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비 체험은 오로지 복음을 위함이다
영성(Spirituality)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영혼들은 다 나의 형제들이다. 그들 중에서는 무속신앙이나 해당 지역만의 특수한 오컬트적 전통을 계승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또한 보편 종교에 속한 자들도 있을 것이며, 신비주의적인 길을 걸어가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혹은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전부 다 결국에는 하나의 영원한 순환의 과정, 곧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육의 차원에서 서로 달라 보이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영이다. 심지어 육의 차원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생김새, 키, 몸무게, 성별, 나이, 삶의 방식, 성향, 그밖의 모든 것들이 제각각 다르다. 그러나 영의 차원에서는 그들 모두가 결국 하나이다. 하나이기에, 더더욱, "진실하고 올바른 길"에 대한 기준은 존재해야만 한다. 비록 이것은 본래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만 계신 심판의 권세이나,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이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자들은 더욱이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다원주의라는 가면 뒤로 올바르고 진실한 것을 감추고 부정하고 혼란을 주려고 하는 거짓과 위선을 마주하여, 이러한 혼란의 어두운 시대일수록, 누군가는 더욱 단호히, 더욱 선명히, 더욱 담대히, 진리를 선포하거나, 혹은 선포한 자의 말을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이에 관한 한, 결국 단 하나의 절대적인 원칙이 존재한다 :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섬기기 위한 종이다." 결국 그 어떤 종교나 교리나 교단이나 전통이나 집단 등을 막론하고서, 이 원칙에 위배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님을 스스로 증거하는 셈이 될 것이다.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소위, "비일상적인 영적 체험"의 총체를 말한다. 명상 중에 빛을 보거나, 환영이나 환시를 보거나, 계시를 받거나, 혹은 전생이나 후생을 보거나, 귀신을 쫓거나, 공간을 정화하거나, 어두움을 물리치거나, 그밖의 모든 특수한 신비적 체험들과 그것들을 일으키거나 만들어내는 원리, 개념, 지식 등의 총체를 의미한다. 물론, 신비주의를 이렇게만 설명하는데 대하여 수많은 "오래된 신비주의자"들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신비주의의 오랜 전통을 곡해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다. 결국 99%의 인류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거짓과 진실을 분별할 지혜가 없다.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분별할 지혜가 없다. 어두움에 기만당하지 않고, 죄성에 농락당하지 않고, 악(惡)에 물들지 않는 법을 모른다. 따라서, 깨어난 소수의 단 1%에게 신비주의적 전통은 "가장 순수하고 순결한 길"일지도 모르나 - 물론 나는 일정 부분 이에 대하여 동의하는 바이다 - , 결국 소승의 전통은 대승의 대의명분으로 확장됨이 옳은 것이며, 개인의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은 결국, 인류 집단 전체의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인류가 다 함께 살아서 천국에 이르는 길"을 지향하게 된다. 이른바, "그리스도의 길" 말이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길에 있어서, 신비주의는 결국 "보편화"될 수 없다. 이것이 근원적인 한계이다. 나는 재능을 받았다. 자질을 허락받았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신의 음성을 듣는 것, 내면의 신성과 교감하는 것,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관상기도 속에 잠기는 것,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느끼고, 사람의 눈동자 너머의 영혼의 상태를 들여다보며, 그밖에 "그분께서 허락하실 적에" 깊고 은밀한 비밀들을 넌지시 전하여 주는 것, 이러한 것들은 내게는 "물고기가 태어나자마자 물 속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것" 같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잘나서 허락된 것이 결코 아님을 내가 잘 알며, 따라서 "더 큰 재능을 주셨다는 것은 곧 더 큰 책임도 함께 주신 것"임을 너무도 절실히 이해하고 있고, 비록 서투르고 미약하게나마 그분의 크신 의지를 내 에고의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사랑하기를 이리 나아가니, 영(Spirit)의 길은 내게는 태어나면서부터 걷고 달리고 뜀박질하는 것처럼 쉽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초적인 명상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그들에게, 신비주의적 전통은 결국 "외재성, 특수성, 역사성"이라는 육의 함정에 손쉽게 유혹당하고, 올바른 길을 포기하고 등지도록 할 위험이, 그 자체의 장점보다 더욱 압도적으로 크단 점을, 나는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보편적 복음주의에서, 구원은 곧 "살아서 신과 하나되는 것"이며, 그 유일한 길은 오직 "자기 내면의 신성(그리스도)을 나의 영(sprit)과 영혼(soul)으로 영접하고 교감하며 연결되는 것"뿐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즉, "자기 안의 신성과 연결됨으로써, 살아서 신과 하나되는 것", 이 자체가 복음, "기쁜 소식"이며, "구원"이며, "살아서 나라가 임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에서 신과 동행하는 삶"이며, 또한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복음주의는 이토록 쉽고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고 직관적이라고 하여 결코 쉽다는 뜻은 아니다.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눈뜨고 교감하는 모든 영적 성장의 길에서,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의지가 되어야 한다. 다른 그 어떤 잡다한 영들이나 신비적인 힘이나 능력이나 에너지 따위도 아닌, "성부 하나님의 의지"를 이루시는 힘(Power)이자, 에너지(Energy)이자, 의지(Will)이신, 그 셋이 하나되어 "하늘에서의 영광을, 땅 위의 평화로 이루시는" 분이신,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주의다. 자기 바깥의 그 무엇도 길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것도 무용하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직 "나의 영혼을 성전 삼아 거하시는 분"임을, 내가 "내 안의 성전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서 그분을 홀로 영접해야 함"을, 나는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외한 그 무엇도 진실하고 올바른 진리가 아니다. 물론 각 종교와 전통과 문화와 상징마다의 해석이나 풀이나 은유나 설명의 차이는 존재하되(이것은 육의 차원의 근본적 특성과 성질로 인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 본질이 이것에서 벗어난 그 무엇도 결국에는 이단이요, 사이비이다.
