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열린 구원의 길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참된 복음적 진리를 묵상하며

by 생명의 언어

오늘날, 시대적인 어두움이 점점 더 깊어져간다. 예언은 내게 허락된 사명이 아니다. 한때는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도 하였으되 지금은 허락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마음을 내려놓고 고요한 가운데 그분의 뜻과 그분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다만 점점 더 깊어져만 가는 그 시대적 어두움 가운데에서, 필연적으로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주술과 예언과 사이비가 설쳐대며, 그들로 말미암아 참된 진리와 지혜는 언제나 그 진실한 이름을 더럽혀진다. 눈이 있는 자들은 그것을 볼 것이되 유감스럽게도 무엇이 빛인지 어두움인지를 분간할 수 없고 무엇이 거짓과 위선과 술수인지를 구별할 지혜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바, 이에 대해서 용기 내어 쓰는 것은 내게 허락하신 사명이라고 믿으며, 오늘도 무언가를 쓴다.


사람에게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다. "자아-정체성." 나는 이것을 그의 타고난 영(Spirit)적 기질이 영혼(Soul)을 매개로 하여 육의 차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현현의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같은 맥락에서, "신"에게도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만약 그렇게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다름아닌 "복음" 그 자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사역하시고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인류 구원의 대속사를 이루신 것, 그 전체 과정이 결국 복음이며,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하여 누구라도 그분과 같이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과, 그리 될 수 있는 길(가능성)을 여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구원"을 이루신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 자체이며, 그분을 믿고 따르고 삶 속에서 닮아가고자 하는 모든 그분의 영적 제자들("크리스천")은 마땅히 그분의 정체성을 자신 안으로 모셔서 닮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결국,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결국, 교리와 신학은 복음적 진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토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복음 그 자체이며, 이 복음이란 기독교만의 역사성과 특수성이라는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전 인류가 내재적 신성(그리스도)을 통하여 신(아버지)과 하나됨(합일)을 지향하는 보편적 복음주의로써 마땅히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많이 이야기한 바 있다.


