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고 묵상하는 자의 삶(Life)에 대하여
언어는 아래이고, 실재는 위이다. 행위는 아래이고, 관상(신성의 내적 체험)은 위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신앙의 길은 곧 아래로써 위를 지향하는 것으로서 귀결된다. 이러한 위와 아래의 하나됨에 대하여 이해하면, 모든 것이 다 그 하나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열고, 이루는 것, 이것이 곧 신앙이다. 행위는 곧 실재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요 수단이다. 행위 그 자체에 집착하는 순간, 방편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순간, 그것이 곧 "1인칭 능동태"(내가 한다, 내가 이룬다)라는 죄성의 함정에 빠지는 순간이다. 행위로는 본질에 이를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행위를 해야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는 곧 먼저 행동함으로써 나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자기계발의 방법론과도 같다. 기도 그 자체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에 이르기 위함이다. 묵상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내 안으로 모시고 섬기는 것이 신성한 것이다. 찬양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찬양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곧 거룩한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 이것이 곧 모든 영적 성장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이 점에서, 행위가 반복되어 경험이 되고, 경험이 쌓여서 인식이 되며, 인식이 쌓여서 자기 의(義), 곧 "내가 옳다"는 교만이 되며, 교만이 다시 내 안의 죄성을 일으키게 하고, 그 죄성이 다시 나의 영혼을 원죄에 천착케 하니, 결국에는 의식의 초점을 행위에 둘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하여 "어디에 이르고자 하는가?"를 스스로 깨닫고 항상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에는 높고 낮음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육의 기도가 있고, 영혼의 기도가 있다. 육의 기도란, 문자 그대로 육적인 것, 곧 행위, 말, 언어, 형식, 이론, 지식, 경험, 의례, 제도...... 등을 통하여 하는 기도이다. 언어로써 소리내어 말하면서 하는 기도, 내지는 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일정하게 정해진 문장을 되뇌이거나, 혹은 자기 생각(1인칭 능동태)을 언어, 관념의 형태로 마음(mind) 안에서 재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기도이다. 육의 기도는 물론 중요하다. 인간의 자아(ego)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육의 기도)을 통하여, 나의 정신과 의식을 계속해서 신과 신성과 진리에게로 몰입하게 하는 방편으로써 그것은 매우 훌륭하며 또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육의 기도 그 자체가 옳은 것이 아니다. 육의 기도 그 자체가 신성한 것도 아니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내가 오늘 하루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형식과 의례를 따라서 기도를 했으니 나는 신앙의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한 것으로, 곧 "옳음"을 얻은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옳다고 칭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주권이 있는 일이다. 즉, 내가 육의 기도를 100시간을 하든, 1,000시간을 하든 간에, 그것이 의롭다 하실지 말지는 그분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내가 기도를 10년을 했다고, 묵상을 20년을 했다고, "내가 옳다"는 자기 의(義)를 내세움으로써 교만이라는 죄성을 강화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육은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다. 아무리 육이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다고 하더라도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영혼", 그러니까 보이는 것(자아, 마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영과 영혼)만을 보신다. 마음의 "상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게끔 하는 "의지(will)"를 보신다. "내 힘으로 의로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도를 가진 자는, 곧 주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빼앗아서는 자기 손에 쥐려고 하는 마음을 지닌 자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가난함을 부끄러워하되, 곧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의도를 지닌 자는, 주권을 자기 손에서 스스로 내려놓아서는 그분께 넘겨드리고자 하는 올바른 뜻에 순종하는 자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후자를 의롭다 하신다. 그분은 의로움의 상태를 보시는 게 아니다. 의도, 곧 영혼의 "방향성"을 보시는 분이다. 마찬가지로, 육의 기도 그 자체는 방편으로써 필요한 것이요 중요한 것이나, 육의 기도 그 자체에 집착하는 순간, 육의 기도 그 자체를 목적화하는 순간, 곧 교만의 죄성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기도를 10년을 했다고 하여, 기도를 시작한지 한 달밖에 안 된 자에 비하여 무조건 더 사랑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함으로 인한 절실함과 순결함"을 더 크게 사랑하시는 분이며, 따라서 "능숙하고 노련하게 기도하는 자"보다, "서투르고 가난하지만 절실하게 기도하는 자"로 인하여 더욱 크게 기뻐하시는 분이다. 나는 이것을 잘 안다. 나는 물론, 다른 이들에 비하여 영적인 재능과 자질과 능력들을 더 많이 허락받았다. 그러나 내가 단 한 번도 이것이 나의 것이라고, 내가 잘나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분께서 주신 것이니 그분의 뜻대로 쓰임받아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언제나 가장 무거운 짐처럼 내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왔다. 