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오해와 비밀
인류가 신을 찾은 이유는 죽음 때문이다. 인류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의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진리, 혹은 신성, 혹은 신을 추구해왔던 역사는 곧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존재론적인 문제를 마주함으로써, 그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와 삶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죽음 너머에 대하여 지향할 수밖에 없게끔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종결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신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이 극도로 진화하여 더 이상 육적인 차원에서, 현상계적인 차원에서 그 어떠한 갈등도 문제도 장애도 안을 필요가 없어진 존재들은, 종교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신은 더 이상 "필요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접근 방식을 반대한다. 오늘날 오컬트 붐이 뜨고 있다. 사람들이 점점 더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현상이나 영역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주술, 예언, 사이비가 판을 치곤 했던, 인류의 오랜 죄성의 역사의 반복일 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컬트와 영성은 다르다. 나는 영(Spirit)에게서만 존재하는 고유한 존재론적 깊이와 본질이 있다고 확신하며, 그 절대적인 순결함과 순수성과 완전성은 곧 아버지와의 하나됨의 통로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그 무엇도, 영을 통한 신과의 하나됨이라는 절대적인 근원과 연결되지 않거나 관련이 없거나 혹은 이를 왜곡, 변질시키게 만드는 그 어떤 것과도 명백히 다른 차원에 있음을, "위"에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이것이 나의 영적 정체성이다. 거듭 말하지만,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섬기기 위한 시종이다. 신비주의 그 자체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주(主)는 오직 단 한 분이시되, 우리 모두의 영(Spirit)과 영혼(Soul)의 존재 이유, 창조된 목적은 단 하나, 그분과의 하나됨의 체현을 위한 것이며, 이 길을 걷는 과정에서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육의 현상계적 차원에 우리들의 의식이 지배, 종속, 억압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꿈 안에서의 꿈을 넘어선 특수한 체험"을 통한 일종의 "자각몽"을 일으키기 위한 수단, 방법, 도구로써의 신비주의와 오컬트만이 유일하게 참되고 진실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를 넘어선 그 무엇도 결국에는 진리가 아니다.
즉, 다른 의미로써,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존재, 아니 존재라고 부를 수 없으되 존재를 창조하신 주, 그러니까 존재 "위"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논할 적에,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사람은 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가장 높으신 분, 곧 "성부(聖父) 아버지"의 격은, 애초에 '이해'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 계신다. 애초에 유한한 육신과 에고와 자아와 개체의식에 종속된 이상, 아버지는 초월이요 영원 그 자체이시기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교감이 결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원"으로서의 신성과 "직접적으로"(이때의 직접적으로, 라는 말은, 곧 영Spirit을 통하여, 라는 말과 같다, 신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은 오직 내 안의 영이기 때문이다) 연결되고 하나되기 위해서는, 성부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존재 안에 모습을 드러내셔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구절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등의 의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곧 "내재적 신성"의 원형이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를 "내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사실은 대단히 불만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재적"인 게 아니다.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어 있는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현상계의 논리와 구조 안에 그리스도께서 외부세계를 마주대하고 있는 "안쪽 전선(戰線)"에만 계시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방편이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 그나마라도 "이해"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편 말이다.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역시 방편이다. "안"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지상의 차원에서는 객관성이 주관성보다 높지만, 천상의 차원에서는 주관성(의지)이 객관성(법칙)보다 더 높다. 위가 아래를 통치하는 것이지, 아래가 위를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러한 현현우주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원리를 이해한 자는, 무슨 "진화한 외계 문명과의 교신"이니 하는 그러한 싸구려 오컬트들이 과연 진정한 진리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때의 "안"은 마음(mind)이 아니고, 자아(ego)도 아니며, 심층적인 무의식조차도 넘어서, 영혼(Soul)조차도 넘어서,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부인 영(Spirit)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 나라"는 곧 "아버지 자체"이며(아버지가 곧 나라다, 아버지께서 임재하시는 것이 곧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라가 따로 계시지 않는다, 이것은 신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단히 중대한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그 아버지께서 오직 나의 영을 통해서만 "임하실" 수 있다, 는 위대한 비밀을 은유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실재적으로 육신이 살아 있는 가운데에서 체험하고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실재(實在)로서의 하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부 아버지가 아니며, 성부 아버지께서 스스로 격을 낮추사 성육신하셔서 내려오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정확히는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인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신성이 중심이다)와, 그분과의 소통과 교류를 이끌고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격이다. 내가 이렇게 설명한다면 신학적으로 대단히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성부 하나님이 절대적인 중심이자 근원이며, 성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격은 성부께로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 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결국 삼위일체의 정삼각형의 최상위 단일 꼭지점은 성부이신 것이다.