다만 지금의 시대는 명백하게 집단적 혼란과 동요와 불안이 내, 외부적인 갈등과 충돌과 이로 인한 폭력과 죄와 악으로 치닫는 어두움의 시대라는 것은 자명하며, 또한 이러한 시대에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할 종교는 그 본래의 진리의 참된 빛을 더 이상 증거하지 않으며, 그나마도 올바른 길을 걷는 종교들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매 이는 세상이 혼란스러운 때에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생존과 안정과 번영만을 원하는 바, 종교가 말하는 진리는 더 이상 그것들을 제공해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본능적으로 직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빈틈을 노려서 주술과 예언과 사이비와 오컬트가 그 옛날과 같이 판을 치기 시작하였으니, 참된 진리를 분별할 지혜가 없는 이들은 그 정신과 의식과 영혼이 그들의 술수에 지배, 장악, 기만당할 위험성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나는 반드시 무언가를 말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먼저, 복음적 진리라는 중심축이 절대적으로 분명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기독교의 언어로 말하고 있으되, 그 원형적 본질 자체는 종교와 전통과 문화를 막론하고 다 같은 것이다. "초월과 영원으로서의 신"과 인간의 영혼이 합일에 이르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하여 인간 존재 안에 "내재한 신성"을 열고, 만나고, 연결되고, 하나되는 것, 이 하나됨을 위하여 "작동하는 신성"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것, 이것이 결국 원형적 진리이다. 이를 기독교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고, 불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자기 안의 불성을 깨달음으로써 공(空)의 진리와 하나되는 것"이며, 양자는 본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인격 안으로 현현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법(法)의 진리가 인격을 입고 내려오신(나는 이를 의도적으로 성육신적 관점에서 은유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결국 이 원형적 진리의 계시라는 측면에서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신성이 실재적 작용을 통하여 각 영혼들을 "영적 성장의 길"로 인도하고 이끄는 그러한 측면에서의 "작동하는 신성" 역시도 각자의 전통 안에서 가리키는 이름이 다를 뿐, 결국 같은 본질에서 근거한 것이다. 다만 여러 언어를 쓰지 않는 것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며 또한 신께서 내게 허락하신 나의 길이 기독교적 언어와 친밀하기 때문일 뿐, 기독교 그 자체를 내가 진리로 숭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어쨌거나 기독교 언어로 이를 표현한다면, 복음적 진리라는 중심축 자체가 명확해야 한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성자, 내재적 신성)"를 영접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성부)"와 하나되는 것, 그러니까 삼위일체는 원형적이고 초월적인 진리이며, 이 삼위일체의 "작동"이 곧 복음적 진리(신과의 하나됨)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영지주의와 같은 특수한 이단의 교리 내에서만 적용되는 그러한 배타적이고 특수적인 목적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심지어 기독교 신비주의라는 더 좁은 범주(사실 이걸 '좁다'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비주의 안에 보편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에 속한 것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합일", 하나됨이라는 것 자체가 신비주의적인 것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의 정신과 의식과 내면과 영혼과 존재와 삶 전체가 보이지 않는 초월, 영원, 근원을 지향하고 교감하고 소통하고 닮아가는 것, 곧 존재 전체를 통한 전인적 하나됨을 지향하는 것 자체로써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시대에서 다시 한 번 바로세워져야 할 진리의 원칙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원형적인 것이며, 따라서 진리는 "쉽고", "단순하고", "명확해야" 한다. 다만 이것이 초보적이고 유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진리를 공부하고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단, 그 진리 자체가 온전히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호하거나 불확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특수적인 모습이 아니라, 원형적이고 내재적이며 직관적이고 단순하고 명확하고 선명한 실재적인 것으로써 드러난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모호한 것이 아니다. "불성"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존재"로 계신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추상적"인 원리 따위가 아니다. 성령은 "초자연적인 존재"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삼위일체와 복음적 진리의 원형을 순수하고 직관적이고 선명하게 밝히어 드러내는 것과 무관한, 그 어떤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 특히나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특수성"과 "배타성"을 주장하는 모든 가르침, 교리, 전통들은 거짓이고 위선이고 기만이다. 참된 진리는 모두에게 드러난 것이지, 특수한 혈통이나 핏줄이나 역사를 타고난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복음적 진리의 실현은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고 열린 것이지, 특수한 가르침이나 수행이나 원리 따위를 깨달아야만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수성과 배타성에 근거한 그 어떤 가르침도 주장도 방법들도 다 멀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이 전체 과정을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맡기는 것, 이것만이 올바른 신앙의 표본이 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죄성은 "특수한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독교 음모론이나, 성경을 비밀스럽게 해석하는 방식이라든가,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내가 이미 말하건대, 그러한 음모론들에 대해서 내가 모르기 때문에 "보편적 복음주의"라는 순진한 소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굳이 언급하는 것은 올바른 진리를 통하여 한 영혼을 인도하고 구원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목적지향적인 관점에서 배제할 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컬트, 그러니까 주술이나 예언이나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는 매우 원형적인 것이어서, 크리스털 수정으로 된 팔찌를 차면 운이 바뀐다든지, 부적이라든가 어떤 그림을 걸면 복이 들어온다든지, 이러한 "특수적인" 것들에 대해서 집착한다. 나는 이 또한 "제한적 차원에서의 힘"을 발휘하는 방편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육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순간, 나의 영혼의 본래적 힘이 그러한 육적인 것들 "아래"에 있다고 굴복하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 운을 바꾸기 위하여 팔찌를 차는 순간, 나는 그깟 돌덩이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약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면, 어찌하여 그분께 직접 청하지 않는가? 나의 청은 들어주지 않으실 거라 여기는가, 아니면 나 따위 존재 안에는 그분이 계시지 않을 거라고 함부로 그분의 거처를 예단하는가? 