재능과 자질과 능력은 오직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며, 이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곧 내가 잘났다고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나를 통하여 그분의 크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시고자 함이니, 더 많은 것을 허락받았다는 것은 곧 더 많은 책임과 사명을 주셨다는 것과 같다. 능숙할수록 가난해야 한다. 노련할수록 순결해야 한다. 그분께서 누구를 더 사랑하시는지, 무엇으로 인하여 더 크게 기뻐하시는지를, 항상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행위는 실재가 되어야 한다. 우선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형식에 따라 일정하게 반복하는 것에서 신앙이 시작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익숙해지고, 그것이 능숙해졌다고 여겨지는 순간, 곧 그때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능숙하고 노련한 자보다 가난하고 절실한 자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기도가 내게 능숙하고 익숙해졌다면 오히려 그것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되, 올바른 길로부터 멀어졌음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무엇으로 인하여 더욱 크게 기뻐하실지를 기도하며, 그렇게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분의 의로우심으로 인도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위가 실재가 되는가? 이것은 우선 선형적인 시간적 개념을 기준으로 삼을 적에는 "양"적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전에는 하루에 1시간만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였더라면,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드는" 모든 시간들이 기도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실재"가 되었다는 것은 곧 내 안에서 임재와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을 확인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은 "무의식(꿈)" 가운데에서도 나의 존재가 하나님께로 몰입되어 있는가, 를 보면 될 것이다. 꿈속에서도 기도한다면, 그때는 다 이루어진 것이다. 꿈속에서도 묵상한다면, 그때는 영혼이 온통 그분께로 몰입되어 있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경외한다면, 그때는 성령께서 그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결국, 나의 의식과 정신과 내면을 "초점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행위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나의 내면을 움직이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어디로 움직이는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움직이는가? 매 순간 나의 의식이 오직 아버지께 초점이 맞춰지며, 나의 정신이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몰입하며, 나의 내면이 오직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이것이 "행위를 넘어 실재가 된 자의 기도"이다. 그리고, "삶 속에서 기도하는 자"가 아닌, "기도하는 자의 삶의 방식"이다. 육적인 삶이라는 틀 안에 기도를 집어넣지 말고, 반대로 기도라는 영적인 생명 가운데에 육적인 삶을 배치시켜야 할 것이다. 육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육신을 입고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중요한가?", 곧 결국 "초점"이다. 최우선이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만, 보이는 차원에서의 일들에 대처하고 행동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나,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구하는데 대한 수단이자 방편이자 일부로써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 뿐이다. 잘 살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요, 기도하기 위하여 잘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하여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요, 신앙의 길을 걷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수직적인 공간적 개념을 기준으로 해서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로 인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사건과 현상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나의 시선에서 인식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아버지께 구하는 것, 곧 기도가 되어야 하며, 이로써 "머무르는 곳마다 주(主)께 중심을 잡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교회에 있다면, 교회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섬기는 것이다. 내가 직장에 있다면, 직장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섬기는 것이다. 내가 거리를 걷는다면, 그 거리에서의 아버지의 뜻을 섬기는 것이다. 그렇게, 머무르는 모든 곳마다 나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재가 되는 기도"이며, "기도하는 자의 삶의 방식"이다. 기도는 더 이상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형식과 의례에 따라서만 이루어지는 것을 넘어선다. 곧, 삶 전체가 기도가 된다. 모든 시간마다 아버지께로 몰입하며, 모든 공간마다 아버지께로 중심을 이룬다. 이 십자가, 곧 수직선(모든 곳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수평선(모든 순간마다 아버지의 뜻에만 몰입하는 것)이 하나되는 순간, 곧 그의 영혼은 "성화"된다. 그 순간, 그의 삶은 "신과의 동행"이자, "신 안에 거하는 생명(Life)"이 된다. 이것은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신성한 삶의 방식이다.
