님은 오른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셨는데, 사람들이 왼손으로 가리키는 것은 옳다 여기고, 오른손으로 가리키는 것은 틀렸다 여기는 것이다. 달은 그저 달일 뿐인데, 그토록 고귀하신 길을 걸어가시고 또한 가장 높은 진리를 이루셨던 분들께서 한결같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리키셨던 그 "본체"는, 지상이 아닌 하늘에 있는데, 그것도 가장 깊은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저 밤하늘의 한가운데를 지키고 섰는데.


이에 대하여, 나는 참된 진리를 "설명"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오늘날 결국 배타성과 특수성, 역사성이라는 진리를 섬기는 시종들이 감히 주인을 몰아내고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가짜 주인 노릇하느라, 온 세상에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할 고귀한 사명과 무거운 십자가의 책임을 부여받은 그분의 제자들이, 마침내 온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을진대, 또한 복음 전파의 대상인 "대중"들이 곧 그 "복음적 진리"에 대하여 가장 배타적으로 접근하고 있을진대, 어찌하여 "회개하면 누구나 하늘나라에 들 수 있다"는 너무도 기쁜 진리(복음)가 이리도 처참한 지경이 되었는가. 결국 이는 "신의 이름"이 보편적이고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구원의 길을 드러내는데 쓰여지기보다는, 그 이름이 특정한 종교와 교리와 전통과 집단만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권위와 이익과 욕망을 손에 넣는데 쓰이는 왜곡, 변질, 타락을 낳았기 때문이다. 결국, 집단성은 죄성이다. 그러므로 집단을 이루는 순간, 무엇이든 타락하고 만다. 나는 감히 말한다. 그 옛날, 그분께서 친히 이 땅을 걸으셨을 시절에, 그리고 그 사도들이 아직 그분의 선명하신 음성을 기억하고서 이를 생생히 증언하던 시절에, "성육신"하신 말씀께서 친히 살아서 땅을 거니셨던 그 시절의 위대하고 고귀했던 진리는, 수천 년의 시간을 흐르면서, 오늘날에 이르러 마침내 완전히 타락해버렸노라고. 그 타락의 주된 원인은, 바로 신의 이름, 곧 "그리스도"의 이름이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만의 배타적이고 특수적이며 역사적인 구원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배타성과 폐쇄성이라는 인류의 교만의 집단적인 죄성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한 결과라고. 따라서 오늘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대하여 단단히 오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그들의 오해는 물론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상당수 기인한 것이되, "주님께서는 가장 낮고 가난한 형제들의 눈을 통하여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들여다보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분께서 역사하신다면 누구의 곁에 먼저 가실 것 같은가? 으리으리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엄숙한 성당이나 교회에 먼저 가실 것 같은가? 그분께서 오늘날 다시 성육신하신다면, 누구를 그분의 형제이자 가족이라고 가리키실 것 같은가?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선을 사랑하고 은밀히 실천하는 낮은 형제들 곁으로 가실 것 같은가, 익숙하고 질서정연하게 통제된 그럴듯한 의례와 행위와 전통에 집착하느라, "교회 바깥의 양들"을 외면하는 형제인 척하는 기만자들에게 가실 것 같은가? 솔직히, 이 질문 자체가 너무 어이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 않은가. 그분께서 뭐라고 말씀하실지를, 어떻게 행동하실지를. 이걸 모르면 자신을 크리스천이라 부를 자격이 없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담긴 신성은, 특정한 종교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무릇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리스도라는 "머리"를 섬기기 위한 시종에 불과할진대, 나는 감히 그 시종이 그 주인께서 일하시는 바를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하고 억압하고 통제할 수 없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따라서 교회 그 자체는 결코 신성하지 않다. 교회가 신성한 것은, 그 몸을 살게 하시는 "머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신성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이시며,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현현하신 "성부 하나님"이시며, 모든 영혼들을 그분께로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성령이실 뿐이다.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신성하신 것이지, 이를 제외한 그 어떤 육적인 대상들도 : 교회든, 교리든, 신학이든, 전통이든, 의례든, 예법이든, 집단이든, 세력이든, 계파든, 뭐든 간에, 다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다. 그것들은 종이자 시녀이다. 하인은 본래 주인께 충성하였을 때에 인정받는 법이지, 주인께 충성하지도 않으면서 그 자신이 주인인 척하는 하인은 마침내 주인에게 이를 들켰을 적에 심판당하고 내쫓기는 법임을, 나는 감히 경고하고 싶은 것이다. 오직 신성하신 것은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신 임재와 역사만이 고귀한 것이다. 모든 영혼들은 그러므로 육적인 것들을 그 자체로 신성시하는, "이단적" 오류를 극히 경계하고, 또한 오직 "그리스도 중심성"만을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나 홀로 외롭게 마주설 것을 기도하고 묵상하여야 한다. 저 아빌라의 테레사가 가르친 바와 같이, "성"의 깊은 중심부의 은밀한 곳에 권좌가 있으며, 그 권좌에 그분께서 앉아서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계셨은즉, 그분을 영접하는 것은 오직 철저하게 나 혼자 가야 하는 길이다. 그 성 안으로는 여럿이서는 갈 수 없다. 2명도 갈 수 없다. 오직 한 명이다. 홀로, 외롭게, 쓸쓸하게, 아프게, 그리 걸어가서는, 그리 그분 앞에 엎드려야 하는 길이다. 나는 이것을 지금, "한 영과 영혼이, 그 안에 내재한 신성을 깨닫고, 신성과 교감하며, 신성과 하나되는 과정"을, 신의 언어로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지상에서는 은유가 진실(fact)보다 더 낮지만, 천상에서는 은유가 진실보다 더 높다. 그러므로 영적 신화와 영적 은유는 곧 하나님의 역사 그 자체이다. 결국, 오늘날의 시대에서는, 집단성이라는 인류의 근원적 죄성을 버리고서, 오직 신을 만나고, 신과 교감하고, 신 안에 거하며, 신과 하나되는, 복음적 진리 그 자체로 완벽하게 회귀해야만 하며, 이를 위하여 그 어떤 육적이고 인간적인 수단, 방편들도 전부 다 버려야 하는, "순수성"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저 루터가 주창하였던 바와 같이, 그의 깃발을 다시 한 번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직 신을 "믿는" 것으로, 오직 신께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와 은총"만으로, 모든 개인들이 다 제사장이 되어서는 그리스도가 아닌 그 누구의 중재도 그 무엇와 중보도 없이 하나님과 직접 마주서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신을 만나는 것은 본래 허락되지 않은 길인 바, 이를 가능케 하시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으로써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이라는 영적 역사를 신께서 이루어주셨으니, 이로써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통하여 "그 이름을 믿는 누구라도" 다 신께로 이를 수 있다는 이 위대한 복음적 진리는, 결국, 종교가 아닌 것이며, 종교를 넘어선 것이며, 종교보다도 명백히 더 높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중심성은 교리가 아니다. 교리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절대적으로 중심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그분의 인성과 그분의 신성이 완전무결하고 나뉘어질 수 없이 하나다"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이는 인간의 시선과 잣대로 그분을 평가하고 분석하고 정의하려는 교만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육와 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동시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한 것"(요6:63)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분 자신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그분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으며, 오직 영의 관점에서 말씀을 듣고 이해할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이는 곧 그분께도 곧장 적용된다.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 즉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우리가 정말로 존경하며 스승으로써 섬기고 따라야 할 분이시지만, 동시에 그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통하여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신성이 "최종 목적"인 것이다. 곧, 나는 예수님은 길이시고, 그 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원형적이고 초월적인 "빛"을 온전하게 드러내신(성육신하신) 것이며, 또한 보이는 그분(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그분(그리스도의 신성)을 영접하게끔 하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확신한다. 즉, 육적인 것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써 크리스천들이 섬기고 따르고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할 분이시지만, 예수님 그 자체는 인간이셨으며, 인간으로서의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부활하신 분은 "신적이고 신령한 새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현현이시지, 인간으로서의 육신을 입으신 그 육적인 낡은 과거의 옷을 그대로 다시 복원하여 입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 인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나는... 이니(I AM...)"로 주창되는 말씀들의 본질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하셨고,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 하셨으되, 그분의 인성이 구원의 중심이라면, 그분을 죽여서 식인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은유들은 명백히, "인간의 육신을 입은 채로, 살아서 하나님과 하나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너희가 보고, 믿고, 받아들여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어라, 는 자비로운 말씀이셨을 뿐이다. 결국, 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한 인격을 통해서만 현현되는 것이 아니며, 원칙적으로는 모든 현현우주의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을 통하여 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드러나되, 그 빛이 드러나는 "밀도"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류 역사상 가장 최초로, 가장 높고 완전하게 현현하신 "고밀도"의 예이며, 그 영적 역사의 결과로써 십자가 부활이라는 "역사적이고 특수한 사례"가 있고, 이를 믿음으로써, "밀도와 상관없이" 신성이 임할 적에는 육의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능동적인 변화와 성장과 완성이 가능하다, 는 믿음(히11:1)을 우리 안에서 이루게 하는 것, 이것이 복음적 진리인 것이다. 결국 신앙의 근본적이고 유일한 대상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며, 신성이 곧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가 곧 신성이신 것, 그러니까 "인류 보편의 원형적이고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신성" 그 자체가 그리스도이시라고, 이 "말씀"으로써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기에, 특정한 종교나 교리나 전통 따위를 당연히 초월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리 믿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신앙의 길이다.


