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관계
나는 전문적인 교리나 신학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관하여 딱히 공인된 전통적인 용어나 개념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이것을 "신과의 관계성"이라고 종종 말해왔다. 문자 그대로, 신과 나의 관계의 고유한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똑같은 연인 관계라고 할지라도, 각 커플들마다의 고유한 "관계성"이 있지 않은가. 어떤 커플은 개방적이고 활동적인 사랑을 지향하는가 한편, 어떤 커플은 좀 더 내밀하고 친밀하며 교감적인 사랑을 지향하는 것과 같이, 관계성이라는 것은 "고유한" 것이다. 바로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반드시 "하나님과 나만의 고유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 중심축은 하나님께 계신다. 결국 위와 아래가 정렬하기 위해서는 내가 신에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내게로 내려오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나 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 안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성육신의 교리가 단지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것이 실재하는 역사로써 각 개인의 영혼 안에서 "원형적 - 영적 신화"를 현현시키는 직접적인 통롤이자 열쇠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아무튼, 결국 중요한 것은 "신과의 개인적인 만남"일 것이다. 이것은 신비주의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종교 개혁 이후로 개신교 복음주의의 시대가 열리면서 오늘날의 신앙의 핵심이 된 중요한 원칙이기도 하다. 다만 나는 이 "만남"이라는 것에 대해서, 단지 신비 체험만을 가리키는 제한적이고 특수한 용어로써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신과의 만남은 딱히 초자연적인 현상도 아니고 초월적인 체험이 필수불가결한 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날 복음주의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제사장, 그러니까 특수한 "통로"를 통해서만 신과의 교감이 여전히 가능했더라면, 그 말은즉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러한 길을 걸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존재와 삶 자체가 복음주의를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 바깥에서" 신앙의 길을 걸어왔고, 또한 "그리스도를 제외한 그 어떤 중보도 중재도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오직 그분과 나만이 아는 비밀스럽고 은밀한 임재와 역사"들을 나의 영혼 깊은 곳의 지성소 안의 언약궤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이것은 은유이면서 동시에 사실(fact)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는 은유가 사실보다 더 높다. 소위 말하여지는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것은 단지 교리가 아니다. 나는 교리나 신학은 결국 인간이 그들의 눈높이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하여 저지른 교만의 죄성의 결과라고 보며, 모든 영적 진리들은 "실재"하는 것이지, 그것을 마치 설계도를 그리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건축물을 지어올리는 것처럼 그리 개념을 정립하고 체계화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예컨대, "하늘나라"는 실제로 "현상계보다 더 높은 수직선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내면을 통해서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A or B, 라는 현상계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인식체계를 전제로 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 중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나는 이에 대하여, "먼저 믿음으로써, 나중에 실재가 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만약 신비 체험과 같은 특수한 영적 과정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였더라면, 개신교는 이 세상에 등장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어떤 영적인 재능이나 자질이나 능력 따위가 없더라도 오직 의식적 차원에서의 믿음만으로도 충분히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이를 수 있으며, 이것은 비록 쉽고 간편하고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지언정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다. 결국, 복음주의를 열망하면 신비주의는 성령께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반대로 신비주의에 집착하면 결코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복음주의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주의를 이루는 것은 그 주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계시기 때문이다. 결국, 개념과 지식과 언어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는 내려놓되, 자기 안의 깊은 영적인 실재를 일깨우는 훈련(믿음)은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육과 영", 이렇게 전선(戰線)을 긋듯이 이원화할 수는 없다. 자아와 타자와 세계는 모두 "존재"라는 차원 위에서 형성된 것들이며, 무언가가 "존재한다"라는 것은 곧 수평적 차원에서 각 요소들이 서로 분리된 개체로써 그 자체 실체를 지닌 채로 수평선 안에서의 "개체들의 총합"이 펼쳐져 있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애초에 존재 자체가 개념이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존재는 수직적 차원이다. 