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와 구원 : 빛과 어두움의 하나됨

선과 악, 빛과 어두움, 죄와 은혜의 관계성

by 생명의 언어

내가 썼던 모든 글들이 다 그러했지만, 특히나 이 글을 쓸 때만큼은 성령께서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마음으로, 나의 언어 앞에 앉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특히나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도 정작 기독교라는 종교에는 왜 속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해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 오늘날의 시대에서 어떤 진리가 드러나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가 한결 같이 그 시대의 왜곡과 변질과 어두움 앞에서 오직 진리만을 올곧게 주장함으로써 고난의 십자가를 졌고, 비록 나의 사랑은 온전할지언정 나의 담대함과 용기와 힘은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라고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가슴에 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로 가득 찬 자의 내면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공간이 없으되, 내가 두려운 까닭은 곧 나로 하여금 나를 비우고 낮추게 하심으로써 내 안의 그분께서 드러나시게 하시기 위한 뜻임을 내가 믿으니,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 본다.


원죄(Original Sin)라는 것은 기독교에 관하여 가장 헤묵고 오래되고 깊은 오해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를 논하는 오래된 논쟁으로부터 말미암아,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시고 전선(全善)하신 창조주께서 어찌하여 죄와 악이라는 불안정성을 만드셨는지에 대한 신학적 의문을 포함하여, 이 주제는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 내가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옳다"를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내 안에서 진리를 꽃을 피우신 그분의 작품이 곧 지금의 나의 영적 정체성이니, 이것을 필요로 하는 누구에게라도 다 나누고 공유함으로써 조금이라도 그들이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 하나뿐임을, 이것이 내 진심임을, 결코 나만이 옳으며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교만의 죄성의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기독교를 사랑한다. 기독교가 종교로써 지금껏 인류의 영적 성장에 기여해왔던 공헌들과, 또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도적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했던 모든 역사들에 경의와 존경을 표하며,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삶 속에서 고통받고 길을 잃고 헤매는 많은 영혼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고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노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다만 그분께서 나를 부르셨을 적에, 내게 주신 길은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의 길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마22:37), 내 개인의 좋고 싫음이라는 분별을 따르지 아니하고 다만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나도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이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이 길을 걸으면서, 내 삶을, 내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지금처럼 표현하고 묘사할 뿐이며, 이것을 보고 들을 적에 이것을 필요로 하는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한 성령의 사역하심에 먼지보다도 더 작은 하나의 부분이라도 담당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 하나를 가슴에 품을 뿐이다. 헤아릴 수 없이 밤하늘을 흐르는 저 은하수들 전체를 성령께서 인도하시되, 그 중 이름 없는 가난한 한 별에 불과하더라도 내가 진실로 자신을 비우고 오직 이끄시는 분의 의지만을 믿고 따르니, 그리 전체 가운데에서 홀로 빛을 내는 이 삶이 비록 때때로 무척 외롭고 쓸쓸할지언정, 결국에는 내가 이 삶을 사랑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원죄에 관한 한, 원칙적으로는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다. 어떤 이는 원죄의 반대, 그러니까 원복(原福)을 타고났다고 말하거나, "인간은 선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언제나 표면적이고 현상적인 것을 보지 않고 오직 그 아래에 감추어진 드러나지 않은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믿는 바, 인간 존재의 드러나지 않은 실체, 본성, 그것을 보았을 적에 결국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본성은 "어두움"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음을, 그리 작동되어짐을, 나는 오래 전에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으로도 원죄에 관한 교리를 믿으며(다만 그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선과 방식이 기독교의 그것과 다를 뿐이다), 또한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의 공적인 입장에서도 이것이 필수불가결한 진리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원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것인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이며, 원죄에 관한 참된 이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하시는 올바른 신앙을 논할 수 없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나라"(이것은 은유적 표현이다, 하나님 그 자체가 곧 하늘나라이시기 때문이다, 신의 임재가 곧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에서는 어두움에 의지하지 않는 완전하고 영원한 빛이 그 자체로써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되, 우리가 살아가는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현상계의 차원에서는, 이원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빛이 드러나려면 반드시 어두움이 있어야 하며, 또한 어두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할 수 없으니, 어두움에게는 빛이 필수불가결한 존재요, 빛에게는 어두움이 필수불가결한 존재인 것이다. 악(惡)이 없다면 선도 없으되, 뒤집어 말하자면, 선(善)이 없다면 악 역시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이해해야 할 매우 중요한 원칙은, "악(惡) 그 자체"라는 개념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망상적 관념일 뿐, 실체 없는 환상일 뿐이다. 소위 "나쁜 것", "옳지 않은 것", "본래 있지 말아야 할 것"으로서의 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빛에 의지하지 않는 어둠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니, 어두움과 어둠은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어두움"이라는 말은, "본래는 밝은 것이었으나 지금 잠시 어두워진 것"을 의미한다. 