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말씀의 본질로의 회귀
보편적 복음주의가 이루어지기 위한 근거는 결국 그리스도 중심성의 보편적, 내재적, 초월적 실현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자체가 결국 복음서 중심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전체 세계관의 완결성이 매우 중요하며, 이 관점에서 성경 전체(정확히는 오늘날 정경으로 공인된 구약과 신약의 책들)는 동일한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쓰여진 "같은 위계적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여김받는 것이 공식적인 기독교의 교리이다. 다만 이 구조에 대에서 결국 보편적 복음주의가 갈라설 수밖에 없는 지점은, 성육신의 교리와 복음적 진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일 것이다. 이 지점은 비록 일반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직접적이지 않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어떤 하나의 새로운 이상이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자리잡는 과정에서 그 체계가 근거하고 있는 교리적, 신학적 토대를 명확히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이 중요한 과정일 것이다.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은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세계관적 완결성"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가장 중요한 기반임을 나는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신앙적 관점에서도 그것의 필연성에 대해서 이해하며 또한 존중한다. 이때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를 분별하거나, 혹은 그 분별을 토대로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갖는 권위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비난하거나 거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 "판단 중지"의 입장을 취한다. 즉,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의 나의 이상을 온전히 드러내어 밝히는데 집중할 뿐, 타자를 비판함으로써 자아를 높이려고 하는 의도로써 글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역으로 타자의 자아에 대한 비판을 염려하여, 나의 것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에 주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의 이상을 더욱 선명하고 분명하게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야말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진정한 예의와 존중을 표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보편적 복음주의가 개신교적-개혁적 복음주의를 넘어서는 지점은, 결국 "그리스도 중심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분명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첫째, 성육신의 교리에 대하여, 보편적 복음주의에서는 역사성과 특수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되, 다만 "모든 영혼들 안에서 영적 역사를 실현하는 원형적-영적 신화로서의 권위"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며, 둘째, 그 필연적 귀결로써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이 "완전한 하나"(칼게돈 신조)임을 또한 이정하되, 그 하나됨 안에서도 중심축은 그리스도의 신성이요, 이것이 드러나는 통로로서의 예수님의 인성의 유일성과 특수성을 이해하고 또한 믿는 것이며, 셋째,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 역시도 마찬가지로 "원형적 영적 신화"로서의 권위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모든 영혼들 안에서 보편적, 내재적, 초월적으로 현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목적에 집중하기 위하여, 주변적인 요소들은 모두 "판단 중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보편적 복음주의에서 역사성과 특수성은 개인의 신앙에 맡기는 주변적 요소이자 방편이다. 보편적 복음주의가 "공식적인" 신앙으로써 인정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심으로 한다.
바로 이 점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혼들 안에 보편적, 내재적, 초월적으로 현현하신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며, 이 현현은 "보이지 않는 역사"과 완성되는 것이며, 그 통로로써의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신성"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통로가 없으면 현현도 없다. 그러므로 인성과 신성은 "모두" 중요하다. 이것은 수단과 목적의 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현현의 양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기독교적 진리의 핵심은 결국 신성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며, 이때의 인격은 에고(ego)가 아니라, 육적 체험으로써 신적-영적 체험을 "내주화"하는 것이므로, 그 원형적 상징으로써의 "예수님의 인성"은 여전히 중요한 신앙적 대상이다. 더 쉽게 말해서 결국 "완전하고 유일한 통로를 통해서 현현된 영원하고 초월적인 신성"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역사성과 특수성은 결국 "보이는 것을 믿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역사가 내 안에서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며, 이 지점에서 역사성과 특수성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자체가 어쩔 수 없이 배타성과 특수성을 불러 일으킨다. 내게 있어서도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의 공식적인 입장은, 예수님의 인성의 완전성과 유일성은 "신성이 현현된 밀도의 차이"로 인한 것이지, 인성 그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 신앙으로서의 믿음과, 공적 사역자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나누는 바이다. 보편적 복음주의는 결국 배타성과 특수성을 거부하며, 이를 위해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존중하되, 넘어서야 할 지점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단순화하자면,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야말로 보편적 복음주의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게 "복음서 중심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구약 시대 때만 해도 언약이란 특정한 혈통과 민족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이것이 "전 인류의 복음화"라는 보편성으로 확장된 것이 결국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에서는 종교가 더 이상 절대적인 권위를 갖지 못하며, 따라서 이전과는 달리 "교회를 통한 보편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다. 교회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의 보편성을 위해서는 결국 종교를 넘어선 원형적 진리 그 자체로서의 새로운 토대를 근거로 하여야 한다. 종교의 특수성 그 자체는 여전히 존중되되, 나는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보편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확립된 것은 명확하게 신약 시대가 열림으로 인한 것이며, 그 신약 시대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이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약 시대의 유일한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이것에 대한 입장과 해석과 관점의 차이에서 이단이냐 정통이냐가 나뉘어질 뿐, 그리스도 중심성 자체를 부정하는 한 이미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바로 이 "그리스도 중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안가, 에 있어서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 그리고 더욱이 "종교의 특수성을 넘어서 복음의 전 인류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결국, 원형적 진리 그 자체로서의 신성을 이해하는 것이 열쇠인 바, 이것은 복음을 통하여 선포하신 구원의 내주성을 이전보다도 더욱 중요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 중심주의는 보편적 복음주의에서 필수적인 이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관하여, 기존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성경 전체의 완결된 구조" 안에서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는 교리적 이해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복음서를 해석한다. 