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시의 해체와 재구성

의식적 변환(Transformation)의 실제적 방법론

by 생명의 언어

영적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폐쇄적이고 제한적인 반면, 영적 실재는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로는 실재의 "일부분"만을 가리킬 수 있기에, 언어는 마치 외과수술을 진행하는 것처럼 정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언어는 망원경이 될 수 없으며, 오직 '현미경'만이 될 수 있다. 심지어 그마저도 한계가 있다. '가장 은밀하고 깊은 부분'은 오직 영(Spirit)으로서 실재 그 자체와 교감할 때에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 안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진리들의 절대 다수, 내지는 상당수는 언어로는 표현하거나 설명하거나 교육하기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까다롭다.


"나"라는 이 단순한 개념조차도, 영적 세계에서는 엄밀한 재정의를 거쳐야 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책이 여러 권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


1. "존재의 수직선"으로서의 나 : "위로는 아버지, 아래로는 나, 위와 아래가 하나로 연결된 수직선." 이것은 영적 실재로서의 나이다. 소위 "상위 자아" 등의 말로써 가리켜지는 지점이다.


2. "망상적 실체"로서의 나 : 마음공부 등에서 소위 "에고(ego; 자아라는 개념)"로 불리는 것이다. 집단성과 동일시함으로써 실재가 아닌 여러 허상(관념)들의 종합으로 구성된, 실재하지 않는 망상으로서의 자아다.


3.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나 : 주관성을 통하여 실재를 현상으로 드러내는 "시각"이다. 오쇼가 소위 "관찰자는 없고 관찰 그 자체만 있다"고 했던 그 지점이다. 주관성 그 자체, 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아마도 이 주제에 관한 한 내게는 자격이 없거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용기 내어 말하자면, 상당수의 크리스천들은 "실재적" 방법론에 취약하거나 익숙하지 않다. 즉, "기도"라는 것은 정해진 절차와 규칙에 따라서 정해진 기도문을 소리내어 낭독하거나 혹은 눈 감고 특정한 자세와 형식과 의례에 따라서 속으로 암기하는 것, 정도로만 이해되어진다. 나머지 묵상, 찬양 등도 마찬가지다. 결국 "의례"로써의 행위에 익숙할 뿐, 나의 의식과 정신과 내면과 영혼을 실제로 훈련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에는 매우 약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집단성을 강화하는 교리적, 신학적 역사를 거쳐오면서 귀결된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는 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써 예의와 존중을 표하려 한다.


어쨌든, "신을 믿는 자"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크리스천(그리스도인 ;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하다. 그것은 기초이자 시작점일 뿐, 결국에는 "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는 "철학에 능숙한 자"가 아니다. "철학을 사랑하는 자"이다. 좀 고리타분하기는 해도 유머 삼아 인용하건대 "철학은 신학을 섬기는 시종"이거늘, 하물며 철학의 주(主)인 신학과 종교의 차원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신을 믿는 것은 시작일 뿐, 결국 신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수의 형제들의 신앙은 "믿음"에 머물러 있다. 이때의 믿음이란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의 수준에만 머무를 뿐, 영혼으로 직접 진리와 신성을 체험하고 교감하며 하나되어 가는 실재적인 과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책이 여러 권 필요하겠으되, 중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므로(나는 애초에 비판이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한다; 비판은 타자를 낮춤으로써 자아를 높이고자 하는 죄성과 가장 밀접하기 때문이다), "실제적 방법론"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내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제시해보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실제적 방법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3번으로서의 "의식"인 나, 를 기억하는가? 핵심은 결국 바로 이 "의식"을 활성화하고 훈련하고 성장(상승)케 하는 것이다. 이때, 의식이라는 것은 "내적인 것의 총체"이며, 이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로 나뉜다(단, 아래의 spirit, soul 개념은 거시적 차원이 아니라 미시적 차원에 해당하는 이원성의 개념이다) :


1. 정신(Spirit) : 영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실재를 '알고', '깨닫고', '드러내는' 작용을 한다. 상위 감정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경외', '경이로움', '고요', '영원', '초월', '현존'...... 등이 있다. 즉, 의식이 수직적 작용을 할 때, "깊어질 때", "높아질 때"의 내적 체험과 이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2. 내면(Soul) : 혼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소위 '가슴', '감성', '감수성'...... 등으로 표현되는 그것이다. 영의 진리를 실제로 체험하고 교감하게 한다. 상위 감정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생명', '사랑', '기쁨', '열망', '희망', '이타심', '헌신', '따뜻함', '온전함'...... 등이 있다. 즉, 의식이 수평적 작용을 할 때, 연결되고 확장되며 하나될 때의 내적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십자가이다. 수평선이 "연결(확장)"되고, 수직선이 "연결(상승/하강)"되며, 양자가 서로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어 연합할 때, 마침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나의 존재가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거시적 차원에서의 영과 영혼의 관계가, 미시적 차원에서의 이원적인 영, 혼의 에너지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위계"가 존재한다.