즉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어둠"은 곧 고정된 실체로서의 본질 그 자체인 "어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을 받아들여야 할 뿐, "어둠" 그 자체에 집착하는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어두움은 그분께로 나아가는 토대이자 발판이 되어주지만, 어둠 그 자체는 우리를 그분께로부터 분리시키고 단절시킴으로써 인간 존재의 죄성적 구조 안에 나의 정신과 의식과 마음이 가둬지고 억압당하고 기만당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들을 다시 "꿈"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불행한 현실보다는 차라리 행복한 꿈"이 낫다고 주장하는 저들처럼.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창세 이래에 모든 것은 영원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그 자체로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시며, 그분께로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결국 단위와 정도와 척도의 문제일 뿐, 결국 태어난 것은 죽으며, 생성된 것은 소멸되며, 일어난 것은 수렴하며, 떠오른 것은 저물게 된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존재론적인 죽음"을 맞이하며, 그 죽음 이후에 "창조된 것은 창조하신 분과 하나되는 것"을 향하게 되는 바, 그 하나됨을 미리부터 준비해나가는 것은 모든 창조된 것들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소명이다. "합일(合一)", 곧 내가 "하나됨"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 그것이 생명(Life)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원죄는 어둠이 아니다. 즉, 원죄 그 자체가 실체로써 고정된 영원불멸한 실체로써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순간, "하나님을 인간의 관념과 세계관대로 이해하려 드는" 가장 결정적인 교만의 죄성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관념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나의 이해마저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맡겨야 한다. 본질은 하나님이며, 그분께로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써 본질이 아니다. 현현우주의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의 빛이 "드러나신(현현)" 것에 해당하니, 현현된 것은 그 자체로 영원하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곧 본질이 아니요 근원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나는 지금 형이상학을 논하는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창조하신 분과 "창조되어진 것"이 같을 수가 없다. 이것은 분명한 수직적-존재적 위계(내가 '존재적'이라 말할 때, 그것은 기존의 관념체계가 아닌, 수직적-다층적 존재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다)이다. 따라서 원죄 그 자체를 "실체"라고 착각할 때, 결국 "하나님 대(對) 원죄(혹은 사탄)"라는 이원론적 죄성의 세계관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가둘 뿐 아니라, 앞서 말한대로, "신을 인간의 수준으로 평가절하하려는" 오만의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죄는 어두움일 뿐, 어둠 그 자체가 아니다. 어두움이란 상태이며, 곧 "창조된 것"이다. "그분께로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전부 그분을 닮아 있다." 원죄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축 중 하나를 담당한다. 원죄는 어두움이요, 은혜(구원)는 빛이다. 양자는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선악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이치(하나님의 뜻)이되, 인간이 생각하는 대로의 망상적 관념체계 내에서의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것을 "어두움과 빛의 관계성"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어두움이나 빛은 어떠한 상태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언어일 뿐, 그것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가치적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관념이기 때문이다. 원죄라고 말했을 적에 나는 이러한 "인간중심적 가치 기준"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원죄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서의)인간 존재의 구조 자체가 어두움에 의하여 설계되고 구축되고 작동되는 것"으로써 이해되어야 하며, 원죄 그 자체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한다, 는 식의 인간중심적 판단과 이해대로 신앙이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심지어, "어두움"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라는 것 자체도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님을, 즉 "(본래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은 하나님과 하나되어 있고 하나님께로서 흘러나온 것이므로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나)그분의 의도에 따라 분리된 것'처럼' 보여지는 상태"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1:3), 창조된 것이 창조하신 분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중심적 관념(망상)에 불과함을 나는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원죄라는 "분리된 상태"(비록 본질상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가 어두움으로써 있어야만, 그 어두움을 토대로 하여 분리된 것을 다시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은혜"가 있으며, 또한 그 은혜가 (어두움을 토대로)드러남으로써 "(그리스도의 중보적 대속이라는 창세 이전에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인류 구원의 영적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원죄가 없다면 은혜도 구원도 없으며, 원죄가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굳이 성육신하셔서 내려오실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아프고 외면받는 자들의 곁에 계셨으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셨으되, 이것은 인간의 윤리나 도덕 따위로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요, "가장 영원하고 완전한 빛(신성)은 가장 깊은 어두움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의지이심을 그분이 아셨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은 매우 무례한 표현이다. 그분은 가장 완전하게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신 그 자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신 게 아니라 "존재"하셨을 뿐이다. 아, 나는 이 미약하고 가난한 영혼이 감히 그분의 "하나됨"에 대하여 입에 담는 것조차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용기를 낸다. 태양 앞에서 반딧불이로써 감히 용기내어 빛을 낸다. 이로 말미암아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으로 인도받을 그 가능성을 위하여.