그러므로 나의 그리스도 중심성에서는 당연히 예수님의 인성도 그리스도의 신성만큼이나 중요하며,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이해된다. 애초에 현현되는 것이 없다면 현현 그 자체도 없기 때문이다. 통로가 없는데 빛이 어떻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상에서 역사하시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육적인 것, 곧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직접 임하셔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모든 직접적인 역사는 다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 "역사하신" 그 힘의 근원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께 비롯한 것이며, 그분 자신은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것에서 그분의 신성이 비롯하는 것이라고 이미 누누히 말씀하신 바 있다. 결국, 그리스도의 신성은 중심이며, 그 영원하고 완전한 빛을 예수님이라는 유일무이한 "통로"를 통하여 드러내고 비추셨으며, "유일한 통로를 통하여 유일하게 이루어진 고밀도의 임재와 역사"가 곧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그분처럼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될 길"을 여신 복음적 진리의 현현이라고 나는 본다. 이것은 기독교의 방식과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지언정, 그 중간 과정과 이해 방식에 현격한 차이가 있는 바,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며, 개신교 복음주의가 아닌 "보편적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모든 인류에게 평등하게 열린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 역시도 모든 인류에게 자비롭게 열린 길이다.


그분의 인성은 통로요, 우리들은 그분의 인성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을 만나고, 교감하고, 하나되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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