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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너의 손가락과 한숨

큰 딸에게

by 아는 사람 가탁이

이젠 기억이 희미해져서 몇 시쯤이었는지, 무슨 요일이었는지, 그 시간에 왜 엄마가 그곳에서 너를 보았는지 알 수가 없어. 엄마 컨디션이 좋지 않아 휴가를 냈는지, 조퇴를 했는지 그랬어. 그래도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게 있단다. 지금도 그날 그 시간을 떠올리면 가슴 밑바닥에서 차올라오는 게 있어. 네가 살 때 봄이었나 봐 그날이...




너의 그 귀엽고 보드라운 손가락,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그곳에 그리던 그림 그리고 네 마음...


동그라미였는지 무슨 모양인지도 기억나지 않아.

종일반으로 다니던 어린이집에 있는 딸이 보고 싶었고, 엄마를 보고 한달음에 엄마품으로 뛰어들어올 모습만 기대하며 어린이집에 사전 연락도 않은 채 네가 있는 곳을 찾았지.


' 점심 먹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 친구들과 한참 놀고 있겠네'


엄마는 책이나 TV를 너무 믿고 있었나 봐. 그게 현실일 거라 믿었나 봐. 오후 세시쯤이었을까 이곳저곳 기웃거려 봐도 아이들도 너도 보이지 않았어.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던 너를 찾아 헤매던 엄마 눈에 들어온 아이가 있었어

작은 창으로 겨우 들어온 햇살이 내려앉아 있던 방구석에서 창문 한 번 보고, 물끄러미 방바닥에 들어온 햇살 한 번 보고 손가락도 한 번 보더니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가 있었어. 그림을 그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어 창문을 쳐다보고 여린 숨을 내쉬고, 엄마의 시선이 창문으로 쫓아가면 어느새 방바닥으로 내려온 시선은 손가락으로, 다시 손가락에서 방바닥으로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그림 또 그림...


그 아이는 바로 너였어, 엄마의 첫 번째 보물.


너를 부를 수 없었어. 부르기는커녕 네가 엄마를 볼까 봐 들었던 뒤꿈치를 내리고 몸을 돌려버렸단다. 얼마나 외로울까,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 나른한 오후에 손그림으로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고 있었을까...

온몸이 아프더라 날카로운 송곳이 온몸과 온마음을 사정없이 찌르고 쓸고 지나가서 한참을 꼼짝 못 한 채 서 있었어. 너를 등뒤에 두고, 혹시 엄마 숨소리를 들은 네가 엄마를 부르기라도 할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어.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를 하는 중간에 바닥에라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지 모른다고, 다른 방에 있거나 늦잠에서 깬 친구들이 와서 너의 외로운 동그라미를 어지럽히며 소란스럽게 될 거라고, 꼭 그래야 된다고 다짐 같은 기대를 하며 울고 또 울었어.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날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원장선생님이 한달음에 달려오셔서 엄마의 모습에 당황해하셨어. 눈물범벅이 된 두 눈이 부풀 대로 부풀어 있었겠지

"몇 명 안 되는 종일반 친구들이 오늘따라 일찍 갔네요"

그날 엄마는 알게 되었어 종일토록 어린이집에서 생활하는 아이는 너와 너보다 한 살이 많았던 원장선생님 아들뿐이었음을, 매 순간이 그리움으로 가득했을 너의 외로움을 그제야 제대로 알게 된 거야.


무엇을 위해 살아간다고 너를, 너의 마음을 너의 외로움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었을까...

아무리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다고 해도 너무 서툴고 모자람 많았던 엄마라서 많이 미안해...


퇴근해서 막 들어오는 아빠에게 울부짖었어

"내일 출근해서 사표 쓸 거야. 직장이 뭐라고, 돈이 뭐라고, 좀 적게 먹고 적게 쓰지 뭐. 내 새끼 외롭게 만들면서까지 돈 벌기 싫다고, 나 내일 무조건 때려치울 거야! 그리고 당신도 남한테 인심 쓰는 거 그만해! 등신같이 남한테 좋은 소리 들으려고 내 새끼 눈에, 마음에 눈물 흐르는지도 모르고, 흑"

영문도 모르는 아빠는 눈동자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불안해했지. 남의 편만 드는 아빠에 대한 원망이, 끝이 나지 않는 가족들 치다꺼리에 지쳐버린 서글픔, 너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더해져서 폭탄처럼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던 거야.




엄마는 아직도 딸에 대한 미안함이 지워지지 않았나 봐

그날을 생각하면 너의 여린 손가락과 그 손가락으로 그리던 그림과 너의 한숨 소리와 함께 숨쉬기 힘들 만큼 목이 메어오는 걸 보면...


딸! 엄마가 미안해

엄마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엄마가 죽더라도 사랑하고 또 사랑할게.


기억나니? 고등학생시절 네가 너를 향해보낸 외침을...
험한 파도를 타고 뛰어 오르는 돌고래처럼 살아가길, 엄마가 딸에게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

#딸에게 #사랑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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