결국, 원죄는 구원과 한 "쌍"이며, 어두움은 빛과 "하나됨" 그 자체인 것이다. 다만 그 하나됨은 천상의 차원에서 그러하다는 말이지, 현상계에서는 어두움과 빛은 엄연히 다르고 구별되는 것이며, 지상의 차원에서는 서로 다른 것이 "(덩어리째로)하나"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됨이라는 것은 신성의 영역이므로 "(지상에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하늘에서는 하나임"이라고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하늘에서의 하나됨"은, 육을 입은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인간 존재는 직접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에서조차도 "하나님을 내 눈 앞에 보여달라"(요14:8)고 하였던 빌립의 그 어리석음까지도 사랑하셨으니, 마침내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어리석음마저도 너무도 사랑하사, 친히 "성육신"하셔서 내려오심으로서 함께 먹고, 마시고, 잠들고,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기뻐하셨으니, 그로 말미암아 "너희가 나와 이렇게 오래 함께 있었으되 어찌하여 나를 모른다 하느냐,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요14;9)이라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높이려 드는" 자녀들의 그 죄성의 구조 안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그분께로 이를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단순히 특정 종교의 교리로써의 배타적이고 특수적인 것으로써 남겨지지 말아야 하며, "신의 사랑"을 전하는 원형적인 진리 그 자체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더 나아가서 "창조" 그 자체가 곧 이러한 성육신을 통하여 현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영원이요 초월 그 자체이신 "신"께서, "현현우주"의 차원으로 직접 "내려오신" 것, 이것이 곧 원형적이고 근원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아, 이것은 말로는 채 다 표현될 수가 없다. 이것은 오직 영으로 직접 신성을 만나야만 그 거대한 사랑을, "우주적인 사랑"의 크기를 겨우 가늠이라도 할 수 있다. 신은 "나는 높으니 너희가 내게로 오라"고 권좌에 앉아 계시지 않으셨다. 그리하셔도 "감히" 현현우주의 그 누구도 그 뜻을 해할 수 없었으되, 가장 고귀하시고 신성하신 분께서, 고귀함과 신성 그 자체가, 친히 권좌를 비우시고 지상으로 "내려오셨다." 아,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다 담기어질 수가 없는 위대한 진리이다. 진리는 곧 사랑이다. 사랑은 곧 기쁨이다. 기쁨은 곧 감동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곧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 그 자체이시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원죄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이다. "잘했다 나의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대하여 충성하였으니 곧 네게 더 큰 일을 맡기리라, 와서 나의 기쁨에 참여하라"(마25:21) 하셨으니, 원죄는 종으로써 충실히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을 섬기었으되,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의 "일원"으로써 참여하는 기쁨을 얻게 된 것이다. 심지어, 나는 말하고자 한다. 원죄의 "인격적" 영적 이해로써 은유하건대, 그 종이 얼마나 슬펐을 것인가.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다 오해받고, 비난받고, 멸시받고, 외면받을 적에, 그가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그러나 그 비웃음과 모욕과 슬픔 가운데에서도 오직 아무도 모르는 "그분을 진실로 섬기는 기쁨" 하나만으로 그는 인류와 함께하였을 것이다. 아, 이것은 언어로 채 다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원죄는 어둠이 아니며, 원죄는 어두움이며, 그것은 본질이 아닌 상태로써 "창조된 것"이고, 그 말은즉 원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WILL)" 안에 하나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원죄는 하나님의 뜻이다(물론 원죄 그 자체는 수단이고, 목적은 구원이시다). 그리 이해되어야 한다. 즉, 원죄와 구원이라는 어두움과 빛이 영원히 그분 안에서 하나되매, 그 하나됨을 "드러내시는(현현)" 것, 이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적에, 원죄와 죄의식은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죄의식이란 원죄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며, 또한 원죄에 사로잡히어 있는 나의 존재가 잘못되었다는 "분별"이다. 그것은 감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제멋대로 분별하려 드는 교만의 죄성이다. 그러나 어두움에 머무르지는 말아야 한다. 