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남인 줄 알았다면, 그와 잠자리하지 않았을 텐데

결혼을 약속한 남자의 기망과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by 대표변호사 이환권

"제가 바보였죠..."


그녀가 건넨 서류는 A4 용지 스무 장이 넘었다. 호텔 영수증, 카카오톡 대화 캡처, 선물 구매 내역. 1년 6개월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증거들이었다.


30대 후반 미혼 여성이었던 그녀는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기 시작했다. 매주 3~4회씩 만나 잠자리를 했고, 집도 함께 보러 다녔다.


그렇게 사랑을 키워 나가던 중, 그에게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인빙자간음죄는 폐지되었기에, 형사처벌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다.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닙니다. 속인 사람이 나쁜 거죠."






명절엔 만날 수 없는 남자친구


그녀는 소개팅에서 자리에서 그를 알게 되었다. 첫 만남부터 남자는 적극적이었다. 술자리가 끝난 새벽, "너를 더 알고 싶다"며 호텔로 향했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첫 관계를 가졌다. 이후 남자는 매일 전화를 걸어왔다. 직장 앞까지 마중 나왔고, 주말에는 캠핑도 함께 갔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과일 선물을 보낼 만큼 적극적이었다.


관계는 깊어졌다. 일주일에 서너 번 만났고, 그때마다 잠자리를 했다. 남자는 "결혼 준비 시작하자",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 닮았으면 좋겠어?"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실제로 전셋집으로 삼을 아파트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명절엔 절대 만날 수 없었다. "일 때문에 바빠서"라는 핑계였다. 주말에도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이 많았다. 집 주소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OO동에 산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녀가 가진 정보는 명함 한 장뿐이었다.


1년 6개월이 흘렀다. 그녀는 점점 불안해졌고,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질문할 때마다 남자는 말을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자의 차 내비게이션에서 낯선 주소를 발견했고, 추궁했다. 그제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 유부남이야. 아이도 있어."






소장에 담아야 할 것


소장을 쓰기 시작했다. 증거는 충분했다. 영수증, 사진, 메시지, 선물 기록. 하지만 단순히 사실관계만 나열해서는 부족했다. 의뢰인이 겪은 고통의 본질을 법원에 전해야 했다.


그녀가 잃은 건 돈이 아니었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도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할 권리.' 그것이 핵심이었다.


소장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썼다.


"피고는 오로지 욕정 해소를 목적으로 원고를 기망했습니다. 원고가 미혼 여성으로서 가진 혼인과 출산에 대한 소중한 꿈을 이용했습니다. 원고의 신뢰를 철저히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반년 후, 판결문이 도착했다. 위자료 1천만 원. 법원은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를 인정했다.


성적자기결정권침해.png






빼앗긴 선택의 자유


성적자기결정권.

이 권리는 각자가 자신만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바탕으로 성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그에 따라 스스로 상대방을 선택하고 성관계를 가질 권리를 말한다. 상대가 아무리 간절히 애정을 표현하며 관계를 요구해도, 받아들일지 말지는 오롯이 본인의 결정이다.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본인이 지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자유로운 의사에 기하여'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당한 간섭 없이, 제대로 알고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서 상대방이 기혼자인지 미혼자인지는 성관계를 맺을 상대를 선택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되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혼인 사실을 적극적으로 숨기거나, 상대방이 미혼으로 착각하도록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유도하는 행위는 모두 상대방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가 된다.






상간녀소송과의 관계


이런 사건을 상담하면 의뢰인들이 또 하나 두려워하는 게 있다.


"유부남의 아내가 저한테 상간녀소송을 걸면 어떡해요?"


걱정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 소송을 통해 당신은 보호받을 수 있다. 법원에서 피해자로 인정받으면, 상간 소송에서 문제 되는 '고의'가 없어진다. 상대가 유부남인 줄 몰랐다는 게 입증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손해배상 소송을 먼저 제기한 경우, 상간 소송이 아예 들어오지 않거나 기각되는 사례가 많다.






속인 사람이 나쁜 것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진지하다.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면 더욱 그렇다. 그 진심을 이용해 기혼 사실을 숨기고 관계를 가진 자. 그것은 명백한 권리 침해다. 유부남인 줄 알았다면, 당신은 그와 잠자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선택권을 빼앗긴 것이다.


용서하지 마라. 손해배상을 청구하라. 이 글이 그 시작이 되길 바란다.





사람과 법 사이 그 애매한 틈에서 이야기를 씁니다.

법무법인(유한) 이현, 대표변호사 이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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