즉,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는 모든 "개체들의 총합"이 애초에 나뉘어진 적이 없는 "하나"이며, 다만 그 하나는 수직적으로 "여러 층위"들을 형성하되, 그 수직적 층위들이 서로 긴밀하게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구조 전체가 순환하듯이 작동하는 바로 그러한 차원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수평적 차원에서 찾아야 할 물음이 아니라, 수직적 차원의 어느 층위와 자신의 의식이 동기화될 것인가, 의 차원에서 발견되어져야 할 물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의 궁극적인 귀결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것은 일종의 "모범답안"이되, 다만 그 답안을 스스로 직접 체험하여 깨달아야만 비로소 열리는 무엇, 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존재의 수직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평상시의 의식 상태, 곧 에고(ego)와 그 작동체로써의 마음(mind)은 "관념"이라 불리는 차원이며,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육신은 아닐지라도 사실상의 "육신적 상태"에 거의 가까운 무엇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몸이 아프면 마음도 우울한 것이고, 몸이 건강하면 마음도 행복한 것이다. 즉, "육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그 자체가 애초에 마음과 자아가 육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딱 정해져 있는 언어체계로 명확하게 규정해가면서 서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애초에 언어라는 것은 "보이는 차원"의 "수평적-개체적 존재론"의 현상계적 세계관을 토대로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수직적-다층적 존재"를 (소위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바와 같은)명료성으로 지시, 해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바로 이 "관념"의 차원, 곧 자아와 마음의 작동이라는 그 차원을 뭐라고 부르든 간에,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것이 내가 "행위로서의 기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우리들 대부분은 "생각"의 차원에서, 곧 "에고(ego)-마음(mind)"의 차원에서 벗어나는 법조차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인트라넷 망 안에서 아무리 신을 향하여 이메일을 발송(기도)해봤자, 애초에 인트라넷 망은 인류 집단의 무의식 내에서만 통하는 폐쇄적-배타적 구조이기 때문에, 인트라넷 망에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자아, 마음)로는 "신성한 수동태"라는 존재 방식을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존재의 수직선의 상층부"로 진입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치 육중한 곰이나 호랑이더러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이걸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노력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에 보이는 차원에서의 이치를 그대로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적용하는 법을 모른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음(mind)을 잘 쓰면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마음 자체를 벗어내야 한다. 결국 이 점에서, 나는 기독교와 불교가 각각 진리의 서로 다른 이원적 측면을 반영하는 두 중심축이라고 보며, 기독교는 신성의 양(陽)적 측면을 반영하고, 불교는 신성의 음(陰)적 측면을 반영한다고 여긴다. 이때, 양은 음을 통하여 현현되고, 음은 양을 통하여 현현되는 것이다. 빛은 그 본질상 어두움을 밝힐 때 존재가 실현되고, 어두움 역시도 빛이 드러나는 배경이 될 적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질서" 안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치에서, 기독교인들은 "의식과 정신과 마음을 다루는 기술적 방법론과 그 실재"라는 측면에서 불교적 수행(명상, 참선 등)을 보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되며, 반대로 불교인들은 "영과 영혼과 의식의 불꽃을 임계점을 넘겨서 상승시키고 폭발시키는 열망과 기쁨"으로서의 신의 언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양자는 순환적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신성과 진리를 비인격적 원리로써 규정하기 때문에 쉬이 관념론의 망상에 빠질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기독교는 인격적 신성과의 교제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신성의 "본질적" 측면을 놓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점에서 나는 기독교의 언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내게 있어서 기독교는 언어일 뿐이지 그 자체 실재가 아니다. 내게 실재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실 뿐이다. 내 입장에서 기독교, 정확히는 개신교 복음주의에서의 신앙적 방법론의 본질은 결국 "개인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것"에 있다. 이것은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치가 아니었던가. 바로 이 점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교리적, 절차적 동의"로서의 믿음만을 강조한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나의 정신과 의식과 내면에서 실제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러한 "실재"로서의 신앙을, 믿음을, 어떻게 이루는지를 자세히 안내하지 않는다. 그저 교리적 동의만을, 형식적 찬양과 예배만을 반복할 뿐이다. 이에 오늘날 크리스천으로서의 신앙은 놓지 못하되 교회는 가지 않는 소위 "가나안 성도"의 비율이 적게는 1/4, 많게는 1/2 가까이 된다는 통계치가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의 핵심이 결국에는 "교리적 절차적 형식적 믿음"에 치우친 나머지 기독교 신비주의의 깊은 전통을 토대로 한 진정한 복음주의의 본질을 외면한 대가라고 본다. 결국,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직접 교제하시고 교감하시고 모습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이지, 하나님이 곧 "에고(ego)적인 분"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에고의 인식, 관념의 토대 안에 하나님을 가둔다. 이 때문에 입으로 "주여 주여"하면서 정작 그 자신의 존재 안에서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거부하는", 존재론적 모순 안에 처하게 된다.
