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뒤집어써주면 돈을 드리겠습니다

회사의 비리와 맞선 어느 기술자의 실업급여 부정수급 분쟁


변호사로 살다 보면, 법전에는 나오지 않는 인간의 민낯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씁쓸한 순간은 돈 앞에서 양심이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다.


2019년, 50대 초반의 엔지니어 조 씨가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평생을 기술자로 성실히 살아온,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450만 원의 실업급여를 부정수급했다는 혐의로 피고인석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기록을 들여다볼수록, 이 사건은 단순한 실업급여 부정수급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는 거짓말을 덮기 위해 힘없는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갑의 횡포로 인해 발생했다.





두 장의 계약서, 무엇이 진실인가


사건의 발단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 씨는 부산의 한 중소기업에 2년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2017년 9월, 계약기간이 만료되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퇴사했다.


계약만료로 인한 퇴사는 실업급여 수급 사유에 해당한다. 그는 절차대로 실업급여를 신청해 약 450만 원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1년 뒤, 노동청 조사가 시작되면서 불거졌다. 회사 측이 조 씨 몰래 그를 정규직으로 신고해 두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규직을 채용해야만 정부로부터 전문인력 채용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조 씨의 서명을 복사해 가짜 정규직 근로계약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했고, 지원금을 타냈다.


이로 인해 노동청의 전산망에는 모순이 발생했다. 한쪽에서는 정규직으로 지원금을 타먹고, 다른 한쪽(조 씨)은 계약직 만료로 실업급여를 타간 상황.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벌금은 회사가 내줄 테니, 당신이 덮어써라"


진실이 밝혀지면 회사는 곤란해진다. 부정 수급한 지원금을 뱉어내야 하는 것은 물론, 향후 지원 사업에서도 배제되고, 최대 5배의 제재부가금까지 물어야 한다. 그 금액은 약 9,000만 원에 달했다. 반면, 조 씨가 실업급여 부정수급을 인정하면? 조 씨가 토해낼 돈과 벌금은 약 700여만 원 수준이었다.


회사의 계산기는 빠르게 돌아갔다. 9,000만 원의 손해를 보느니, 조 씨를 범죄자로 만드는 게 싸게 먹힌다는 계산이었다. 회사의 대표는 조 씨에게 연락해 황당한 제안을 건넸다.



"회사가 걸리면 9천만 원을 물어내야 합니다. 당신이 실업급여 부정수급을 인정하면 700만 원 정도면 끝납니다. 그 벌금, 회사가 다 내드리겠습니다. 위로금으로 300만 원 더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전과자라는 낙인을 찍는 일을, 고작 비용 절감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었다. 심지어 담당 수사관조차 "회사에서 벌금을 내준다니 그냥 인정하고 기소유예받는 게 좋지 않겠냐"며 회유했다. 개인에게 시스템과 조직은 너무나 거대하고 위협적인 벽이었다.


조 씨는 억울했다. "변호사님, 저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평생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인정하고 범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증명하기 위한 싸움


법무법인 이현의 철학은 사람 중심이다. 억울한 개인이 거대 조직의 논리에 희생되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1심부터 항소심까지 치열하게 다퉜다.


싸움은 쉽지 않았다. 이미 조 씨가 수사 단계에서 회유에 못 이겨 "기억이 잘 안 난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진술한 조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증거를 파고들었다.


첫째, 계약서의 위조 사실을 입증했다.

회사 측이 제출한 정규직 계약서의 서명이 조 씨의 다른 문서 서명을 '복사 붙여넣기' 한 것임을 밝혀냈다.


둘째, 회사 관계자들의 녹취록을 확보했다.

"기간의 정함이 있는 계약직은 지원금을 못 받게 돼 있어서... OOO 부장한테 서명받으라고 했다"는 내부 직원들의 대화, "벌금을 대신 내주겠다"는 회유가 담긴 통화 내용을 법정에 제출했다.


셋째, 상식에 호소했다.

만약 조 씨가 정규직이었다면, 2년이 되는 시점에 굳이 계약 연장을 논의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회사가 1개월만 더 일해달라고 사정한 정황들은 그가 계약직이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정의는 살아있다


2020년 5월, 1심 법원은 조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사는 항소했지만, 2021년 2월 항소심 재판부 역시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며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는 "회사가 지원금을 받기 위해 임의로 서류를 꾸몄을 가능성이 높고, 피고인을 회유하려 했던 정황이 뚜렷하다"라고 판시했다.


고용보험법위반 무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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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무죄 판결로 인한 형사보상금까지 청구해 받아냈다. 2년 넘게 그를 괴롭혔던 범죄자라는 누명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형사보상.png




약자에게도 명예는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마무리하며, 나는 2002년 처음 이현을 설립할 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렸다. 국민로펌. 거창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뜻은 소박하다. 돈 없고 빽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조 씨가 만약 회사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은 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평생 스스로를 돈 몇 푼에 양심을 판 사람으로 기억하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가 지켜낸 것은 450만 원의 실업급여가 아니다. 한 성실한 기술자의 자존심과 명예였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거대 조직의 힘에 밀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려는 분이 있다면 말씀드리고 싶다. 타협하지 마시라.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같은 변호사들이 당신의 곁에 있다.





사람과 법 사이 그 애매한 틈에서 이야기를 씁니다.

법무법인(유한) 이현, 대표변호사 이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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