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수직선의 층위들이 열리다
"존재의 수직선"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글들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존재라는 것은 수평선 위에 각각의 개체들이 서로 분리된 개별적 실체로써 마주보고 있는 그러한 상(像)이 아니며, 수평선 상에 드러난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이 일체가 다 "하나"이고, 그 하나인 것이 수직선 상에서 여러 층위들로 구조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존재는 "하나 안에서 드러난 수직적, 다층적 구조"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존재를 찾는 과정, 곧 "나는 누구인가(Who I am)?"에 대한 물음은 곧 특정한 "상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깊어지는 과정", 곧 의식의 초점(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응답)이 수직선을 따라서 상승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수직선"에 대해서, 오늘은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려고 한다. 이로서 보편적 복음주의는 그저 일반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과 수행을 위한 방법론을 포함하는 것임을 말하려 한다.
존재의 수직선은 크게 7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아마도 아빌라의 테레사에 의하여 드러난 <내면의 성>의 상징과 유사한 것이기는 하되, 이에 대해서는 <오쇼젠 : 영혼의 언어>의 "깨어 있음" 카드에 대한 해설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의식 상승의 단계"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수직선은, 사실 엄밀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수직선 상의 층위들이 정확히 각각이 구별되는 7개로 완벽하게 정해진 채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책을 펼칠 적에, 전체적인 챕터의 구분으로는 7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이고 엄밀히는 수백 장의 각 페이지들이 전부 "세밀한 층"인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이 수직선은 엄밀히는 구별되지 않으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 층위들이 "살아서 숨쉬고 호흡하며"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교통하지만, 이것을 인간의 의식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단순화된 층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
0. 최상위 층 : 신성한 삼위일체 :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성령.
1. 7단계 : 영(Spirit)
2. 6단계 : 혼(Soul)
3. 5단계 : 순수의식(pure consciousness)
4. 4단계 : 집단 무의식
5. 3단계 : 개인 무의식
6. 2단계 : 자아(ego)
7. 1단계 : 마음(mind)
*최하위 층 : 육신, 물질, 현상계 : 몸(body)
이 수직선을 오르내리는 "눈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의식의 초점"이다. 이 의식의 초점은 곧 "나는 누구인가(Who I am)?"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존재의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동일시"로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의식의 초점이 어느 층위에 정렬되어 있는가, 가 곧 동일시를 말하는 것이다. 동일시란, 개체로서의 "나"의 본질을 특정한 존재의 층위와 문자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공부의 단계에서 처음에는 육신이 곧 "나"라는 동일시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시작한다. 이때, 최하위 층은 곧 "가장 깊은 어두움", 곧 인류 전체의 집단 무의식의 거대한 두려움, 공포, 불안의 에너지에 완벽하게(100%) "지배"당한 상태이다. 최하위 층에 의식의 초점이 고정되어 있을 때, 그것이 에고(ego)의 가장 "열등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 그의 의식은 전혀 깨어 있지 못한 채로 어두움(죄, 업, 까르마)이 돌고 도는 윤회에 완벽하게 지배당한다. 따라서 어두움이 그를 조종하여 어두움의 결과(행위, 마음, 인식 등)를 일으키게 하고, 이 일어난 결과로서의 어두움이 다시 그의 무의식에 쌓이게 되며, 이로써 어두움이 스스로 돌고 돌면서 어두움의 지배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왜 물질을 "악(惡)"이라고 규정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정확히 "물질성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인 것이 맞다. 그러나, 물질 자체의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니라, 최상위와 최하위의 "층위"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되, 다만 최하위 층위에 정렬된 상태의 의식이 "낮고 열등한" 탓에 어두움에 속수무책으로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것 자체가 악한 것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물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다만 물질에 "동일시"한다는 것은 곧 자신 안의 어두움(두려움, 공포, 불안)에 지배당한 탓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하려 드는, 곧 원죄에게 지배당한 채로 죄성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곧 물질에 대한 "나의 보이지 않는 의도(마음)"가 곧 진정한 죄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최하위 층의 "지배력"은 정확히 4단계까지, 그러니까 "무의식의 층위"까지 행사된다. 