기도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이다. "나"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다. 무엇을 구하는가?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 어떻게 향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그밖에 "삶"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모든 순간들에서의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 "앎"에 초점이 있지 않다.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知)는 행(行)을 섬기는 시종에 불과하며, 행(行)은 거(居)를 이루기 위한 방편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앎으로써 행하고, 행함으로써 (신 안에)거하는 것이다. 거한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의 품 안에 산다는 것은 곧 "신과의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이 하나됨의 절대적인 중심은 곧 신이며, 나는 그분의 의지(WILL)에 따라 중심축인 항성의 주변을 일정한 궤도와 속도와 방식대로 공전, 자전하는 행성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항성이다. 항성은 영원불멸하며, 영겁의 시간을 살며, 절대적인 권세를 거느리시며 의지로써 영광을 이루신다. 행성은 그분의 통치 안에 속할 적에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이를 통하여 평화와 기쁨을 얻는다. 이것은 행성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기억하라. 오히려 행성은 타고나기를 행성으로 태어났으되, 오직 항성의 영향력 안에 온전히 속할 적에만 역설적이게도 "완전"해지도록 태어났으니, 그 뜻을 밝혀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행성이 스스로 주권을 쥐는 순간 그는 멸망할 것이요, 그가 항성께로 주권을 넘겨드리고 그 품 안에 거하는 순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현현우주의 법칙을 아는 자는 곧 하늘나라의 법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아버지의 뜻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도는 아래에서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곧 위와 같이 정렬되고 하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도는 "내가 신의 뜻을 구하는 것"이되,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주권은 아버지께 계신다. 나는 그저 그 뜻을 구할 뿐이며, 또한 구하는 까닭은 알기 위함이 아니요 행하기 위함이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항성의 위대하신 뜻을 감히 행성이 다 아우를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행성은 곧 항성의 통치를 자기 수준에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때때로, 아니 거의 대부분의 순간에서,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항성의 의지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과 완전하심을 믿고, 이에 순종해야 한다. 이 이치를 깨닫는 순간, 결국 믿음의 핵심은 "(아버지의)뜻"이 아니라, "(뜻을 이루시는)아버지 그 자체"에 계심을 깨닫게 된다. 나는 아버지를 믿는 것이며, 아버지의 뜻을 믿는 것은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수순일 뿐인 것이다. 아버지를 믿으니 곧 아버지의 뜻이 나의 뜻이 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능동적인 순종"이다. "신성한 수동태"에서 중요한 것은 "신에게 다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일반적인 수동태"는 죄성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나는 그분께 다 맡기고 내버려둬야지"는 게으름과 나태함과 교만함의 죄성이지, 순종이 아니다. "신성한 수동태"란, 곧 나의 의지와 그분의 의지가 충돌할 적에, "자유의지"로써 "더 높으신 분"께로 나의 주권을 넘겨드리는 능동적인 섬김의 과정이다. 이것은 때로 매우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내면의 전쟁을 불사해야 하며, 살아 있는 고요한 지옥 한가운데에서 가장 절실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통과의례가 된다.