이때, 우리가 실재적으로 체험하는 신성은 곧 그리스도이시며(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결국엔 신성을 이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그나마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의 신성은 세 가지의 길로 접근할 수 있다 : 완전성, 영원성, 창조성. 완전성이란 곧 그분으로 인하여 창조된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임을 의미하며, 이 완전성이 "하나의 단일한 고정된 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원성이 영의 중심축으로 존재하며, 마지막으로 창조하는 자와 창조된 대상 간의 영원하고 완전한 순환, 곧 창조성 그 자체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한하고 불완전한 현상계에서는 "변화하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법칙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고정된 것은 실재적이지 않다"는 법칙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변화하면서도 완전하기 위해서"는 곧 영원성이 필요하며(만약 변화하면서도 유한하다면 이는 곧 불완전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영원성으로 인하여 그 자체로 완전해지는 것이다. 이로써, "창조는 순환이며, 순환 전체가 완전하고 영원하다"는 진리가 열린다. 사실 설명하면서도 말로써는 이런 것들이 제대로 정의될 수가 없다. 이것은 애초에 이해되는 대상이 아니요, "그 너머로 곧장 들어가야만" 열리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이 곧 완전한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것들은 변화하고 흘러가고 순환하며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다. 변화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고, 영원으로 인한 모든 것들은 다 완전한 것이다. 이는 상호완전성,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조를 더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정의하면, 저 유명한 명제 :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길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의 문제다.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신을 추구한 까닭은 결국 죽음 이후의 영생에 대한 추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관한 한, 아주 극소수의 사이비나 이단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동의할 하나의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미래에 과학이 발달해서 육체의 존속 기간을 늘릴 수 있겠지만, 결국 그럼에도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의 의식으로는 고작해야 수백 년 정도만을 감당할 수 있을 뿐, 수천 년에서 수만 년이라는 시간은 감당할 수가 없다. 즉, 의식 그 자체가 유한하기에, 육 역시도 유한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영원한 의식"이라는 것은 곧 성부 하나님뿐이시다. 그것이 곧 "말씀", 그러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이다. 따라서, 영과 육의 관계에서, 영이 육을 통치하는 관계요, 육은 영을 담기 위한 그릇이며, "통치받는 대상"임을 명심해야 한다. 육은 영생할 수 없다. 육은 한계를 갖는다. 설령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영생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존재의 완전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첫번째 원칙이다. 육의 차원에 속한 그 어떤 존재도 현상도 사건도 대상도 그 자체로 완전할 수도 영원할 수도 없다. 앞서 변화하고 흘러가는 모든 것들이 다 완전하고 영원하다고 한 것은, 완전성과 영원성, 창조성이라는 "신적 본성"과 그것들이 "초월적인 원리로써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 구체적인 현상이나 사물 그 자체가 완전하다, 영원하다, 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것은 상당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육 그 자체가 신성한 게 아니다. 육이 영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연결의 "잠재적 가능성(길)"이 (비록 비활성화되어 있을지언정)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영적 차원에서 볼 때" 신성하다(모든 창조된 것은 완전하고 영원하다)는 의미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육와 영은 하나이지만, 육과 영 그 자체를 뭉뚱그려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명백히 이단이며 또한 사이비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육과 영은 하나이지만, 그 하나됨 안에서도 육은 육의 역할을, 영은 영의 목적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이원성의 하나됨", 이것이 곧 신성이기 때문이다. 신성은 영에게 계신 것이다. 신성은 육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육적으로 영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그 말씀에서의 주어, 그러니까 그분께서 "나는...(I AM)"이라고 하신 이 부분의 주격을 이해해야 한다. 그 말씀을 "입을 벌려서 소리내어 말하신" 분은 예수님,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신성을 담고 현현하신 매개이자 그릇이 되시는 예수님의 인성이시다. 그러나 인간으로써의 예수님은 명백히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부활 이후에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신 그분은 "신령한 몸", 그러니까 부활 이후의 완전히 새롭게 거듭난 새로운 몸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지, 인간으로서의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물질적인 그 육체 그 자체가 아니다. 