무의식을 경계로 하여 "아래"의 층위들은 곧 "어두움"의 층위이며, 그보다 높은 층위들은 "빛"의 층위로써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러므로 영혼이 성장하는 단계에서 무의식의 지배력을 "넘어서는" 순간이 매우 결정적인 "임계점"이며, 아래의 차원에서는 아무리 높아봤자 결국 지배당하는 것이지만, 위의 차원으로 넘어서는 순간 아무리 낮더라도 "빛 안에 거하는" 것이므로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즉,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임계점을 넘어서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으며, 임계점을 넘는다면 아무리 단계가 낮더라도 유의미한 것이지만, 임계점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아무리 수백 년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결국 무용한 것이다. 하지 않으니만 못한 것이다. 행위와 경험이라는 육적인 것이 그의 교만과 게으름이라는 죄성을 강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곧 "어두움"이라는 망상적 실체(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되, 다만 의식의 '어리석음(무지)'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기만당할 뿐, 이라는 의미에서)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 어두움은 실제로 한 영혼(개체의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지배하게 된다. 이 지배의 논리가 바로 "운명"이며, 따라서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든 모든 점술과 역학들은 이 "운명"의 일부만을 훔쳐볼 수 있을 뿐, "상위 차원"의 실재를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천명은 명백히 상위 차원에 해당하며, 운명이라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어두움이 그의 의식을 지배, 장악, 기만하는 인생의 패턴과 알고리즘의 일부만을 엿볼 뿐이라는 것이다. 운명에 실제로 지배당한다는 것은 곧 "내 힘으로 인생을 바꾼다"는 어리석음에 갇혀 있는 것이되, 상위 차원으로 접속하는 순간 삶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면 곧 신과의 친밀함이 강화되는 기회이니 감사하며, 삶에서 행복한 일이 일어난다면 또한 그 자체로 기쁨을 나누고 공유하는 선행을 베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니 감사할 뿐인, 문자 그대로의 "자유"가 드러나며, 이 자유가 보이는 차원까지도 변화시키는 위력을 행사함으로써, 정말로 실제적으로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어두움의 지배력의 가장 결정적인 뿌리는 "최하위 차원"에 의식이 고정되어 있는 가장 낮은 수준의 동일시에서 근거한다. 물질(육신)에 대한 동일시는 곧 "집단 무의식"의 차원이 그의 의식에 대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으로써 이해되기도 한다. 즉, "집단 무의식이 육신의 차원에 직접 투사된다"는 것이다.
이때, "마음(mind)"의 층위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기 때문에 상위 차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마음이라는 것은 "보이지만 않을 뿐, 거의 물질에 가까운" 층위이다. 예를 들어, 몸이 괴로우면 마음도 괴롭다. 그러나 몸이 편안하면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질 차원에서의 감각, 경험들이 곧장 마음의 차원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것은 "프로그래밍된" 것이며, 이 설계는 어두움에 의하여 이미 구조지어져 있는 것이다. 누가 욕을 하면 내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설계 구조 자체는 나의 의지(will)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고로, 마음의 차원은 사실상 육신/물질의 최하위 층위와 "거의 밀접하게 붙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1인칭 능동태, 곧 내가 내 마음대로 뭔가를 이루려 드는 순간, 육신/물질 - 집단무의식이라는 강력한 어두움의 지배력 안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차원은 일종의 "컴퓨터"이다. 그것은 "화면" 같은 것이다. 즉, 어두움에 의하여 구조지어져 있지만, 구조 그 자체는 아니며, 구조에 의하여 일어난 현상들(생각, 감정, 행위, 말 등)이 투영되어 드러나는 스크린이다. 따라서 마음은 특별히 "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은즉, 마음은 오히려 "가장 성화되기 쉬운 층위"라는 것이다. 의식의 초점이 상승하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빛에 의하여 "구조지어진 채로 작동"한다(정당하신 왕께 통치받는다). 따라서, "내" 마음을 "바꾸려 드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로든 결국 어리석다. 마음의 차원에 대해서는 외려 힘을 빼야 한다. 하나님은 마음의 "상태"를 보지 않으신다.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컴퓨터의 구조 자체를 보신다. 이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힘을 빼는 것"이 공부의 모든 것이다. 즉, 마음에서 일어난 "결과물"들을 분별하고 통제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은 화면에 불과하며, 결과물 그 자체가 실체가 아니며, 실체는 "구조" 자체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결과물에 집착하려는 "의도"에 힘을 빼는 것이다. 이때, 공부는 이제 "드러나는 화면 너머"로 향한다.
