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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무게와 두께에 대해

아직도 미안한 작은 딸에게

by 아는 사람 가탁이

네가 초등학교 2학년때이었나 봐... 퇴근 후 옷도 벗지 못한 채 저녁 준비를 하려고 서두르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으려다가 알 수 없는 서늘함에 전화를 받았더니,

" ○○이 엄마라요? 1층으로 내려와보소 퍼뜩"

엄마가 너의 엄마가 맞다는 확인 대답도 듣지 않고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를 끊더라. 황당하고 난감하긴 했지만 너의 이름과 너의 엄마임을 물어오는 말에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지

"엄마..."

불안과 두려움으로 온몸을 감싼 네가, 네 또래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할머니인듯한 분의 손에 한쪽 팔을 맡긴 채 엉거주춤 서 있었어

무슨 일이냐고 채 물어보기도 전에 신경질적이고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엄마에게 날아들더구나

"자식교육 잘 시키소. 하이고 얘가 글쎄... 자세한 건 애한테 들어보소 난 말 하기도 싫네"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던 네가 소리치더라

"아니야 아니라고 할머니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무조건 □□이 말만 믿고..."

울음만 절규반으로 쏟아놓는 너의 말을 요약해 보면,

놀이터에서 몇 번 같이 놀았던 □□이가 전날 자기네 집에 장난감이 많으니 같이 가서 놀자고 했고, 신나게 놀고 왔는데 오늘 할머니께서 집에 오라고 하셨고, 맛있는 거 먹고 친구랑 또 놀 생각에 한걸음에 달려갔더니 할머니께서 널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시며 바른대로 말하라고 윽박지르시더라고.

엄마는 너의 말을 대략적으로 알아듣고는 할머니께 여쭈어 보았어.

"우리 애가 무슨 잘못이라도?"

"애가 영악스럽기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 게... "

노여움과 거리낌 가득한 □□할머니의 말을 요약해 보면,

□□아빠 지갑이 애들 놀던 방에 있었는데 만 원짜리가 한 장 빈다는 거였어. 아빠는 의사요, 엄마는 간호사인 □□이는 아빠지갑에 절대 손댈 아이가 아니니 같이 있던 네가 가져간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으로만 이루어진 추측을 기정사실화하여 막무가내로 ○○이, 너를 다그친 것이었어.

엄마는 기가 막혔단다. 그때까지 엄마는, 할머니처럼 나이가 많아지면, 경험도 감정도 넓고 깊어져서 최소한 너나 □□이 둘의 얘기를 들어는 보셨으리라 생각했거든. 나이가 많아지면, 믿음도 두꺼워지고 깊어진다고 생각했거든

차근차근 따위는 무슨, 그렇게나 막무가내인 어른의 말을 연하고 여리기만 한 너희가 어른이니까, 어른의 말이니까 무조건 듣고, 따라야 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 애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요? 애 얘기 들어는 보셨고요?" 앞뒤 가릴 틈 없이 할머니에게 발끈했지. 아빠와 엄마가 의사와 간호사는 아니었지만 우리 딸들에게 최소한 거짓말하는 걸 가르치지 않았다는 자신감은 확고했거든. 아무 말 않고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로 □□이의 손을 잡아채고 바람소리를 내며 가버리는 할머니를 보고 엄마도 너의 손을 끌듯이 잡고 집으로 와버렸어. 방문을 닫고 언니에게는 한 번도 써보지도 않은 싸리나무회초리(너는 몇 번의 경험이 있었지, 언니한테 막무가내로 대들다가)까지 네 앞에 내놓으며 싸늘하게 너를 쳐다보고는 윽박지르듯 말했지

" 바른대로 말해, 거짓말하면 경찰관아저씨 오시라고 할 거야 "

'설마'하는 마음에, 그때까지는 경찰관이라는 호칭에도 긴장할 만큼 어린 너에게 어설픈 협박으로 진실을 알아내려고 했지.


"엄마도 나 안 믿어? 못 믿어? 엄마는, 엄마니까, 나 믿어야지 나 믿어줘야지 나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난 아저씨 지갑 본 적도 없다고!"

눈으로 쏟아낼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을 쏟아내며 울부짖는 너의 그 말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더라. 엄마도 널 믿지 못하면 세상 누가 널 믿어줄까... 그래 엄마는, 엄마니까 무조건 널 믿기로 했어.


며칠 뒤, □□이가 너랑 친구 못 한다고, 할머니가 친구 하지 말랬다고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네게 엄마가 소리쳤지.

"잘됐네 엄마도 너 □□이랑 친구 하지 말라고 하랬더니, 잘됐어. 너도 거짓말하는 친구 말고, 거짓말하더라도 거짓말했다고 얘기할 줄 아는 친구 만나!"


매년 어린이날이면 그 일이 생각나서 몇 년마다 한 번씩 엄마는 네게 슬쩍 물어봤어 행여나 엄마의 믿음이 왜곡된 진실이었을까 봐, 널 조금은 덜 믿었나 봐...

그때마다 그날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단번에 상기시켜 주는 너를 보며 엄마는 믿음의 무게와 두께에 대해 자꾸 되새기곤 했어. 네가 자라는 시간만큼 자라지 못했던 엄마의 믿음이 미안해. 그리고 믿어줘!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무조건 널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야, 바로 엄마야 ○○아!

우리 딸이 제일 좋아하는 얇고 바삭하게 부친 고구마전♡


# 믿음# 친구# 어린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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