이를 정의하면 : "영(Spirit)이 영혼(Soul)을 이끈다."


마찬가지로, 영의 에너지가 활성화되고, 상승/하강해야만, 이로써 혼의 에너지가 확장/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실존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정신이 깊어지고, 단단해지고, 성숙해져야만, 이로부터 나의 내면이 정화되고, 치유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핵심은 "정신"에 있다. 이 정신을 어떻게 자극하고 훈련하고 활성화할 것인가, 가 실제적 방법론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다른 것은 없다.


위계, 라고 설명한 것은, 이러한 의미이다 : 정신이 성숙해지면 내면은 자연스럽게 열리지만, 내면을 연다고 해서 정신이 자연스럽게 깊어지진 않는다. 즉, 다소 간에 오해의 여지가 있더라도 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믿는 자에게 신비 체험은 언젠가 이루어지지만, 신비 체험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형성되진 않는다." 일상 속에서 신성을 느끼고, 신성을 체험하고, 보이지 않는 특별한 무언가를 혼으로써 "본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소리다. 목적은 정신에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을 오해하면 손쉽게 사이비로 빠지게 된다. 특수한 신비적인 체험이나 영적,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를 신성시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나의 정신이 깊어지고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면, 영의 통치를 받는 혼은 자연스럽게 개화한다. 그리고 혼이 열리면 당연히 신비 체험(신성과의 직접적인 만남, 교감)은 뒤따르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신비주의가 섬겨야 할 주(主)이다."


이 명제가 영혼 안에 단단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정신을 상승/하강케 하는 열쇠(Key)는 바로 "의식의 초점"에 있다. 소위 "동일시"이다. 이것은 심리학적 용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에 가깝다. 즉, "나는 누구인가(WHO I AM)?"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것은 1번 "나", 곧 "존재의 수직선"과 동기화되어 있다. 즉, 수직선을 따라서 어느 층위에 초점이 연결될 것인가, 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수직선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언급했으나, 간단히 나열하자면 :


최상위(아버지) : 신성한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상위 차원 : 존재의 삼위일체(영, 영혼, 순수의식)


하위 차원 : 의식의 삼위일체(spirit, soul, body)


이 중에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상위 차원의 "영혼"이 하위 차원의 삼각형을 통하여 펼쳐진 것이다. 이때, 하위 차원에서의 body는 실제 피와 살로 구성된 생물학적인 몸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육적인 것에 가까운 그릇, 곧 자아(ego)와 마음(mind)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몸 안에서 영혼이 드러나고 펼쳐지는 이원적인 에너지가 바로 "영, 혼"이다. 다른 이름으로 "남성성, 여성성" 내지는 "음, 양" 등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어차피 관점에 따라서 무엇을 드러내느냐의 차이일 뿐 본질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영혼"이라 불리는 것은 존재의 수직선을 따라서 펼쳐질 수 있는데, 이 단계를 간단히 펼치면 앞서 이야기한 7개의 층위가 된다 :


영(spirit) - 혼(soul) - 의식(자각) - 집단무의식 - 개인무의식 - 자아 - 마음 - 몸(물질).


사실, 본래 영적 실재라는 것은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문자로 드러내는 것 자체가 곧 실재가 되는 건 아니다. 문자는 문자 그대로 문자일 뿐이다. 이걸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말이라는 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면 개념도 달라진다. 다만 여기서는 "실제로 움직이고 흐르는 의식"으로서의 나의 수직선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일단 쓴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존재의 수직선을 더 자세히 펼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성부(아버지) - 성자(그리스도) - 성령 - 영 - 영혼 - 순수의식 - 영의 에너지 - 혼의 에너지 - 자각(깨어있음) - 집단무의식 - 개인무의식 - 자아 - 마음 - 몸. 최상위 차원과 상위 차원과 하위 차원은 프렉탈 구조이며, 위가 아래를 통치한다.


그러므로 정신은 "에너지"이며, 이 에너지는 "상승(아래에서 위로)"과 "하강(위에서 아래로)"이 동시에 작용한다.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기도이며, 하강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묵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때, "주권"은 당연히 묵상에 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것은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계시"되어졌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정신을 무조건 신에게 다 떠넘긴 채로 방만하게 있는다면, 그 자체가 이미 정신히 "닫힌"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의식의 초점을 어떻게 상승시킬 수 있는가?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간단하다. 먼저, 가장 기초적인 훈련은 바로 "정신 집중"이다. 정신 에너지를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가 마치 근육을 내 의지대로 사용하듯이, 정신 역시도 자유롭게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쓰는지를 '감각'적으로 익힐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지켜봄"의 훈련으로 일컬어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가능하다면 꿈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 지켜봄의 훈련은 다음의 방법으로 수행된다 :


"매 순간 깨어서 나를 지켜보는 것."