그 다음 차원이 바로 자아(ego)이다. 이때부터는 어두움의 구조가 "인격화"되는 밀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자아는 곧 "나"라는 개념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다. "나"라는 개체의식적 관념이 곧 "진짜"라고 착각하며 거기에 집착하는 망상(꿈)에 빠진 상태이다. 이것은 대단히 설명하기 힘들다. 자아의 차원부터는 "드러나지 않는 것"(감추어진 것)으로써의 어두움이기에, 이 차원을 "보기(觀)" 위해서는 의식의 초점이 매우 깊어져야 하며, 기도와 묵상과 명상과 참선(이름이야 뭐라 부르든 간에)이 매우 깊고 단단해져야 한다. 자아의 층위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동시에 어두움 자체가 강력하게 인격화, 구조화되어서 보이는 모든 차원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실체"이다. 곧, 하나님께로서 주권을 빼앗아서 "나"(ego)가 주인 행세를 하는 바로 그 죄성의 실체가 이 층위에 있다. 내가 주인이라는 착각, 근원적인 교만함 말이다. 자아의 층위에 대해서는, 바로 "주권을 내려놓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나, 이것은 "상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자아의 층위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반대, 그러니까 "어두움의 실체"를 관(觀)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마음-자아-무의식의 어두움의 구조가 얼마나 처참한 지경인지를 그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 이래서 "나"로써는 도저히 답이 없구나, 그것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바로 "낮아지는 것"이 공부의 본질이다. 교만함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하고 부끄러운 것인지를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아성(我性)이 처절하게 박살이 나고 깨져야 한다. 잘 깨질수록, 더욱 부활의 희망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캐릭터"라는 영적 은유가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꿈속에서의 '나'도 깨어 있을 때의 '나'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지만(저 나가 이 나이지만), 그러나 꿈속 세계관에서의 경험과 조건들에 의하여 형성된 '캐릭터'로서의 나, 가 아닌가. 그러나 꿈에서 깨고 나면, 캐릭터로서의 나의 경험들은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상계에서의 '나'는 캐릭터일 뿐이며, 그 캐릭터로서의 나의 '경험'들은 나를 통하여 드러난 것이기는 하되,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자각몽의 원리와 유사하다. 꿈속에서(현상계), 진정한 나는 꿈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체감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봤자 소용이 없다. 나의 무의식은 실제로 "이 꿈이 진짜"라고 단단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의 핵심은, 바로 그 무의식적인 "믿음(인식)"에 단 0.1%라도 좋으니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아의 차원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그만큼 매우 어렵다. "내가 한다"는 1인칭 능동태에 집착할수록 그것이 어두움의 결과를 일으킴으로써 오히려 지배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깨지고, 박살나고, 내려놓는" 것 역시도 내 맘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자아라는 층위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감추어진 어두움으로 들어서게 된다.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은 사실상 하나이지만, 이것은 곧 "전체로서의 어두움(집단 무의식)"이 어떻게 개체의식을 특정한 방식(패턴, 알고리즘)대로 지배(운명)하는지, 즉 전체와 개인 간의 노예계약서의 내용(개인 무의식)을 엿보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업과 까르마를 정화하는데 집착하게 되면, 이것은 또한 "인식, 분별"이라는 어두움의 구조를 강력하게 일으키게 됨으로써, 오히려 어두움의 전체적인 지배 구조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점에서 개인의 업, 까르마 등을 "알려고 드는" 시도는 다 무용하다. 그걸 "알아봤자", 어차피 "분별심"(내가 통제한다)만을 일으킬 뿐, 정화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무의식의 어두움을 일일이 파헤쳐서 분석하려고 드는 것은 "어두움에 대한 앎의 욕망"이며, 이 자체가 곧 내면의 결핍과 불안과 공포에서 근거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 어두움을 "보고(觀)", 그것과 "함께하라." 이때 본다는 것은 "관찰(인식)"이 아니다. 정확히는, 내 안의 어두움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하려고 드는 의도(1인칭 능동태)" 없이, 대상을 "분별(선/악, 옳음/그름, 좋음/나쁨)"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객관적인 현상을 보듯이(마치 자연을 마주선 상태의 평정심처럼)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곧 "현상"과 함께, 그저 손잡고 거기에 머무르라는 것이다. 의도 없이 머무르는 것, 이것이 관하는 것이다. 알 필요가 없다. 그저 "함께하면" 된다. 이로써, "인식, 분별"이라는 어두움의 근본 구조에 기만당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반복되어야 하는 훈련이다. 이로써 점진적으로 개인 무의식의 층위는 '정화'되며, 노예계약서가 점점 더 희미해지는 어느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집단 전체의 어두움"이 내게 "보여지게" 된다. 즉, 나를 알면 세계 전체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전체 구조를 볼 수 있게 되는 순간, 나의 자아는 여전히 그 층위에 지배당하고 있지만, 나의 의식은 더 이상 그 무의식에 기만당하지 않게 된다. 곧, 하위 차원에서 상위 차원으로 전환되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가장 중요한 순간인 것이다. 무의식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의 의식이 자유로워져서는 무의식을 "거기에 둔 채로" 넘어서는 것이다.