묵상 역시도 처음에는 "훈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훈련소에 입소한 신병들은 처음에는 어리버리한다. 그들에게 구체적인 전투 기술이나 전략 전술을 가르칠 수 없다. 그들은 우선 제식 훈련부터 해야 한다. 총을 쥐는 법, 그리고 올바르게 걷는 법, 옆 사람과 오와 열을 맞추는 법부터 깨달아야 한다. 내가 이를 남성적인 육적 요소에 비유하는 까닭은, 기도와 묵상은 "위(아버지)와 아래(나)를 올바르게 정렬하는 것"이며, 이는 그 본질상 "남성성"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따라서 처음에는 묵상 역시도 육의 묵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육적인 묵상이란 모두가 다 알듯이, 성경의 특정한 말씀이나 구절, 장면들을 붙잡고서는 그것에 깊이 몰입하면서,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허락되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 안으로 모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 안 된다. 성공은 극히 드물고, 실패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좌절치 말라, 이는 당연한 일이니. 오히려 매번 성공한다면 이는 사탄의 술수에 속는 것이다. 행성의 인식체계로써 항성의 의지를 이해하려 시도하는 것이 곧 묵상인 바, 이는 99%가 실패하고, 단 1%라도 성공한다면 매우 다행인 줄로 알아야만 한다. 이때, 묵상의 본질은 "내가 신을 이해한다"의 1인칭 능동태의 죄성을 깨뜨리고, "신께서 나를 통하여 이해를 이루신다"는 "신성한 수동태"의 존재 방식으로의 전환을 훈련하는 것이다. 이는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인간 존재의 원죄 중심적 구조의 작동 원리상, "나"를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은 곧 "죽음의 공포"나 마찬가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교만의 실체는 곧 공포이다. 통제와 억압의 정체는 곧 불안과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는 자비와 사랑으로 현현하며, 불완전한 자는 통제와 억압으로 현현하는 것이 그분의 창조의 섭리이다. 육의 묵상을 통하여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도 나의 존재가 점진적으로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거듭나게 되매, 이것이 어느 순간 임계점에 이를수록, 고통스러웠던 묵상은 점점 더 쉬워진다. "내 힘으로 이해하려는" 의도가 낮아지고, "나를 넘어서 계신 분의 뜻을 고요히 섬기고자 하는" 영혼의 참된 자세가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한 순간들에, 그는 음성 없는 음성을 들을 것이요, 소리 없는 말씀을 들을 것이니,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내 귓가에 은밀히 속삭이시는 그 귀중한 가르침을 영접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묵상을 통하여 얻은 가르침들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소중한 보물들이 되매, 그 보물들을 보관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지성소"가 내면에 갖추어지게 될 것이다. 마침내 그의 영혼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그의 내면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니, "나"라는 중심은 마침내 죽고, 주권이 "내 안의 그리스도"께 넘어가니, 성문을 열고 나가매 나귀 타고 오시는 왕을 영접함으로써 정당하신 계승자께서 권좌에 앉으사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마침내 항성이 중심부에 이르시니,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순간, 묵상은 오히려 없어진다. 묵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매, 처음에는 이를 훈련하고 의도적으로 연습해야만 했었지만, 그의 존재가 그분 안에서 거듭난 이후에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그분의 의지 안에 속하고 정렬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영의 묵상"의 단계에 이를 적에, 마침내 그의 존재 전체가 묵상이 된다. 그때, 그는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정의될 수 없는 것들을, "하늘나라의 가장 귀중한 비밀들"을 영으로써 알도록 허락받으니, 그것에 깊이 몰입함으로 말미암아 고요히 내면으로 침잠하며 침묵하게 된다. 그에게 더 이상 언어는 중심이 아니다. 언어는 "빛"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이것이 참된 기도와 묵상이다.
삶 전체가 기도가 되고, 존재 전체가 묵상이 된다.
이것이 기도하고 묵상하는 자의 삶이다.
나는 이 삶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