그리고 이 지켜봄의 "초점"은 단계적으로 상승한다.


1. 몸(육체 감각) 지켜보기.

2. 호흡 지켜보기.

3. 마음(mind) 지켜보기 : 생각, 감정 등.

4. 자아(ego) 지켜보기 : 인식, 분별 등.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 등)

5. (개인)무의식 지켜보기 : "하위 감정"(주로 어두운/부정적인 마음의 작용)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6. 현존하기 : 현존이 곧 실재임을 자각하는 것.


물론 이런 단계들은 고정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으며 단지 임의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핵심은, 매 순간의 정신의 초점을 단계적으로 상승하면서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동일시"가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상승할 것이다. 이 단계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1. 육신(물질)에 대한 동일시 : 가장 원초적인 의식의 상태. 공포, 욕망에 100% 지배당함.

2. 마음(생각, 감정)에 대한 동일시 : 현실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

3. 자아(인식, 분별)에 대한 동일시 : 무의식에 의하여 의식 구조가 작동되는 상태.

4. 어두움(무의식)에 대한 동일시 : "나"의 실체는 무의식이라는 착각.

5. 집단성에 대한 동일시 : "집단 무의식"이 곧 나의 실체라는 근원적인 망상.


여기까지가 "하위 차원"의 동일시이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자, "상처를 회복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면, "상위 차원"으로 전환되며, 여기서부터는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상위와 하위를 결정짓는 임계점은 결국 "의도"의 차이에 있다. 낮은 차원에서는 동일시는 두려움, 공포, 불안의 하위 감정에 의하여 움직인다. 그러나 높은 차원에서는 동일시는 경외, 열망, 기쁨의 상위 감정으로 움직인다. 물론, "존재 방식"도 전환된다 : 1인칭 능동태에서 "신성한 수동태"로.


6. 자각(깨어 있음, 흐름)에 대한 동일시 : 의식의 흐름이 곧 '나'임.

7. 혼(soul)의 에너지에 대한 동일시 : 생명과의 교감, 체험, 몰입 등이 '나'임.

8. 영(spirit)의 에너지에 대한 동일시 : 소위 "영혼"이 나의 본질임에 대한 자각.


이 기준을 적용했을 때, 여러 종교/전통들에서 이야기하는 "신비 체험"들을 나름대로 도표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존중과 예의를 담아서 침묵을 지키려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침내 동일시는 가장 높은 단계로 전환된다 :


"신과의 동일시"


이때의 신, 은 당연히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른바, "나는 내가 아니요, 아버지께서 참된 나이시다.", 그리고 더 명확하게는 : "나는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나이시다." 즉, "나"임의 동일시의 초점이 신에게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적인 거듭남"이다. 주권이 전환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써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것이다. 중심의 전환이다.


무언가를 "깨어서 지켜보는 것" 자체가, 정신 에너지, 그러니까 영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정신은 '관념'이 아니다. 생각은 망상이다. 생각은 정신이 아니다. 생각은 마음이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책을 읽는 것은 관념이지만, 책을 읽고 "깨닫는" 것은 정신이다. 이 초점이 분명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공부는 "초점 잡기"이다. 이것은 수행적 관점이며, 실제로 "성장"은 아래에서 발버둥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와야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정신은 "죄성"에 사로잡혀 있다. 즉, "비활성화"되어 있다. 사람들이 정신이라 부르는 것은 관념, 곧 마음의 작용일 뿐이다. 진리는 관념이 아니다. 진리는 실재이다. 그리고 그 실재는 오직 "영"으로만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평상시에 자신의 정신을 얼마나 자극하고 훈련하는가, 에 따라서 영혼의 성장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 "정신"이 가장 크게 자극을 받는 때는, 결국 "시련과 고난" 한가운데에서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복잡하고 어렵다면, 단 하나만 하면 된다 :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더욱 빛을 사랑하고, 빛을 증거하는 것."


더욱 단순하게는, 하나만 하면 된다 : "겟세마네의 기도." 시험을 통과하는 인간된 마음으로서의 나의 고통을 솔직하게 신 앞에 고백하는 것이다("아버지, 할 수만 있으시거든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그 고통에 나의 정신이 기만당하지 않고("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더 높으신 분, 더 완전하신 분, 더 의로우신 분의 의지를 믿고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다("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우리들에게는 가장 완벽한 원형이 이미 주어져 있다 :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다른 특별한 수행 등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진실로 믿고 행하는 자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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