그깟 부적이나 그림 따위를 내걸 거라면, 어찌하여 성령께 기도드리지 않는가? 성령께서 계시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가 아니면 계시더라도 나 따위에게는 관심이 없으셔서 역사하지 않으실 거라고 여기는가? 어느 쪽이든 간에 결국에는 의심과 불안이라는 죄성의 작용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는 꼴에 불과하다. 물론, 하루아침에 성취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껏 평생을 게으르게 살아오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자세 잡고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며칠 만에 뚝딱 구원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하다못해 다이어트를 하는데도 3개월은 해야 한다고 말하거늘,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이 어디 쉬운 줄 아는가. 성령께서 내게 임재하시기 위해서는 내 영혼과 의식이 충분히 열리고 성장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통치를 시작하시기" 위해서는 나의 에고가 충분히 "죽어야" 한다. 이 과정은 분명 쉬운 것이 아니고, 지속적인 노력과 공부와 성취들을 필요로 한다. 다만, 이는 "열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열린 길"이다. 성령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진실한 마음으로 바라고 열망하는 모든 영혼들을 평등하게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실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쉽고 명확한가. 나는 그저 열심히 그 인도하심 하에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특수적인 것"에 매달리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비밀스럽고 특수한 비법 따위를 깨달아서 노력하지 않고도 편리하게 성취하고 싶다는 욕망과 교만의 죄성일 뿐인 것이다. 왕도(王道) 같은 건 없다.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심지어 왕도 따위가 아닌 "십자가 지는 길"을 걸으셨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이겠는가.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친다. 특수한 것들에 관심을 갖지 말라.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져라. 나의 영혼과 의식이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진리에 관심을 가져라. 선을 사랑하고, 선행하는 이를 축복해라. 외부의 대상에 현혹되지 말고, 내 안의 신성께 몰입해라. 올바르고 진실한 자세로 기도하고 묵상하라. 일상 속에서 신의 본성을 닮아가려고 노력해라. 이것이 그리 어려운가? 누구나 다 아는 일 아닌가. 다만 누구라도 뻔히 아는 바로 그것을 행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다. 정작 그 자신이 변화하고 성장할 마음은 없으면서, "이 특수한 비법을 익히면 노력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현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술수들에는 관심을 갖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성경을 읽는 특수한 비법 따위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최상의 길"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있는 책(요5:39-40)이다. 나는 이 점에서 기독교와 결별한다. 나는 성경 그 자체는 신성하지 않다고 본다. 성경은 그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있는 책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말씀과 가르침들을 기록한 책, 곧 복음서들만이 성경 전체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적인" 신적 권위를 갖는다. 다른 사도들, 특히나 바울 등에 의하여 쓰여진 글들은 당연히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되, 나는 그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치고 말씀하신 것"과 감히 동등한 위격을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 신성의 권위를 지니는 말씀은 오직 복음서뿐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곧 그리스도로서의 신성에 근거하신 바, 그분의 신성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상세하게 증언한 책은 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 한 권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를 따라,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복음서들만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이를 전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한 직접적이고 유일한 "신적" 권위(나는 이것을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대리하시는'이라는 의미에서 쓰고 있다)를 갖는다고 믿는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믿음이며,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의 공적인 입장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수많은 사이비들이 정작 복음서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이를 배제한다. 왜 그런 줄 아는가? 복음서, 특히나 요한복음을 읽으면 거기에는 너무나도 쉽고 단순하고 명확하고 선명하고 절대적인 진리가 누구라도 다 알 수 있을 만큼 훤히 다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들을 읽고 믿고 받아들이고 따르고 실천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다 그분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이비와 거짓 선지자들과 위선자들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극심한 피해가 될 줄 알면서도 어찌 이를 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진리의 본질, 곧 그리스도의 신성은 "태초부터 계시며 모든 이들에게 내재하신"(요1:1-5) 것이며, "누구라도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기만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실 것(요14:23)이라 하셨다. 결국, 이 말은즉,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라는 삼위일체-복음적 진리는 특별하고 특수한 비법 따위 없이 모든 영혼들에게 평등하고 공평하게 "열린 길"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길을 걷느냐, 걷지 않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사이비와 거짓 선지자들과 위선자들에 관한 한,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은 아니다. 나는 성령의 음성을 인간의 언어로 옮기는 통로이지, 통로가 제멋대로 주권을 쥘 수는 없다. 다만 결국 이 한 마디만은 증언하고자 한다 : "올바른 길, 정도(正道)를 가라." 신은 정도에 계시는 분이지, 그 어떤 특수하고 비밀스럽고 신비적인 가르침이나 비법이나 전승 따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갈수록 어두워져만 가며, 이에 대해서 나는 길게 말하지 않을 것이나, 이러한 시기일수록 "빛을 올바르게 영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 빛은, 소수의 특별한 영적 재능이나 자질, 능력 따위를 부여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원형적이고 내재적이며 초월적인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고, 신을 닮아가며, 신과 함께 살아라.

그리하면 신께서 그와 함께하실 것이다.


단지 이것뿐이다. 다른 진리는 없다.

keyword
이전 13화기도와 묵상의 이론과 실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