그러나 이미 실질적으로 사역의 현장에서는 암묵적으로 비(非) 복음서보다는 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으로써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예전부터 존재하며, 실제 사역의 현장에서 인용되는 말씀들에도 이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이것을 공식화할 것인가, 에 대해서는 신중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복음의 보편화를 위해서는 결국 복음서 중심주의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는 "만인 제사장설"의 극단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의 권위를 여타의 비-복음서들보다 더 높임으로 인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마치 황제의 칙령보다도 지역 영주의 통치가 현장에서는 더 우선시되는 모순적 권위를 보는 것과 유사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을 신앙의 중심에 놓자, 는 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주장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이미 기독교 내에서조차도 개혁적, 진보적 영성 운동들에서 지속적으로 주장되어 온 것이다. 복음서 중심주의를 통하여 확보되는 신앙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첫째, 보편적, 내재적, 초월적 신앙의 실재성에 대한 언약이다. 즉, "그 이름을 믿는 누구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는 "오직 신앙(믿음)"으로 이르는 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둘째, "공인된" 길을 거치지 않고 그리스도께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셋째,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어떤 육적인 조건/요소들에 구속되지 아니하시고 모든 영혼들 안에 직접 나타나신다(보편성, 내재성, 초월성)는 약속이다. 결국, 내가 그리스도께로 직접 나아갈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게로 직접 나타나주신다는 연결성이다. 이 실질적 주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하신 약속에 근거한다. 복음서 중심주의가 무산된다면, 여전히 "특정한 육적 조건/과정 등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다, 는 배타성과 특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양자가 서로 조화롭게 연합할 수 있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배타성과 특수성이 복음의 보편성, 내재성, 초월성과 충돌할 때에, 무엇을 더 "우선시"할 것인가, 에 있어서, 결국 이 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에, 나는 다음의 두 가지의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성경 전체는 "동일한 성령의 영감에 의해 작성된 하나의 완결된 구조"로써 권위를 갖는다. 나는 이것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다만, 그 "하나의 완결된 구조" 안에서도, 위계적 권위는 엄연히 구별되어져야 함을 말하고자 한다. 즉,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인 복음서는 비(非) 복음서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 비 복음서와 복음서가 서로 조화롭게 연합함이 최우선이되, 만약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인하여 양자가 충돌한다면, 복음서를 더욱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둘째, 복음서의 핵심은 결국 "그리스도로 인하여 선포된 말씀의 완전성"에 있다. 말씀은 곧 신성이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1). 따라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선포된 말씀이 "완전한 신성"의 현현이라는 것이, 복음서 중심주의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는 "예수님의 인성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하게 현현케 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은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것"에 근거한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모두 "완전한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칼게돈 신조의 입장을 전적으로 존중한다. 다만, 그 안에서도 신앙의 방법론을 위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제시하고자 하며, 이는 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기존 교리에 대한 "해석적 방법론"으로써 더 낮은 위치임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이 새로운 해석적 관점은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의 신성을 영접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며, 이는 예수님의 인성을 믿음으로써 가능케 한다. 즉, "예수님의 인성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현현케 하는 통로"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복음의 보편성, 내재성, 초월성을 위해서는, 복음서를 통해서 선포된 말씀이 "완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 말씀의 완전성은 곧 1)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이시며, 2)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버지와의 완전한 하나됨에서 비롯하시며, 3) 그리스도의 신성은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난다, 는 3단계의 과정을 통한다는 것이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질 수가 없다. 따라서 "믿음"의 핵심은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거나, 양자를 비교하거나, 양자 중 어느 것이 높은지 낮은지 따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며, 단지 믿는 자 안에서의 "순서"와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성을 통하여 신성과의 "인격적 교감"을 이루며, 이를 통하여 "본체"이신 신성을 영접하는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중요한 것은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것"을 믿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하나됨'에 관한 한, 공관복음서보다 요한복음이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상식이다.
따라서, 나는 "복음서 중심주의"를 위한 내 나름의 근거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다만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견해이자 입장일 뿐, 그 어떤 공식적인 권위도 갖지 못함을 미리 밝힌다.
첫째, 예수님의 "인격"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현현케 하는 완전하고 유일한 통로이다. 즉, "인격"은 통로이다.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과, 여타의 다른 인격들(예: 사도들,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의 위계적 권위가 "같다(동등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다른 인격들과 예수님의 인격이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명백히 성육신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격이 "완전한 하나님의 현현"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통로로써 믿음의 대상이 된다면, 그 인격께서 현현케 하신 완전한 말씀으로써의 복음서 역시도 여타의 "다른 인격들"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에 비해 명확히 더 높은 권위를 가져야 한다.
