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침묵 속의 불꽃
나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앞에는 더 잔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또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안에 남아 있던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짓밟듯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이번에는 몸의 상처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상처였습니다.
그 시작은 친구 집이었습니다.
주말이면 나는 그곳을 찾았습니다.
친구와 함께 있으면 잠시나마 마음이 편해질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엄마가 아파서 함께 장애 시설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친구에게는 따뜻하고 안전한 집처럼 보였지만, 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공포의 공간이 되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불안 같았습니다.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오는 듯한 낯선 기운, 설명할 수 없는 냄새, 낮게 깔린 목소리, 차갑게 스치는 시선…
작은 틈마다 불길한 그림자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불려 들어간 방 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몸은 얼어붙었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싫다”라는 말은 목구멍에서만 맴돌았을 뿐,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습니다.
오직 심장의 고동만 귀를 찢듯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방을 나왔을 때,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대로였습니다.
햇볕은 창문 너머로 여전히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내 안의 시간은 멈춰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장의 한마디 ―
“누구에게라도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 차가운 경고는 나를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게 평범해 보였습니다.
시설의 원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고,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듯했습니다.
주민들은 그를 믿었고, 아이들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본 건 전혀 달랐습니다.
그의 웃음 뒤에는 낯선 그림자가 숨어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다정한 어른으로 보였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다른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며, 나를 침묵 속에 가두었습니다.
주말마다 친구 집에 가는 길은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대문도 없는 입구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마음이 저절로 굳어졌습니다.
겉으로는 단순히 친구와 노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속에서는 또다시 공포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그 사실을 숨긴 채 평범한 척 살아갔습니다.
책상 위의 교과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교실의 웃음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 같았습니다.
친구들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하루는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학교로 돌아가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속에 섞여 있어도 나는 점점 작아졌습니다.
몸에서 풍기는 병원 냄새 때문인지 나를 멀리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괜히 나를 조심스레 대하는 시선은 내 마음을 더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몇몇 친구는 여전히 곁에 있어 주었지만, 그 따뜻함마저 오래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내 웃음은 종이처럼 얇아져 쉽게 찢어졌고, 사소한 말에도 금세 무너졌습니다.
병원에 가는 일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약봉지를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 마음 한쪽은 늘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소독약 냄새는 족쇄처럼 나를 옭아맸지만, 나는 묵묵히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침묵 속에서도 작은 방법들을 찾아냈습니다.
책장을 손끝으로 스치며 넘기거나,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불꽃을 붙잡았습니다.
그 불꽃은 흔들렸지만, 완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불꽃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였습니다.
때로는 친구와 함께 웃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나는 숨을 고르고 작은 행동으로 하루를 버텼습니다.
그 불꽃이 살아 있는 한, 나는 여전히 나라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면서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짐했습니다.
“세상에 말하지 못하더라도, 내 안의 불꽃만큼은 꺼뜨리지 않겠다.”
그 다짐은 내 안의 시간을 이어주는 힘이 되었고,
13살의 나는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