이 점에서, 나는 믿음이란 결국 "신과의 개인적인 만남 그 자체"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그저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고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이 다가 아닌, "오직 자신의 내면(의식) 안에서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 자체를 나의 영혼이 깊이 체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을 "눈으로 보아야"(요14:8) 한다. 사람은 그 죄성적 존재의 본성상,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머리로 개념으로 열심히 아멘을 외쳐봤자, 결국 내 영혼이 실제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다 부질없는 헛짓거리일 뿐이다. 나는 이것을 비난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실일 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가 없으며, 이에 "예수님의 인성을 통로 삼아서 성부께서 스스로 모습을 낮춰 우리 안에 현현하신 그리스도"라는 인격적 신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닫힌" 영혼이 열려서 그리스도와 직접 만날 수 있게 하는 영혼의 성장과 변화와 완성의 전(全) 과정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내맡겼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잡신들이나 귀신들이나 초자연적인 힘이나 능력 따위에 의지하게 되는 순간, 소위 "우상을 숭배하는" 순간, 그 영체들은 언뜻 힘이 강해 보일지라도 결국 한 영혼을 신과 하나되게 하는 본질적 차원에서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지는 못하며, 반대로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녀로서의 영혼이 내뿜는 "빛"을 감히 해하거나 넘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영적 사실이다. 이에 나는 "처음부터 가장 높은 분께 귀의"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보편적, 원형적 영적 역사이다. 그리고 이 역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단 하나의 "통로"를 여시기 위하여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이라는 인류 구원과 대속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이것은 원형적 영적 신화이면서 동시에 영적 세계에서는 사실(fact)보다도 압도적으로 높은 권위를 차지한다. 믿음은 결국 "마음과 자아의 관념적 차원"을 내려놓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재"와 접촉, 연결되기 위한 "시도"이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처음에는 잘 맞지 않다가, 다이얼을 조금씩 돌리면서 시도하다 보면, 기존의 "잡음 가득한 주파수"(마음, 자아, 무의식)에서부터 "선명하고 명확하고 깨끗한 주파수"(영, 영혼, 순수의식)로 정확히 정렬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전자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오직 후자로서만 하나님을 "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전자의 차원에 거할 때, 유감스럽게도 에고로는 직접 신을 만날 수 없기에 우리는 "제사장"을 필요로 한다. 성경과 말씀과 교리와 신학과 해석과 지식과 관념과 전통과 의례 따위의 "신성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잡다한 중재들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차원이 될 때, 마침내 그는 종교를 초월하여 "신성 그 자체"에만 깊이 거하게 된다. 나는 "모든 영혼들이 직접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신과의 개인적 관계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나의 믿음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각 영혼들이 에고의 열등한 의식 상태에서 벗어나, 영혼의 순수한 의식 상태로 전환하는 법"을 훈련하여 터득, 성취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기도와 묵상이 있는 것이다. 기도는 에고에 갇힌 나의 열등한 의식을 해체함으로써 "의식의 주파수를 (신에게 가까이)높이고자 하는 훈련"이며, 묵상은 곧 "신성의 높은 진동수가 나의 낮은 의식 안으로 내려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훈련"이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양자가 순환하여 어느 순간 연합할 적에, 마침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개인적 영적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지가 부활에 관한 한, 오늘날의 교회는 골고다 언덕이라는 실제 장소와 시간에서 이루어진 역사성과 특수성만을 "믿도록(동의하도록)" 개념적, 교리적, 신학적 동의만을 계속 강조한 탓에, 이를 "믿음"으로써 내 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나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영적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거나, 심지어 무시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애초에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요13:36, 14:10-11, 14:20, 14:23 등)은 "하나님의 뜻"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곧 그대로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위격을 갖는다.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거처를 함께할 것"(요14:23)이라 하셨던, 바로 그 "내 말을 지키리니"에서의 "내 말(말씀)"이란,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복음주의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되는 것", 이것이 그분의 유일한 뜻이셨다.