둘째, 완전한 인격에서는 완전한 말씀(신성의 현현)이 선포될 수 있지만, 불완전한 인격에서 완전한 말씀이 선포될 수는 없다. 만약 불완전한 인격을 통해서도 완전한 말씀(복음)이 선포될 수 있었더라면, 이는 성육신의 교리,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만 완전한 현현과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는 믿음의 필연성에 유의미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즉, "굳이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라도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 완전하게 하나님이 현현하실 수 있다"는 주장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불완전한 인격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은 명백히 완전한 인격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그리스도의 직접 말씀)보다 "더 낮은" 권위를 갖는다, 고 볼 여지를 제공한다.
셋째, 만약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선포하신 말씀(복음서)이 아닌, 비-복음서들이 복음서(직접 말씀)와 동등한 위격적 권위를 갖는다면, 이는 "비-복음서들도 복음서의 말씀과 같은 완전성을 갖는다"는 의미로써 이해될 여지를 낳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미 구약 시대의 복음만으로도 전 인류의 복음화라는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성취될 수 있었을 것이므로, 굳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실 필요가 없었다는 결론을 낳을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완전한 역사는 완전한 말씀으로 인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구약의 복음만으로는 전 인류의 구원이라는 역사가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필연성을 위해서는 복음서는 "완전한 말씀"이어야만 하며, 이와 반대로 비-복음서들은 복음서보다 명확히 더 낮은 위계적 권위를 가져야만 한다.
넷째,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신성의 현현이며, 다른 존재들은 "전부 필요없는" 것이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후로 즉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명확히 오류이다. 따라서, "사역의 완결성"을 위해서라도 성령께서는 다른 여러 "통로"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며, 이 전체들이 "하나의 완결된 구조"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다만, 그 권위 안에서도 "무엇이 중심/핵심/본질인가?"의 문제는 엄연히 존재한다, 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복음서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공관복음서보다 더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는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동등한 위격적 권위를 가지면서도 '더 특별한' 신앙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해석해볼 수 있다. 만약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보다 "중심"이었더라면, 예수님 탄생 이전과 승천 이후의 인류들이 절대 다수일진대, 절대 다수의 인류들은 필연적으로 "중심"으로부터 매우 유리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한다. 그리고 그분의 인성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그분의 신성의 현현 역시도 밀도가 낮아질 수 있었다(만약 인성이 신성보다 중요하다면).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영혼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분의 인성이 직접 지상에 존재했던" 시대보다 결코 뒤떨어진다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분의 인성이 직접 지상에 존재했던 시간은 매우 짧았고, 반대로 그분의 인성이 지상에 직접 존재하지 않은 시간은 인류의 역사에서 절대 다수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성은 변함없이 모든 영혼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이로써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결론은, "신성이 중심"이며, 인성은 "신성을 완전하게 드러내시고 완성하신 것"으로써의 유일성과 완전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그분의 인성이 아무리 특별하고 완전하다 할지라도, 그분 또한 (지상에 직접 존재하셨을 때에는)엄연한 육신을 입은 인간이셨으며, 3차원 시공간의 물리법칙에 영향을 받으셨으므로, 그분의 인성으로는 명백하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 안에서 동등하게 모습을 드러내실" 수 없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육신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신 "완전한 신성"으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보편성, 내재성, 초월성은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인한 것이며, 이것을 육의 차원에서 "완전하게 성취하신" 역사가 인성으로 인한 것, 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복음의 완전성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중심이 된다.
이 논증들을 종합하면, 결국, 1) 복음은 완전한 말씀의 선포이며, 2) 말씀은 곧 하나님의 현현이시고, 3) 그 현현을 완전하게 이루신 계기이자 통로로써의 예수님의 인성은 (완전하신 신성과 마찬가지로)신앙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4) 다만 복음의 내주성은 신성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의도로써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육적 조건"이 그 허용된 위계보다 더 높이 올라서는데 대한 직, 간접적인 피해들이 허용된 도를 넘어서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이비의 핵심은 결국 "육과 영을 분리하며, 육은 부정하고 영은 신성시하는 것(영지주의적 교리)"과, 그리고 "특수한 육적 요소(예: 특정한 인격, 집단, 단체, 교리 등) 그 자체를 신성시"함으로써 그 배타성과 특수성을 사람들에게 현혹시킴으로써 의존케 하며, 이로써 수많은 영적, 육적 고통과 피해를 양산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앙의 중심"의 권위가 이전과 달리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영과 육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육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영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지며, 반대로 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육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과, "구원(복음의 성취)은 올바르게 믿는 그 누구라도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복음적 진리가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주창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는 이전보다도 더욱 강력한 "복음서 중심주의"의 목소리가 권위를 가져야만 한다고 믿는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일상과 내면에서 신을 직접 만날 수 있다, 는 것이다. 이 기나긴 이야기의 끝을, 나는 이렇게 맺고 싶다. 이것은 나의 신앙적 믿음이다. 그리고 용기내어 이와 같이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