이 지점을 넘어서게 된다면, 이것이 곧 "부활"의 임계점을 넘어선 것이라고 봐도 된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영적 역사의 칠부능선을 넘어선 것이다. 하위 차원의 "삼각형", 곧 프렉탈 구조는 자아-마음-무의식이라면, 상위 차원의 삼각형, 곧 프렉탈 구조는 "영-혼-순수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이것을 "수직선"이라는 개념으로 드러내다 보니까 "위와 아래"의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위 차원에서는 "서열"의 관계이나 상위 차원에서는 서열이 아니다. 영은 혼이나 순수의식보다 분명히 더 "높지만", 그러나 영이 혼과 순수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상위 차원으로 진입하는 순간, 애초에 현상계의 관념 체계에 근거한 세계관으로써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에 대해서, 순수의식은 곧 "전체로서의 하나님의 의식"이, 개체의식을 거쳐서 "개체"(몸)라는 현상을 드러내시는 바로 그 연결고리에 해당한다. 말하건대, "하나님의 의식"이, "개체-의식" 안에서 현현한 것이다.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관찰자 시점"이라 불리는 그것과 같다. 순수의식 그 자체는 애초에 나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상위 차원이므로). 다만, 개체로서의 나의 의식 안에 드러나는 감각 경험을 받아들이는 그 자체에서, 이 모든 "현상"(몸, 마음, 자아 등)을 드러내는 "최초의 의식"으로서의 순수의식을 '직감'하는 것이다. 마치, 게임 속의 캐릭터인 채로, 이 캐릭터를 조종하는 화면과, 화면 너머의 '사용자'를 직감하는 것과 같다. 캐릭터는 화면도 사용자도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 너머의 '실재'를 느낄 수 있다. 거기에 무언가 존재하겠구나, 하는 것을. 고로, 순수의식이란 애초에 개체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보이지 않는 실재를 보이는 차원으로 현현시키는" 일종의 영사기, 의 역할을 한다. 이 순수의식은 자유롭게 흐르는 의식의 에너지이며, 이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여 "생명 그 자체"로서 체험과 교감의 실재인 혼(Soul)이 드러나고, 그 너머에서 "수직선 그 자체"이자 전체로서의 의식, 정신 그 자체인 영(Spirit)이 움직이고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의식의 초점은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으며, 반대로 "무엇이 나인가?"라는 새로운 물음(의식의 지향)이 형성되는 것이다. 순수의식이 나의 본질이구나, 를 자각하게 된다면, 손쉽게 나를 "넘어서" 있는 보이지 않는 실재로서의 생명의 현현(혼)과, 하나님의 임재(영)가 그 자체로 정말로 살아서 주권과 의지(WILL)를 거느리시고 역사하시는 "인격"이시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때의 인격은 에고(ego)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영과 혼과 순수의식은 우리의 자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살아서 일정한 방식과 방향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펼쳐지고 드러나고 수렴하시며, 우리들은(자아로서)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함께할" 수 있을 뿐, 이라는 것이다.