나는 이 하나됨의 차원에서, 결코 "집단성" 안에 속한 상태에서는 신을 만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집단성은 애초에 에고의 본성이자 실체 그 자체다. 에고는 "집단성에 대한 동일시"로 움직인다. 따라서 집단성이라는 관념에 지배당하는 한, 그 상태의 의식으로는 "실재"와 교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과 영혼을 성전(聖殿) 삼으셔서 그 안에 거하시며, 그리고 그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분을 영접하는 것은 오직 철저하게 나 홀로 이루어야 하는 여정이지, 그 성전 안에 다른 누군가와 손 잡고 함께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문은 오직 하나뿐이며, 그 문을 통과할 자격은 오직 나에게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중재도 받을 수 없음이요, 오직 그리스도를 제외한 그 누구로부터의 중보도 대속도 다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참된 신앙은 "홀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 하나뿐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 그리하여 그분을 홀로 영접하는 것. 두려운가? 무서운가? 당연하다. 사람이 신 앞에 서는데 어찌 평온할 일이겠는가. "저" 모세조차도 "신을 벗으라"는 그분의 음성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하나님은 천둥 같은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또한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영혼들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너무나도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것은 신성의 이원성이다. "신성의 신성한 이원성"이다. 말장난 같은가,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도 이런 식의 표현들을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오직 영적으로 철저히 혼자가 되어라. 나 혼자가 되어서, 나의 가장 순결한 영으로 그분 앞에 서고, 나의 가장 진실한 영혼으로 그분의 품에 안겨라.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결코 외면치 아니하실 것이며, 그분께서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그분의 기쁨이 되는 자녀를 결코 내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 하늘의 만사를 다 제쳐두시고는 "집 나간 탕아"가 처참한 몰골을 하고서 용기 내어 집으로 돌아오시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실 것이다. "친견"을, 허락해주실 것이다.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두려운가? 저 "제사장"처럼 나는 위대하지 못하며, 저 "목회자"처럼 나는 올바르고 성실하고 능숙하지 못하며, 저 "선지자"들처럼 나는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는가? 그래서 "나는 안 돼."하면서 그분 앞에 서는 것을 망설이는가? 두려워 말아라, 그분은 의로움보다 부끄러움을 더 사랑하시며, 능숙함보다 절실함을 더 사랑하시며, 위대함보다는 가난함을 더 사랑하시는 분이다. 나의 죄는 곧 그분의 기쁨이다. 나는 나의 죄를 스스로 구원치 못하나, 그분은 "한 음성"으로 일거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내 영혼 안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매 그 음성 하나로 인하여 나의 뿌리 깊은 어두움 전체가 능히 밝히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유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은유가 사실보다 더 높다.
어느 순간, 나의 영이 하나님을 영접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어느 순간, 나의 영혼이 그분과 실제로 교감하였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최초의 전환이다.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재한다는 증거가 내 안에 열리는"(히11:1) 순간 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믿음이 내 안에 너무도 선명히 자리잡는 바로 그 기적의 순간 말이다. 그 "첫 음성을 듣는 것" 하나만 하면 된다. 그리하면, 나머지는 내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만 하면, 내가 그분을 만나기 위하여 산 정상을 오를 필요가 없음이요, 그분께서 친히 나의 내면과 영혼 안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나를 만나기 위하여 임재해주실 것이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해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나의 영혼이 그분을 온전히 영접할 수 있도록 충분히 가르치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품에 안아 성장시켜주실 것이다. 나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 하면 된다. 그것 하나만 하면, 성령께서 능히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것은 나의 증언이다. 그때, 마침내 "교회의 역사"는 "나의 역사"가 되며, "교회의 임재"는 곧 "나만을 위한 은밀한 임재"가 된다. 나는 더 이상 수십억 신도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선 탓에, 나 같은 건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슬픔 속에 묻히지 않아도 된다. 오직 내가 홀로 그분을 영접할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그분이 오시기만을 내가 늘 기다리고 준비하매, 예고하시지 않은 때에, 천사들조차도 동행치 않으시고 문득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나란히 걸으실 것이고, 내 손을 잡으실 것이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실 것이며, 내 영혼에 생명의 말씀을 속삭여주실 것이며, 나와 함께 웃으실 것이고, 나와 함께 슬퍼하실 것이며, 나와 함께 영원의 찰나를 유영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둘만의 은밀하고도 비밀스러운 임재의 순간들이, 그 역사들이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그 순간들이 곧 관상이 되며, 그 소중한 관상들을 내가 내 성전의 언약궤 안에 소중히 보관할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순간들에서, 신앙은 곧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하고 고유한 관계"가 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임재와 역사들이 내 안에 넘쳐흘러야 한다.
그것들이 곧 "증거"가 되매, 나는 신과 홀로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