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My favorite things 가사처럼, 몇 안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손편지 읽기. 단, 버스에 아는 사람이 없을 때만 말이다. 이따금 손편지를 받을 때면 꽃잎을 매만지듯 가방 한구석에 살포시 넣고, 새어 나오는 편지 향에 흠뻑 젖어들었다.
짧은 방학이 지나면 5학년이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혹시나 싶어 책상 안을 손으로 훑는데, 낯선 봉투 하나가 있었다. 곧장 우체통에 넣어야 할 것만 같은 흰 봉투. 열어보니 하얀 종이가 세 번에 걸쳐 접혀있었다. 의아했다.
돋보기안경.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에게 이는 가혹했다. 안경만 껴도 안경 재비라고 놀리던 때였다. 가까이 있는 글자를 크게 보여주는 돋보기의 볼록렌즈처럼, 그 아이는 가까이 봐야 보였다. 안경이 없는, 안경을 끼지 않은 우리에게 그 아이는 흐렸다.
컴퓨터와 협동 학습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모둠 수업이 많았다. 옆 모둠 책상이 정면을 향하지 않으면 옆, 그 옆도 삐뚤어졌고 의자 뒤에 건 책가방 때문에 오갈 틈이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날도 그랬다. 없는 틈을 비집고 교묘히 괴롭힘이 시작됐다.
"그만해!"
그제서야 그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방관자처럼 아무것도 못하다가 뱉은 첫마디. 뒷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불끈 쥔 손에 땀이 흥건했고 머리카락이 쭈뼛선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00에게
00야 난 니가 나에게 그런 용기와
힘을 줄진 몰랐서 1학년 아니 유치원 때
부터 이런 용기와 힘은 받아본적이 없거
든 00야 정말 고마워 난 너 덕분에
용기와 힘을 얻었다
고마워 안녕
1998년 2월 12일
새해가 되고 받은 첫 편지였다.
켜켜이 쌓인 미안함과 먹먹함, 후련함이 내 몸을 싸고돌았다. 그때부터였다. 아무도 없는 곳,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 울어도 웃어도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 곳에서 편지를 읽는 것.
며칠 전, 잠시 벗어둔 안경을 아이가 가져가는 바람에 안경다리가 휘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코까지 내려가 아이에게 쓴소리를 해댔다. 그래도 안경알은 깨지지 않아 다행이다.