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7.9km의 서행, 그리고 교특법 치상의 굴레

합의조차 거부당했던 어느 운전자의 무죄 기록


누구도 가해자가 되리라 예감하며 차에 시동을 걸진 않는다. 하지만 운전석에 앉는 순간, 우리는 본의 아니게 잠재적인 가해자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아무리 조심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순간이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우리 사무실에 찾아온 의뢰인의 눈빛이 바로 그 불가항력의 불운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결코 난폭한 운전자가 아니었다. 골목길이라 시속 20km도 안 되는 속도로 조심스럽게 운전했을 뿐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보행자와의 충돌은, 그의 그 모든 조심성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법은 운전자에게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주의 의무를 묻는다. '차 대 사람 사고는 무조건 차가 잘못'이라는 통념은 법정 밖 세상뿐 아니라, 때로는 수사기관의 시선 속에도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도저히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까지 책임을 묻는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믿으며 긴 시간 법정에서 싸워왔다.





합의조차 거부당한 막막함 속에서


의뢰인은 성실한 가장이었다. 사고 직후 그는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보험 처리를 약속했고, 피해자 측과 원만히 대화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대화는 단절되었고, 사건 내용에 대한 논의 없이 오직 금액만이 오가는 차가운 흥정만이 남았다. 급기야 엄벌 탄원서까지 제출되었다는 소식에 그는 절망했다.


"변호사님, 정말 그 순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짧은 거리에서 어떻게 멈출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항변은 변명이 아니라, 물리적 한계에 부딪힌 인간의 비명에 가까웠다. 억울한 이를 돕는다는 것, 그것은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절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이 사건을 감성이 아닌 과학으로 풀어보기로 했다.





숫자가 말해주는 그날의 진실


우리는 도로교통공단에 사실 조회를 신청했고, 영상 분석 결과 사고 직전 차량의 평균 속도는 시속 17.7km 정도로 측정되었다. 이면도로 제한속도인 30km/h의 절반을 갓 넘는 수준으로, 누가 봐도 조심스러운 서행이었다.


도로교통공단.png



시속 17.7km로 달리는 차가 위험을 인지하고 브레이크를 밟아 완전히 멈추기까지, 물리적으로 필요한 최소 거리는 정지거리 산출식에 따라 약 4.8m에서 6.3m다.


정지거리 산출.png



그런데 CCTV를 분석해 보니, 피해자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차량과 피해자의 거리는 고작 5.8m에 불과했다. 이미 멈출 수 있는 한계점을 지난 거리. 인간의 반응 속도로는, 아니 그 어떤 베테랑 운전자가 왔더라도 피할 수 없는 사고였던 것이다.


게다가 피해자는 차량의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달려와 부딪혔다. 옆에서 달려드는 것까지 막아내라는 것은, 법이 강요할 수 없는 신(神)의 영역이다.





법이 상식 위에 서야 하는 이유


재판부는 결국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었다. 피고인이 주의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이 사고는 예견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이었음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교특법치상무죄.png



판결문을 받아 든 의뢰인의 안도하는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그저 "합의하고 선처를 구하자"며 관행대로 처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평생을 '사람을 다치게 한 죄인'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나는 종종 후배 변호사들에게 말하곤 한다. 변호사의 일은 의뢰인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이 부당한 무게는 아닌지 저울질해 주는 것이라고.



법무법인 이현을 설립하며 국민로펌이라는 다소 거창한 비전을 내걸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재벌이나 권력자가 아니더라도, 평범한 이웃이 법의 보호 아래 억울함을 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처럼 기계적인 법 적용이 한 사람의 인생을 옥죄어 올 때, 우리는 기꺼이 그 틈새를 파고들어 갈 것이다.


헝클어진 당신의 일상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 그것이 사람 중심을 표방하는 우리 로펌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사람과 법 사이 그 애매한 틈에서 이야기를 씁니다.

법무법인(유한) 이현, 대표변호사 이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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