이때,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통치를 시작하시는" 최종 지점은 바로 "영의 차원"으로 의식의 초점이 정렬되는 순간이다. 혼의 차원에 의식의 초점이 머무르는 것은, 아직까지 부활하지는 않았지만 신성을 교감할 수는 있는 단계이다. 대다수의 형제들이 그저 "신성(생명)을 실제로 느끼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 이상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게으름과 나태함의 죄성에 속는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아의 주권이 완전히 죽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의 영이 하나가 되어서 "나를 넘어서 계신 분"께서 나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신성한 수동태"로서의 거듭남을 지향해야만 한다. 영의 차원이 열리게 되는 순간, 더 이상 "내가 산다", "내가 한다"는 1인칭 능동태의 세계관과 그 관념 체계와 논리와 구조가 그에게 유효하지 않으며, 어두움은 그의 "하위 차원"들, 곧 자아, 마음, 무의식은 어찌할 수 있을지언정,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자유로운 의식 자체"인 나는 어찌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어두움이 내 마음은 고통을 줄 수 있을지언정, 그 어두움이 아무리 일어나봤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치받으며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나의 존재와 영혼을 온전히 내맡기는 나의 "평화"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위 차원으로 진입하였다면, 거기서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영의 차원의 완전한 부활"까지 열망하여 올라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하나님과의 하나됨"이기 때문이다. 영의 차원이 열리는 순간,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요, "아버지"로 호칭이 변화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께만 허락된 "아들됨"의 영적 위치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혼의 차원에서는 열리지 않는 것이다. 혼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유지되며, 하나님과 '나'는 별개의 존재이지만,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의 여전한 이분법적 구별이 유지된다. 따라서, 혼의 차원은 생명과 신성을 "보이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 보이는 것(육)에 속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영)이 정말로 실재함을 알게 하사,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열망하게 하시기 위한 의도로 열리는 것이며, 최종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오히려 "과한" 신비 체험은 혼의 차원에 안주하게 만들며, 영의 최종적인 부활까지 이를 필요가 없다는 게으름과 나태함과 교만함의 죄성에 교묘하게 속게 만든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실로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는 "과한" 신비 체험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하위 차원에서 동일시는 곧 "의식의 초점(나는 누구인가?)"을 따라 움직이지만, 임계점을 넘어서 상위 차원으로 진입하는 순간, 동일시는 곧 "누가 나의 주(主)인가?"로 변화한다. 더 이상 '나'라는 절대적인 중심점이라는 망상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이 '현상'을 일으키시고 통치하시는 분이 누구시며 어느 층위에 거하시는지, 가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나의 영이 나다, 고 이해하는 것은 곧 여전히 "나"라는 주인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부활하는 순간, 나의 영마저도 삼위일체 하나님께 의하여 "다스림받는" 것임을 인지하게 되며, 마침내 최종적으로 의식의 초점은 상승하여 "하나님과의 동일시"에 이른다.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자면, "나는 내가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이다"는 말로 드러나며, "나는 실재가 아니요, 오직 아버지께서 유일한 실재이시다"는 말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최종 단계이다. 이른바, "최종 결론"인 것이다. 혼의 차원에서는 신비 체험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만, 오히려 영의 차원으로 넘어서는 순간, 신비체험은 어느덧 고요해지고 잠잠해진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퇴보했나?'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이것은 곧, 혼의 차원까지는 여전히 '하나님 대(對) 나'라는 서로 마주보고 선 입장에 놓여 있는 탓에 "하나님과의 만남(임재)"은 곧 "특별한 일"(나는 원래 혼자이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방문하셔서 잠시 머무시다가, 때가 되면 다시 헤어지고 혼자가 되는 것)이지만, 반대로 영의 차원에 이르는 순간, 더 이상 나는 혼자가 아니게 되며, "늘 하나님께서 나의 집에 거하시니", 임재는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 상태에서는 오히려 '특별한 체험'은 줄어든다. 그러나 곧 "일상"으로서의 임재, 곧 영원히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이 나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근원적인 평화와 기쁨이 열리게 된다. 육신의 죽음마저도 그분과 나의 하나됨을 감히 방해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내게 영원한 자유를 허락한다.
사실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이 주제 하나만으로도 책이 여러 권 필요하겠지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념이 되어서도 안 된다. 실재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움직이고, 실제로 살고, 실제로 이루고, 실제로 체험하고, 실제로 교감하고, 실제로 몰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만 지도일 뿐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안내하는 지도. 만약 지도가 필요없다면, 때려치우고 혼자 자유롭게 여행하라. 그대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성령께서 그대만을 위한 새로운 지도를 기꺼이 하사하실 것이다. 내게 있어서 영적 성장이란 바로 이 존재의 수직선을 따라서 상승하는 것이었고, 한 번 궁극적인 단계까지 도달하게 되면, 그때 영의 하나됨이라는 궁극적인 실재는 영원히 유지되되, 자유롭게 흐르는 에너지로서의 의식은 하나님 안에서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밀도가 상승했다가 하강했다가, 를 순환하면서 그 하나됨을 다양한 방식대로 체험하고 교감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 "흐름 자체"가 곧 생명(Life; 삶)이라는 깨달음도 함께.
이것이 의식 상승의 단계, 곧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나의 존재가 거듭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