신비 체험은, "보이지 않는 차원이 보이는 차원보다 더 높음"을, "보이지 않는 신께서 보이는 현상계 전체를 통치하심"을, "아버지의 뜻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이지 않는 영혼과 신성이 보이는 외부현실에서 이루어지고 드러나는 것"임을,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존재와 영혼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서, 더 이상 "보이는 육의 차원의 허망한 것들을 쫓지 아니하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진리와 신성과 신만을 바라고 열망하는 것"("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히11:1), 오직 이러한 "참된 믿음"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 과정, 방법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이다. 결코 신비 체험 그 자체가 진리가 될 수 없다. 결코 신비주의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신비주의는 길이다. "복음"으로 이르는 길.
따라서, 이것을 명심하라 : 어중간한 영적인 힘이나 에너지, 능력들은, 아무나 부르면 그에게로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천상과 지상을 통틀어 "절대적인 주권을 거느리신 초월적인 힘(POWER)" 그 자체는 오직 성령이시며, 성령께서는 "능력 있고 잘난 자"들을 찾지 않으시되, 오직 "진실로 신을 사랑하는 자", "진실로 그리스도(자기 안의 신성)를 영접하는 자", "진실로 삶 속에서 홀로 믿음과 신앙의 길을 걷는 자"에게만 임하신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에, 그분께는 우리의 '능력'이 중요치 않다. 능력이 없다면 주실 것이다. 그분께는 좋은 상태나 나쁜 상태가 중요치 않다. 나쁘다면 좋게 만드실 것이고, 어둡다면 비추어 밝히실 것이다. 그분께는 재능이 중요치 않다. 재능이 없다면 주실 것이며, 능력이 없다면 일으키실 것이다. 이름이 없고 명예가 없고 가난하다는 것은 당연히도 그분께는 아무런 걸림이 없다. 감히 지상에서 이름나다고 알려진 그 어떤 스승조차도 선포하지 못한 위대한 진리를, 가장 가난한 자의 입을 통하여 쏟아져나오도록 허락하실 것이며, 그리하여 "아버지께 순종하는 가장 가난한 영혼"을, 성령께서 친히 가장 드높이실 것이다. "그의 이름을 빌려서 그분의 의지를 이루시게끔 허락하시는", 가장 위대한 영광을 이루실 것이다. 보아라. 이래도 "그깟 능력"이 부러운가? 이래도 "그깟 영적인 재능과 자질과 힘" 따위가 부러운가? 권세 부리고 귀신 내쫓고 진리를 말하면서 그럴듯하게 흉내내고 뻐드럭거리는 것"이 그토록 부러운가? 그게 부럽다면 그리 가라. 그러나 곧 머지않아 길을 잃고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 안에서 헤맬 것이다.
"처음부터 가장 높은 곳"을 열망하라. "최고의 신성"만을 열망하라. "가장 높고 완전하신 분"만을 경외하라. 이것이 그리도 어려운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귀신도 감히 성부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신비한 능력이나 힘도 그리스도의 권세를 감히 넘볼 수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두움도 감히 성령의 영원하신 불꽃 앞에서 그 형체를 유지할 수 없다. 내가 말하지 않은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오직 다른 그 어떠한 조건도 보지 않으시고, "진실로 그분을 사랑하는지" 그 하나만을 보신다고. 내가 그 증인이다. 증거다. 나는 태어나서 딱 두 번 교회를 갔고(그것도 개신교 교회 한 번, 가톨릭 성당 한 번이다), 그 어떤 교리든 신학이든 간에 제대로 된 영적인 공부라고는 해본 역사가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은, "나의 영혼의 은밀한 열망에 이끌려 스스로 내게로 온" 것들이 전부였다. 저 요11:25-26의 말씀이 그렇게 내게로 왔고, 그것은 아직도 내 영의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심장이다. 복음의 심장. 나는 이 길을 걸어가면서 결코 단 한 번도 쉬울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했지, "개나 소나 이룰 수 있다"고 한 적은 없다. 본래, 영혼이 성장하고 나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춘기 때에, 키가 크는 것은 언뜻 더딘 것처럼 보인다. 거의 보이지 않을 그 0.1cm 때문에, 몇날 며칠을 성장통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 과정은 무척이나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나 그 성장통을 통하여 그는 마침내 미성숙했던 시기에 비할 데 없이 높이 자라난다. "완성"된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결코 쉽지 않다. 어차피 "오직 신과 신성과 진리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고통과 괴로움이 반복될 뿐, 단 0.1%도 성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안의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그분을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된 존재로써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여 나아갈 적에는, "고통스러운 시험을 치른 만큼 반드시 정확하게 그만큼의, 그 이상의 영혼의 성장이 일어난다"는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특별한 것들에 메달리지 마라. 명상 중에 빛이든 에너지든 전생이든 후생이든 그런 것들은 반드시 볼 필요도 없고 그리 중요치도 않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존재와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되, 그 빛으로 말미암아 어두움 가운데에서 "부활의 희망"이라는 등불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성장해 나아가는 모든 과정들은, "반드시 성령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특별히 임재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으로 귀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