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계약 전세사기, 그리고 변호사 비용까지 받아낸 이야기
"변호사님, 집주인이 저더러 나가랍니다. 자기도 사기를 당해서 돈이 없다고요."
상담실에 마주 앉은 40대 가장인 의뢰인의 손에는 구겨진 내용증명 한 장이 들려있었다. 적힌 내용은 기가 찼다. 집주인이, 자신이 위임한 공인중개사로부터 횡령을 당해 보증금을 돌려줄 자력이 없으니, 일단 건물을 비워달라는 내용이었다.
자신도 피해자라는 집주인의 호소. 인간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30년 넘게 법을 다뤄온 내 경험상, 이 말은 가장 잔인한 핑계가 되곤 한다. 결국 아무 잘못 없는 세입자에게 모든 고통을 떠안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권한을 넘은 대리, 그리고 믿음의 대가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2019년 여름, 의뢰인은 서울 OO구의 위치한 한 빌라에 보증금 1억 8,000만 원으로 전세 계약을 맺었다. 당시 집주인을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집주인의 인감도장과 위임장을 소지한 공인중개사를 믿고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2년의 만기가 다가오자 집주인은 딴소리를 했다. 자신은 공인중개사에게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 조건으로 월세 계약을 위임했을 뿐, 전세 계약을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소위 이중계약 전세사기였다. 중개사가 중간에서 전세 보증금을 가로채고, 집주인에게는 월세 계약인 양 속여온 것이다.
집주인은 "내 권한 밖의 계약이므로 무효(무권대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현재 자금이 없으니 건물을 매각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거나, 일단 집을 비워주면 나중에 해결해 주겠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나는 의뢰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먼저 짐을 빼시면 안 됩니다. 집주인의 사정은 딱하지만, 그 책임을 선생님이 지실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민법에는 표현대리라는 법리가 있다. 설령 대리인이 권한을 넘어서 계약했더라도, 상대방(세입자)이 그에게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본인(집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집주인이 인감증명서와 도장을 맡기며 관리를 일임했다면, 그로 인한 사고 역시 집주인의 관리 소홀 책임이다.
말뿐인 호소에 행동으로 답하다
집주인은 "건물을 팔아서 갚겠다"라고 했지만, 그 말을 믿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말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그사이 다른 채권자들이 들어오면 의뢰인의 순위는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조치에 착수했다.
첫째, 집주인의 다른 재산을 묶었다.
집주인은 해당 빌라의 다른 호실 여러 채를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의뢰인이 사는 집 외에, 집주인 명의의 다른 호실 4채에 대해 즉시 부동산 가압류를 신청했다. 집주인이 재산을 처분하거나 은닉하지 못하도록 선제 타격을 가한 것이다.
둘째, 이사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의뢰인은 이미 계약 갱신 거절 의사를 밝힌 상태였고, 보증금을 받아 이사할 계획이었다. 보증금을 받지 못한 채 이사하면 대항력을 잃게 되므로, 주택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해 등기부상에 세입자의 권리를 못 박아두었다.
셋째, 본안 소송을 제기하여 압박했다.
가압류와 임차권등기로 포위망을 좁힌 뒤, 임대차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자금 융통과 매매가 막힌 집주인 측에서 백기를 들고, 합의를 요청해 온 것이다.
소송비용은 주셔야죠
상대방 변호사는 보증금 1억 8,000만 원 전액과 위로금조로 100만 원을 더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보통의 경우라면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의뢰인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법무법인에 600만 원의 수임료를 지불했다. 잘못은 집주인(그리고 중개사)에게 있는데, 왜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쓴 비용까지 감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상대방에게 단호히 요구했다. "소송비용 600만 원까지 전액 지급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압류를 풀지 않겠습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자신도 중개사에게 속았는데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줘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법적 책임의 무게는, 인장과 권한을 함부로 맡긴 사람에게 더 무겁게 지워지는 것이 맞다.
결국 집주인은 보증금 전액과 소송비용 600만 원을 모두 지급했고, 의뢰인은 금전적 손해를 하나도 입지 않고 사건을 종결할 수 있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법
이번 사건의 A 씨처럼, 법을 잘 몰라서 혹은 비용이 걱정되어서 억울함을 참고 넘기려는 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쓰인다. 집주인 역시 피해자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세입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나도 피해자"라는 집주인의 말에 움츠러들지 마시라. 당신이 지켜야 할 것은 그들의 사정이 아니라, 당신과 가족의 보금자리다.
나는 오늘도 서류 더미에 파묻혀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준비한다. 그것이 '사람'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의 숙명이니까.
사람과 법 사이 그 애매한 틈에서 이야기를 씁니다.
법무법인(유한) 이현, 대표변호사 이환권
1644-9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