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의 나는 드라마나 영화의 슬픈 장면을 보거나 책 속의 아픈 문장을 읽어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미세먼지가 가득한 것처럼 마음이 뿌옇고 답답했다. 그랬던 나를 결국 목놓아 울게 만든 드라마의 한 장면이 있었다.
드라마 '대행사"의 마지막 회 장면에서, 임원동료가 되어버린 후배와 치졸하고 비겁한 경쟁을 하다 결국 패배한 후 직장을 떠나게 되는 선배에게 업무 후임이던 다른 후배가 그의 등으로 던진 말 한마디에 막혀있던 울음보가 터져버린 것이다.
"존경받는 선배로 남아주십시오" 그 한마디가 독기와 앙심을 품은 채 떠나던 선배의 마음을 뒤바꿔 놓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화면이 흐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다. 문서상자 하나를 들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채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이미 내 콧등은 시큰거리고 있다가 후배의 진심이 담긴 한마디에 왈칵 솟구쳐 버린 것이다.
결코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이를 깨물며 걸어왔던 그 길이 생각났다. 나 또한 패배를 인정하지도 인정할 수도 없었고 존경을 이야기하는 후배나 뒤바꿀 마음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건강 때문에 모든 걸 놓고 떠나야 했던 일 년 전 내 모습이 드라마에서 떠나는 선배의 모습에 투영되며 같이 뒤돌아보았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선배는 울지 않았지만 현실에서 나는 울었다. 드라마에서 선배는 비겁하긴 했지만 싸워볼 수 있었고, 몇 가지 선택의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내게는 싸워볼 수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저 몇 개의 옷가지를 넣은 작은 캐리어 하나를 앞만 보며 끌고 걸어가는 것만 할 수 있었다. 드라마에서 후배의 한 마디에 선배의 뒷모습은 편안하고 당당해졌지만 그때의 내 뒷모습은 무릎이 꺽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뻣뻣하고 불안했으리라. 진심이 아니어도 좋았을 누군가의 한마디가 그때의 내 뒷모습은 간절했으리라...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드라마 속 선배의 모습을 한 내가, 멍한 시선으로 눈물범벅이 된 나에게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