어두움이 곧 어둠이 아니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되,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빛을 사랑하며,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곧 그분의 진정한 뜻이심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의거하여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이 곧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으로 나아가려는" 근원적인 본성을 품고 있으니, 이것에 대하여 "이해"하려 하지 말고, 다만 그분께서 창조하신 대로 그 "선한" 본성을 (그리스도를 통하여)거듭남으로써 자신의 영혼 안에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삶 속에서 매 순간 그것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질문이 아니다. 신앙은 응답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왜 그렇습니까?"하고 묻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반딧불이는 감히 태양의 의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만 반딧불의 신앙은 태양을 사랑하는 것, 태양을 경외하는 것, 그러므로 보잘것없는 수준에서라도 반딧불이를 "흉내내고 모방하여" 스스로 빛을 내려고 시도하는 것, 시도 그 자체,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기사는 왕의 의지에 질문하지 않는다. 기사의 충성은 질문하지 않는 것에 비롯한다. 왜 그런가? 이것은 무지가 아니요, 왕의 의지가 기사 자신의 의지보다 더 높고, 완전하고, 고귀하고, 의로우심을 선명히 "체험하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본성과 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왕 안에 언제나 기사가 거(居)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품 안에서 삶으로 말미암아 그는 왕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본질이 아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그가 "저지른" 것이 아니다. 그에게 주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을 통하여 "이루신" 역사의 일부이다. 다만 그 어두움의 정체에 대하여 이해할 적에, 그것은 "구조"라는 것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시스템이다. 그것은 일종의 프로그램이고, 알고리즘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서의)원죄, 그리고 그 원죄를 중심으로 인간 존재(ego)라는 건축물이 설계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설계대로 작동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니, 이 "망상"이라는 상태를 통하여 "(그분과의)하나됨"이라는 빛을 "드러내시기" 위한 무대이다. 그리고 이 "무대"가 있기에,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서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삶의 모든 시련과 고난들은 어두움이다. 시련과 고난 그 자체가 빛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픈 건 아픈 것이고, 괴로운 건 괴로운 것이다.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다만, 그것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되, 그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그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그분의 임재하심이라는 빛이 드러날 수 있음이니, 이 자체로 인하여 감동받고, 기뻐하고, 경외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기억하라. 아담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행위를 저지르고서 하나님 앞에 "숨으려 드는" 의도에 있었다. 그 의도는 두 가지의 좌성을 의미하니, 이는 첫째, 하나님을 내가 속일 수 있다는 교만이요, 둘째, 하나님께서 나를 벌주시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그분의 본성을 함부로 재단한 죄이다. 그분은 "상태"를 보지 않으신다. 의로움이라는 "상태"를 보지 않으시며, 다만 의지 하나만을 보시니, 그 의지라 함은 방향성이다.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으로 나아가려는 방향성, 그것이 곧 그분께서 창조하신 의도이며, 그 의도에 충실히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을, 그분께서는 한 명도 빠뜨리지 아니하시고 다 용서하시고, 다 사랑하시며, 다 기쁘다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지키고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원죄는 구원과 하나이다.

원죄가 있기에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와의 하나됨이라는 복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어두움에 속지 말라.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더욱 빛을 사랑하며, 더욱 빛을 증거하라.

그리할 적에, 아버지께서 우리들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기쁨은 곧 그분 안에 우리가 하나되어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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