육의 몸이 육의 몸이 된 것은 부활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육의 몸이 영의 몸으로 "완성"되어야만 그것이 진정한 부활이다. 따라서, 그분께서 "나는...이니(I AM...)"라고 하신 그때의 "나"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라고 가리키신 것이다. (왜 그분께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성이라고 1인칭으로 가리키셨는가? 매우 간단하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고 들을 눈과 귀가 전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나마 '보이는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라도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분의 신성을 보라, 는 자비로운 말씀이셨다) 즉, 이 말씀을 풀이하면, "나를(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자(영으로 영접하고 연결되어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하여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될 것이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모든 존재들은 원칙적으로는 다 "아버지와 하나되어" 있지만(창조된 것이 창조하신 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는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죄를 저지른 것이라면, 이는 곧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급이거나, 그 이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신학적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이것은 "가장 최상의 차원(=성부 아버지의 격)"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체현되는 차원"에서는 말하자면 "아직 비활성화된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인가, 에 대하여, 그분께서는 "내가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된 모습을 너희가 보아라, 그리고 믿음으로써 나(예수님의 인성)를 통하여 이루어진 영원한 생명(그리스도의 신성)을 너희 안으로 받아들여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어라"는 의미로써 이를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는 그 말씀 그 자체처럼, 그분의 "말씀"은 육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영(생명)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속성(=죄성)"이, 나의 영과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해서 살아서 (그분께서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것과 같이)우리 또한 성부 하나님과 살아서 하나되는 것을 이룸(구원, 복음)으로써, "더 이상 육으로 살지 않고, 오직 신성(완전성, 영원성, 창조성)으로 인하여 사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의 본성"으로 재창조되는 과정과 그 결실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영생"이란, "신과의 하나됨"이며, 이 보이지 않는 역사를 "보이는 역사"를 통하여 믿음으로써 내 안에서도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성취되고 이루어지게 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복음적 진리, 곧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교리의 비밀인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위대하고 비밀스러운 진리를 최대한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언어 자체가, 진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한계가 분명하다. 영원한 생명의 비밀은 결국, 육적인 존재로써 내가 죽음 앞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이 죽더라도 "나"라는 존재는 영원히 영속할 것, 곧 나의 본질은 육이 아닌 영이며, 나의 영은 태초부터 신과 하나되어 있었고, 그 하나됨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육신이 살아 있는 지금의 삶 속에서)활성화하는 것", 이것이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인 것이다. 그리고 이 단 한 번의 "활성화"가 곧 칭의라 일컬어지는 "나의 죄성의 존재적 구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영원하고 완전하게 해결되었음을 믿음으로써, 한 번에 이루어지는 완전한 구원"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그 한 번의 절대적인 구원을 나머지 육의 차원에서도 점진적으로 실현해나가기 위한 평생에 걸친 "성화"의 과정, 이것이 곧 "복음"의 비밀인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과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것을)평생에 걸쳐서 이루어가는 것"인 것이다. 즉, 영원한 생명은 "믿는 자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육을 입은 인간이며, 따라서 인간인 채로, 인간의 삶 속에서, "영의 차원의 영원한 생명"을 육의 차원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내고 성취하고 현현시켜 나가는 성화의 길을 평생에 걸쳐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비밀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비밀이다. 오직 이것 하나이며, 다른 진리는 없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만의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진리도 아니며, 본래 "인류 전체에게 보편적이고 근원적이고 내재적이고 초월적으로" 열린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