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도 안 된 아이가 할아버지의 빚을 떠안은 날

상속이라는 이름으로 대물림되는 것들에 대하여

by 대표변호사 이환권


상속.


우리는 이 단어를 들으면 으레 유산을 떠올린다. 부모가 남긴 재산, 할아버지가 물려준 땅... 하지만 상속은 자산만을 물려주지 않는다.


빚도, 원망도, 때로는 고인과의 단절된 시간만큼이나 낯선 법적 의무도 함께 넘어온다.





태아에게도 상속권이 있다


몇 년 전 봄, 그녀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오래전 부모가 이혼한 후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어머니와 살았고, 아버지와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 아버지는 1억 4천만 원에 가까운 빚까지 있었기에, 그녀가 사망 소식을 듣고 한 일은 상속포기였다. 당연한 선택이다. 알지도 못하는 생물학적 아버지의 빚까지 떠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녀는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로만 믿었다.



그런데 사실 부친이 사망할 당시, 그녀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그녀가 상속을 포기한 순간, 뱃속 아이는 할아버지의 상속인이 된다. 상속 개시 시점에서 출생하지 않았더라도, 출생하면 상속 개시 당시의 상속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 같은 일반인이 이 사실을 알리는 없었고, 그녀가 아이를 출산하여 열심히 키우던 와중 고인의 채권자가 돌도 지나지 않은 그녀의 아이에게 돈을 갚으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의 무정한 논리


아이가 태어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날아온 소송 서류는 한 가정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채권자는 법리에 충실했다. 1순위 상속인인 그녀가 상속을 포기했으니, 다음 순위인 아이가 빚을 갚으라는 주장이었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에게 태아의 상속권이란 생소한 개념이다. "내가 포기했으니 당연히 빚은 사라졌겠지"라고 믿었던 어머니의 상식은 법이라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이미 상속포기 기간이 지나버린 상황에서, 갓 태어난 아이가 1억 원이 넘는 빚을 짊어지고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가혹하다 못해 비극적이다.





답은 특별한정승인


절망에 빠진 그녀를 위해 우리가 내놓은 해결책은 특별한정승인이다. 상속인이 채무가 재산보다 많다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알지 못했다면,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안에 신청할 수 있는 제도다.


여기서 핵심은 '중대한 과실'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녀가 부친과 20년 이상 연락이 끊긴 채 살아왔고, 자신의 상속포기로 인해 갓 태어난 자녀가 상속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음을 소명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이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이를 비난하거나 책임지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억 4천만 원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지다


가정법원에 특별한정승인을 신청함과 동시에 민사소송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사실관계를 재구성하고, 그녀가 채무의 존재를 알게 된 시점이 소송 서류를 송달받은 날임을 명확히 입증했다.


다행히 법원은 우리의 소명을 받아들여, 한정승인 신고를 수리한다는 심판을 내렸다. 이어지는 민사소송에서도 아이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빚을 갚으라는 화해권고결정을 이끌어냈다.


아이에게 남겨진 실질적인 재산은 없었으므로, 사실상 빚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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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라는 직업의 본질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변호사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법을 아는 사람? 맞다. 하지만 그것만이 변호사라는 직업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변호사는 법의 빈틈을 찾는 사람이다. 원칙이 부당한 결과를 만들어낼 때, 그 원칙을 완화할 다른 원칙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너무 늦은 걸까요?"라고 말하는 의뢰인에게 "아직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근거를 찾는 사람이다.



오늘도 나는 상담실에서 새로운 의뢰인을 만난다. 그들의 불안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작은 가능성의 실마리를 찾는다.


누군가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함께 길을 찾는 것, 그것이 내가 30년 넘게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사람과 법 사이 그 애매한 틈에서 이야기를 씁니다.

법무법인(유한) 이현, 대표변호사 이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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